그녀가희석될 때까지 나는 여행을 했다.

by 전성배

변변한 여행 한 번 간 적 없는 내가 봇물 터진 듯 여행을 하던 때가 있었다. 적어도 시 단위로 셀 수 있는 거리만큼 거처를 떠나는 여행을 자주 했다. 청주와 보은, 경주, 부산, 강릉, 제주도 등등 족히 두 시간 이상은 세어야 하는 곳만 골라 떠났다. 그리고 여행을 떠난 날이면 반드시 그곳에서 하루 이상 묵었다. 땅이 좁은 터라 하루면 어디든 왕복할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당일치기는 흔했지만, 나는 꼭 게스트 하우스든 낡은 모텔방이든 호텔이든 그곳에서 외박을 했다. 그것이 여행의 백미라 생각했다.


거처를 떠나 낯선 곳에 왔다는 불안이 이내 평안이 되는 과정을 모두 밟아야 비로소 여행이 완성된다고 믿었다. 이 과정은 최소 하루 이상을 필요로 하므로 여행을 간다면 외박은 필수였다. 그맘때 나는 오랜 사랑과 이별한 후 혼자였으니, 오직 나의 스케줄대로 움직이면 되었기에 고려 사항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처와 멀리 떨어지는 여행은 그렇게 한동안 계속되었다.


사실 이 여행에는 일찌감치 목표가 있었다. "이별의 향내가 희석될 때까지"였다. 코를 박고 맡으려 해도 나지 않을 만큼 흐려질 때까지, 나는 거처에서 멀리 떠나는 여행을 지속하기로 했다. 그맘때 나의 집에는 헤어진 그녀의 흔적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빠져나갈 때까지 집을 떠나 있기로 한 것이다.


그녀와 연애를 시작할 무렵 나는 혼자 살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자취방은 일찍이 '내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이라 불렸고, 젊은 남녀의 사랑은 공간을 무한정 채워나갔다. 사랑을 감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자취 일 년 차에는 집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나의 집에서 사랑을 칠하고 쌓기를 반복했다. 셀 수 없는 식사와 밤은 물론이고, 시간이 갈수록 곳곳에 함께 꾸민 흔적이 늘어갔다. 함께 골랐던 포인트 벽지가 머리맡 벽면에 붙고, 함께 고른 중고 티브이는 낡았지만 선명하게 잘 나와 틀 때마다 "크 잘 샀다"라는 감탄을 입버릇처럼 뱉게 했다. 스톨 의자와 책상, 행거 하물며 이불에도 그녀의 손길이 닿았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였다. 우리가 쌓은 것들이 이별 후에는 온전히 나 혼자 견뎌야 하는 짐으로 쏟아졌다.


그녀와 이별하고 우리 집이 나의 집이 되었을 때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왜 그녀와 나의 집을 우리 집으로 살았을까 하는 후회로 밤새 뒤척여야 했다. 새 이불을 들이고 티브이를 바꾸고 벽지마저 손을 댔지만, 공간에 밴 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일이건 휴일이건 일찍 나가 늦게 들어가는 날이 많았다. 그때만큼은 마음이 일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리 떠나 외박을 하는 여행이 잦아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찍 나와 늦게 들어가도 우리였던 집에 혼자 잠드는 한, 괴로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집에서 그녀가 빠져나갈 때까지 여행을 하기로 한 것이다.


내가 덤덤하게 온종일 집에 머물 수 있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우리의 삶과 농산물 사이의 교점을 말하다"

농산물 에세이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전성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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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 田性培

aq137ok@naver.com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에세이 / 2021 .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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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면》 : 전자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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