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글의 나르시시즘에 빠질 때마다 그들의 글을 읽는다. 그들의 문장은 매번 내가 나르키소스였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세상에 쓸모가 있는 문장을 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마땅히 사랑할 만한 서사를 들려주고 있다 장담했고, 보란 듯이 얻은 출판 작가의 영예가 여기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내 손에 쓰이던 무수한 글자들은 문장이 되지 못하고 물방울이 되어 이름 없는 강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몽유병 환자처럼 강가로 가 수면에 얼굴을 바짝 대어, 나의 글자들만 보며 황홀함에 젖어있었다.
'박준 시인'과 '이슬아 작가'는 그런 나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박준 시인은 그 직업처럼 주로 시를 쓰다 이따금 산문을 쓰는 출판사 편집자 겸 문인이다. 이슬아 작가는 과거 단편 소설을 통해 소설가로 등단하여 현재는 방송과 라디오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녀의 직업은 다양하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글쓰기 선생님이며 '헤엄 출판사'의 대표이고, '일간 이슬아'의 연재자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글과 밀접하게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다른 걸음새로 삶을 나아가고 있다. 그들이 쓰는 글도 확연히 다른 색을 지녔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차이가 글에도 통용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글은 확연히 다른 매무새로 독자에게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내 작은 삶에서 만큼은 동일한 처우로 살아간다. 분명하고 적나라한 나의 사랑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받는 두 사람이다. 그 사랑이 얼마나 균등하냐면, 내가 일찍이 두 사람 모두를 알았다가 비슷한 시기에 흘려보내고 다시 사랑하게 되었을 정도다.
박준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건 서점에서 그의 책을 만나면서다. 2017년 7월 초하루. 나의 생일과 같은 날 출간된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산문집이었다. 당시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겠다는 열망으로 마음이 불타던 상태였다. 평소 멀리하던 독서를 하자는 다짐을 세워 휴일에 서점을 방문했고, 몇 권의 책을 골랐을 때 박준 시인의 책도 섞여 들었다. 세네 권 정도 샀던 것 같다. 얼마 안되는 그 책들을 참 오래도 붙잡아 두었다. 독서 초보자인 만큼 박준 시인의 책을 포함해, 하나 같이 얇은 책을 샀는데도 다 읽기까지 반년은 걸렸다. 꼼꼼히 읽어서가 아니라 꾸역꾸역 읽어내니 그만큼이나 걸렸다. 읽는 족족 흩어져 사라지는 독서법이었다. 당연히 글쓰기의 실마리는 단 하나도 얻지 못했다.
이슬아 작가는 이듬해 2018년에 알게 되었다. 우연히 브런치에서 그녀의 인터뷰를 보았고, 흘러 흘러 그녀가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그녀의 글을 만났다. 잠깐 그 당시 나의 글을 떠올려 본다. 어떤 의미와 깨달음을 전하는데 병적으로 집착하는 글이었던 것 같다. 삶을 왜 그리 무겁게 바라봤는지.. 사람과 대화, 장소, 시간에 상관없이 어떤 의미를 찾느라 혈안이었다. 그러다 겨우 하나 건지면 그것으로 장황한 선도문 같은 것을 적었다. "모두 내가 찾은 깨달음과 의미를 보라. 내가 일러주는 길로 걸어가면 이를 손에 쥘 수 있으리라" 참 꼴값이다. 사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미 수년간 몸에 밴 습관이라 별 뜻 없이 쓰기 시작한 글도 어느새 선도문이 될 조짐을 보여 갈아엎기 일쑤다. 그래도 자각하지 못하고 쓰던 그때보다는 나으리라. 당시 나는 이를 모르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선도문을 적는 일에 중독되어 있었으니까. 당연히 그녀의 글은 당시 내게 감흥을 줄 수 없었다. 같은 의미로 박준 시인의 글도 내게 그랬다.
가족과 친구, 연애와 사랑 때로는 섹스까지 일상의 도처에 깔린 모든 걸 대수롭지 않다 여기며 덤덤히 말하는 그녀의 어조가 내게는 감동스럽지 않았다. 재미없고 시시한 그러면서도 뭇독자의 사랑을 받는 이해할 수 없는 글쓰기라 생각했다. 그것이 내내 나를 불편하게 해 이슬아 작가를 흘려보냈다. 어떤 의미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써내는 선도문 따위의 글이 아닌 박준 시인의 글도 마찬가지다. 얻을 것이 없다 생각해 스스로 등을 졌다.
하지만 수년이 지나 지금. 나는 두 사람의 글을 보려 고개를 들어 올린다. 수년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터라 목이 뻐근하다. 나의 글이 같잖은 선도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어느 날 함부로 흘려보냈던 그들의 글이 떠올라 다시 꺼내어 읽은 날부터 목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꽤 아프지만 피하면 안 되는 통증이다. 일찍이 용서를 구할 수 있었던 죄를 그때는 죄인지 몰라 저지르던 나의 과오와 이제라도 대면한 것이니 말이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글을 쓰면서도 비슷한 글을 쓴다. 어느 글에서도 무언갈 선도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생각은 글을 읽는 독자에게 맡기며 그저 무언갈 쓴다.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생각하지 않을 어떤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여지를 던진다.
박준 시인은 협제로 간 어느 날, 아는 이 하나 없는 그곳에서 오래 침묵하다 이내 과거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안도했다고 말했다. 자신을 가장 슬프게 한 건 친구의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의 소리였다고 말했다. 덕분에 내게 여행이라는 '떠남'이 불안보다 안도감과 편안함을 주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유년 시절 내가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울 때, 통곡 소리에는 가만히 계시던 어머니가 내가 숨 쉴 틈을 몰라 '꺽꺽'할 때는 조용히 안아 들며 등을 다독여주시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때를 쓰며 울던 나의 못된 버릇을 고치려 통곡을 방치했지만, 그 몰아쉬는 숨은 어미로서 도저히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을 테지.
박준 시인의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세 번째 읽을 때 즈음, 이슬아 작가의 <일간 이슬아 수필집> <부지런한 사랑> <깨끗한 존경>을 한 번에 구매해 지금도 아름아름 읽고 있다. 인터뷰집인 <깨끗한 존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녀가 살아온 일상의 어느 부분들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글쓰기 수업에서 있었던 일화와 가족과의 식사, 대화. 연인을 좋아하기 시작한 날과 그와 잠을 자게 된 날 등등 지극히 일상적이다. 아울러 친절하게도 각 에피소드의 말미에 일자까지 적어두었다. 덕분에 각 글을 읽으며 나는 그녀가 살아온 2018년의 어느 날과 2019년의 어느 날을 상상해본다. 어떤 무언갈 깨닫고 의미를 얻거나 삶의 힌트를 엿보고 진한 곱씹기를 하는 등의 시간은 없지만, 한 사람이 삶을 살아내는 무게감을 잠시나마 느껴본다. 어느 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는 그녀. 직업을 세네 개씩 갖고 사는 만큼 어느 시간도 허투루 살 수 없는 것이 당연할 테다. 매번 그녀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독자로서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을 처음 밟아본다. 작가의 다음 글이 궁금해지는 묘한 설렘을 처음 맛보는 터라 요즘 늘 그녀의 글이 고프다.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른 글 쓰지만, 모두 내가 사랑하는 글이다. 박준 시인의 글은 형용할 수 없는 깊이감에 거대한 산맥을 우러러보는 느낌이라 한 번씩 그 아득함을 속에 담아 생각하는 일이 힘들 정도지만, 꾸준히 그것을 한다. 기분 좋은 고생이라 생각한다. 이슬아 작가는 무언갈 숨겨두는 거 없이 모든 걸 글의 수면 위에 띄어둔다. 어렵지 않게 그녀의 모든 걸 독자가 읽어낼 수 있어, 한 사람을 좋아하다 존경하게 되는 경위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요즘 박준 시인의 글로 생각의 근육을 키우다 혹사시켰다 싶으면, 이슬아 작가의 글로 긴장된 근육을 이완시킨다.
나는 열렬히 그들처럼 쓰고 싶다. 그들과 같은 글이 아니라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다. 그들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글을 쓰면 쓸수록 멀어지는 기분이다.
"우리의 삶과 농산물 사이의 교점을 말하다"
농산물 에세이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전성배 지음
전성배 田性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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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에세이 / 2021 .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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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면》 : 전자 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