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있었던 라디오 녹음 중 낭독 시간 때의 일이다. DJ는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를 시작으로 열몇 개의 질문을 연달아 내게 물었고, 후반에 들어서 책의 낭독을 부탁했다. 나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속 겨울 챕터의 '유자'편. 그 끝자락에 걸쳐진 단락을 읽기로 했다
“지금 할머니의 기억은 그 예전보다 훨씬 더 흐려졌다. 이따금 켜지던 기억의 등도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 아흔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기억은 닳고 있다. 마치 기억을 연료 삼아 여생을 보내시는 듯하다. 나는 겨울이면 유자 덕에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할머니가 전해준 온기와 사랑을 되새길 수 있다. 그리고 추운 겨울밤, 유자차 한 잔을 마시며 빌어본다. 노랗게 우러나는 유자의 색처럼 할머니의 흐린 기억에도 환한 빛이 들기를."
짧은 낭독이 끝난 후 이어진 DJ의 질문은 이 단락을 선택한 이유였다. 나는 설명하기에 앞서 집필 당시를 회상했다. 지난가을. 원고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유자'를 주제로 꺼냈다. 할머니 덕분에 유자를 좋아했던 기간이 길어서, 굳이 장사 때의 일화를 찾지 않아도 이에 얽힌 마음들이 내게는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막힘없이 이야기를 써낼 수 있었다. 그러다 거의 끝에 다다랐을 때 불현듯 할머니의 처지가 떠올랐다. 이제는 내가 유자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씀드려도 고개를 갸웃하시는 할머니의 힘없는 움직임. 나의 유년 시절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우리의 일화를 정작, 할머니는 그 대부분을 제대로 짚지 못하고 허공만 휘적이는 모습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언제부턴가 치매를 앓기 시작하시면서다.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되 옛 기억은 꺼내지 않는 모습. 어느 주머니에 기억을 담아 두었는지 몰라 빈 주머니를 뒤지는 모습. 기억을 방에 차곡차곡 쌓아둔 것은 확실한데, 그것을 밝힐 등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내게 보이실 때 확신했다. "아 잃어가고 계시구나…." 그것이 마음 아팠다. 이 마음을 눌러내며 집필한 유자 편을 그래서 더 잊지 못한다.
DJ의 질문에 나는 문장을 선택한 사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굳이 이 정도로 긴 설명이 필요한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에게 말했다. 중간에 끊거나 이후에 편집이 되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DJ는 차근차근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되레 과도하게 경청하는 듯 보였고, 내 말이 끝났을 때 나를 위로해 주려는 심산인지 그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그는 내게 말했다.
"치매가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고령의 어르신 대부분이 크고 작은 치매를 앓고 계시죠. 어떤 어르신은 그 정도가 심해서 아이가 되곤 합니다. 저는 그게 반드시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로 살다가 어른이 되죠.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다 생보다 죽음에 더 가까워질 무렵, 치매를 앓으며 기억을 잃게 됩니다. 마치 다시 천진난만한 아이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가진 것들을 다시 내려놓으려는 것처럼 말이죠. 삶을 정리하는 한 인간의 끝이 그런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이 생을 정리하기 위해 밟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그 말이 가슴에 얹힌 무게 추를 얼마 덜어내는 느낌이었다. 치매라는 병이 한 사람이 쌓아온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것들을 내려놓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나는 조금 덜 슬플 수 있다. 그가 잘 잃고, 그가 잃은 것은 내게 잘 있다고 말하기만 해도 짧은 시간이 우리에게 남은 전부라 생각하면 슬프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삶과 농산물 사이의 교점을 말하다"
농산물 에세이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전성배 지음
전성배 田性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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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에세이 / 2021 .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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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면》 : 전자 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