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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성배 Sep 29. 2022

낙조落照 같던 선배를 그리는 나

선배를 생각하면 종일 맑았던 하늘에 비로소 드리운 낙조가 떠오른다. 파란에서 어둠으로 넘어가는. 수천수만을 넘어 무량으로 나뉠 색들의 향연. 그 무한에 가까운 색들의 뒤로 밤이 찾아오면 머릿속에 떠오르던 선배는 극이 암전 되듯 시꺼멓게 소멸한다. 선배는 오직 저녁에 국한되어 나의 머릿속을 맴도는 것이다. 선배를 떠올리면 나는 마치 강이 된 듯하다. 낙조 아래 놓인 강. 나는 강에 동화되어 이렇게 생각한다. 하늘을 담아내려 애쓰고 있지만, 끝내 다 담아내지 못하는 애처로운 처지라고. 그럼에도 꾸역꾸역 담아내려 하는 강은 연민의 대상이라고.


타인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독선적인 선배들의 틈에서 나는 한동안 먹고살았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면서도 아집은 또 어지간히 부리는. 현시대가 ‘꼰대’라는 단어로 그들을 정의하기도 전에 나는 그야말로 꼰대 같던 그들 틈에서 겨우 생계를 잇고 있었다. 선배는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이였다. 입사 5년 차 대리였던 선배는 부하 직원들과 상사들의 중간을 잇는 징검다리 같은 혹은 완충제 같은 인물이었다. 그의 배려에 숨통을 트고, 조금 더 그곳에서 버틸 수 있었던 후배들이 나를 포함해 한둘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어느 젊은 디자이너의 사연이 그렇다. 홍일점이었던 그는 불편할 법한데도 남자 상사들과 곧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남자 상사들이 하루가 멀다고 퇴근 시간이면 선배와 말단 사원들을 모아 저녁밥을 안주 삼아 술을 들이켜던 시간에서 그는 웬만하면 빠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상사들의 반복되는 과거의 이야기들은 물론이고, 논리가 부족한 구박도 겸허한 태도로 들으며 상사들의 비위를 맞췄다. 그것으로 사회생활을 잘한다 못한다를 판명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기는 하나, 적어도 그 모습은 사회생활을 잘하는 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상사들은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집이 세다.” “가식적이다.”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 등등 선배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기꺼이 제 시간을 쓰면서까지 노력했던 그의 모습이 허무하게 뒤에서 험담을 했다. 여기서 선배만큼은 예외였다. 나아가 선배는 이를 가만히 듣는 이 또한 아니었다.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정도로 변호하지는 않되 최선을 다해 그를 보호했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상사분들과 어울리려 노력하잖아요.” “이번에 그가 참여한 프로젝트만 봐도 확실히 발전하고 있어요. 일도 잘하고 나름 선배들과도 잘 지내려 노력도 하고 있으니, 마냥 밉게만 보이지는 않지 않나요?” “그 친구도 진심은 아닐 거예요. 물론 가식도 아니고. 자기 행동이 어떻게 평가되는지 알고 고치려 애쓰고 있어요.” “마음이 참 예쁜 친구입니다.”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선배는 그렇게 후배들을 보호했다. 때로는 후배들의 고충을 상사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기도 했으며, 이때는 또 상사들의 비위에 맞춰 순화하거나 정도를 낮춰 이야기했다. 그들의 귀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말이었다면 귓가에 가기도 전에 탈락했을 말들이 선배를 통해 상사들에게 닿았다. 선배는 그곳에서 우리를 최대한 오래 살게 했던 사람. 충분히 경력을 쌓아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끈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선배가 되고 싶은 이유였다. 보호하는 사람으로, 의지가 되는 사람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후배들에게 기억되고 싶었다. 나는 나의 위에서 따듯한 빛을 발하는 선배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 내는 강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선배가 사라진 뒤 당시 낙조 같았던 선배만큼의 경력을 쌓고 후배들을 맞이했음에도 나는 선배가 될 수 없었다. 제아무리 넓고 깊더라도 결국 하늘의 일부를 담는 것에 그치고 마는 강처럼. 그저 무한히 물드는 선배를 조금 옅게, 조금 부족하게 비춰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선배보다 많은 후배를 거느렸지만, 나의 변호로 오해를 풀었던 후배는 현저히 적었다. 나로 인해 위안을 얻는 후배도, 회사 생활을 버티는 후배도 낙조 같던 선배에 비하면 너무도 적었다. 그의 전철을 밟으면 밟을수록, 그를 닮으려 애쓰면 애쓸수록 선배는 저 높은 어딘가로 저 먼 어딘가로 내게서 멀어져 갔다. 그리운 무언가를 흘리며.


지금도 종종 선배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를 생각한다. 당시 선배는 많은 경력에 비해 나이가 어렸다. 내가 선배와 같은 경력을 쌓았을 때 나이가, 당시 선배보다 두 살 더 많았으니까. 어쩌면 인간은 동등한 시간을 살아도 다르게 자라는지도 모르겠다. 팔의 길이와 그 팔이 감싸 안을 포용의 범위가 달라지는지도 모르겠다. 선배를 생각하면 이것은 짐작이 아니라 확신으로 바뀐다. 선배는 유별나게 잘 자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무식한 나는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이 간극을 좁히고자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선배만큼 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얼마가 걸리든 더 많이 살아내는 것으로 선배만큼 커지고 싶다. 


그때까지 선배가 떠오르는 저녁이면 꾸역꾸역 나의 강물 위에 선배를 그릴 것이다.



<너를 애도하는 날에도 나는 허기를 느꼈다>

※ 책 판매 수익금은 집필 활동과 농가 홍보를 위해 쓰입니다.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가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과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농부와 농산물을 주로 이야기하고, 삶에 산재한 상념을 가끔 이야기한다. 생生의 목표는 손가락이 움직이는 한 계속해서 농가를 위해 농부와 대화하고 그들의 농산물을 알리는 것이다. 그 글은 주로 밤이 비유하는 죽음의 위에서 쓰일 것이다. 조금 더 바라도 된다면 농부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도 쓰고 싶다. 당신일 수도 나일 수도 있는.


aq137ok@naver.com

https://linktr.ee/seongbae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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