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없어도 살아지겠지만' 속 의의
전성기를 지나도 한참이 지나 이제는 늙은 채로 방치된. 젊은 사람은 거의 없고 장소와 함께 늙어버린 노인들만이 자리를 지키는, 저무는 세월 같은 곳. 동인천이 그렇다. 동인천역에서 배다리를 지나면 이용객을 찾기 힘든 도원역이 나온다. 그 뒤편에는 아주 오래된 집들이 모여 있다. 동인천 전반이 그렇지만 유난히 더 늙어버린 곳이다. 지금은 아파트를 짓는다고 다 사라졌지만,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는 집과 함께 늙어버린 노인들이 많았다. 이웃과 말을 섞는 노인보다는 홀로 집 앞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는 노인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곳. 그 눈빛은 보이지 않는 무엇을 보는 눈이라기보다는 공허한 눈빛을 그저 허공에 걸어 둔 것에 가깝다. 낡은 옷가지를 옷걸이에 무심히 걸어 두듯 시선을 걸어 두었다. 대부분이 노파였고, 사정은 비슷했다. 자식들은 일찍이 출가하고 남편은 먼저 하늘로 떠나보내 이제는 혼자 살게 된 여자들. 그때 인터뷰를 나눈 할머니가 내게 말해 주었다.
농산물과 관련 없는 사람을 인터뷰한 걸로는 지금까지도 유일한 동인천의 할머니. 그녀는 출가한 자식들과 연락을 안 한 지 오래라고 했다. 둘뿐인 아들들이 모두 하는 일이 잘되지 않아 힘들게 살고 있다 보니 좀처럼 연락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란다. 본인이 잘 안 하니 자식들도 더 안 하는 것 같다고. 충분히 서운해 할 법한 일인데도 할머니는 도리어 미안하다고, 이해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형편이 괜찮았다면 자식들이 이렇게나 힘들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애초에 공부를 더 시켜 훨씬 더 편하고 돈 많이 버는 일을 하게 했을 텐데. 아마 자식들도 본인의 처지가 좋지 않아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에 연락하지 않는 걸 거라고, 할머니는 확신했다. 두 아들의 이름을 몇 번이나 발음하며 잘되길 매일 기도한다고도 말했다.
남편에 대한 이야기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특이하게 먼저 떠난 남편도 몇 번씩이나 이름으로 불렀다. 나의 외할머니와 친할머니는 물론이고, 지금껏 만난 고령의 여성 농부님 모두가 자신의 남편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남성 농부님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아내를 ‘할멈’이라고 불렀다. 어떤 노인도 배우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모습을 보인 적 없다. 그런데 동인천의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으니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 오래된 목소리에서 동년배 어른의 이름이 나온다는 건, 마치 연극 같고 영화 같았다.
남편은 살아생전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어찌나 말이 많은지 혼자 조용히 쉬고 싶을 땐 남편을 피해 밖을 나가야 할 정도였다. 동네 사람 중 누군가는 어찌 그렇게 말이 많으시냐고 흉을 본 적도 있단다. 말은 하면 할수록 실수를 범하기 쉬우니까. 어른이라고 해도 이 사실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도 말이 많은 남편이 자주 위태로워 보였고, 유별났고 때론 싫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좋은 것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 자식들이 다 나가고 티브이에서 하는 말이 다 거기서 거기가 되었을 때, 예상할 수 없는 수다쟁이 남편은 사람 사는 맛을 나게 했다.
생은 돌을 던진 수면 위의 파문 같은 것이라 멀리 갈수록 물결이 그렇듯 생도 잠잠해진다. 특별한 것 없고, 모르는 것 없고, 죽음쯤은 이 나이에는 뻔한 일이 되어 버린다. 돌이 이제 막 물속에 빠졌던 젊은 날은 격동의 나날이라 온통 예측할 수 없는 일투성이지만, 퍼져 나간 물결은 다른 것이다. 일렁임이 점점 줄어들다 끝내 멈춘다. 예외일 수 없던 그녀가 그래도 남들보다 오랫동안 예외일 수 있던 이유는 바로 남편 덕분이었다. 어디서 그렇게 이야기를 듣는지 매일매일 새 말을 가지고 왔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자신의 말에 자신이 먼저 깔깔 웃어 보였다. 할 말을 다 하면 꼭 끝에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재미있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 그녀는 실은 재미없을 때가 더 많아도 매번 재미있다는 말을 했다. 남편이 있어 살맛 나기 때문에. 고맙고 여전히 사랑스러운 마음에. 하지만 이제 그녀도 다른 사람처럼 살아간다. 동네에 혼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그러하듯 그녀의 물결도 잠잠해지는 중이다.
나는 자식과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과거를 술회하던 할머니의 이름이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나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하는 이의 이름은 무엇일까. 조심스레 존함을 여쭸다. 할머니는 일순 말을 멈추시더니 약간 뜸을 들이다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말했다. 마치 너무 오래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아 순간 잊은 사람처럼 늦게. 그 침묵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의 나이쯤 되면 이름으로 불릴 일은 더욱더 없어진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물론이고, 친척과 형제들까지 모두 먼저 떠나고, 남편도 마땅한 친구도 없이 혼자가 되니 자신의 이름을 말할 기회가 얼마나 될까. 그건 혼자 살고 계시는 나의 외할머니 ‘정월영’ 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동인천의 할머니의 이름에는 ‘순’ 자가 들어갔다. 순박한 할머니와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발음하며, 긴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맙다는 말을 올렸다. 할머니의 존함을 나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겠다는 말과 함께.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문득 동인천 할머니의 이름을 부른다.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 여전히 남편과 아들들의 이름을 부르며 추억을 떠올리시는지 궁금하다. 그사이 자신의 이름을 또 말한 적은 없는지도. 무엇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아들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고 믿는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의 이름을 궁금해 하지 않지만, 그곳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는 누군가의 이름을 끝없이 부른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 서로를 사랑하는 이들일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거대한 세상 속에 상대를 구체화한다. 이내 현현한 두 사람은 서로를 대체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럼에도 살아가겠다는 힘을 낸다. 이름이 없어도 살아지겠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기 위해 나는 각별히 더 신경 써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사랑하려는 사람에게 내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한다.
전성배田性培 : 1991년 여름에 태어났다.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야자 시간』 이 있다. 생生이 격동하는 시기에 태어나 그런지 몰라도 땅에 붙어사는 농부와 농산물에 지대한 사랑을 갖고 있다.
aq137ok@naver.com
https://litt.ly/aq137ok :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