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려거든 화장실에서 읽어라

차마 들여다보기도 민망한 장소에 누군가 편견 없이 숨어있을 것이다

by 이정우 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는 화장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오늘따라 화장실 문이 그 후로도 몇시간 동안이나 닫혀있었다. 화장실은 사람들이 가장 자주 드나드는 장소이다. 그렇기에 문이 몇 차례 열리고 닫혔지만 화장실 안이 보일 만큼 문틈이 벌어지는 일은 한동안 없었다. 아마도 내가 먼저 문을 닫았기에 그 문을 열겠다는 용기를 가진 자가 나타나야만 문이 열릴 수 있었을 것이다. 내 마음의 문도 항상 내가 아닌 다른 사람만이 열 수 있었다. 그렇게 닫힘과 다침의 의미를 잘 아는 내가 문을 굳게 닫았다. 그것도 신중하게 생각해 본 후에. 아주 게으르게 반나절이 지나서야 일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밤낮으로 빨간 눈으로 살펴본 화장실은 놓인 물건이 별로 없어도 난잡하게 느껴졌다.

하양, 그리고 회색 그 사이에서 더러운 색깔을 찾아볼 순 없었다. 거울이 얼룩져있긴 했지만 난 그 거울이 닦여지면 어느 정도로 빛이 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놓인 물건도 별로 없는 화장실이 난잡해 보일 때가 많다. 물이 쏟아져도 안전하도록 설계된 공간이지만 뜨거운 커피를 몸에 쏟았을 때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화상을 입는다. 아주 어릴 땐 맨발로 화장실을 드나들 때도 자주 있었다. 어차피 내가 아는 건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적기에 숫자로만 여겨지지 않았던 친구 두 명 정도였으니 화장실이 난잡하거나 더럽게 여겨지는 이유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샤워를 한 후 화장실의 모든 습도는 바닥에 모인다는 걸 계산하지 못하고 한 발을 뻗었다. 오늘따라 내가 왜 이리 조심스럽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바로 미끄러져서 다리 찢기를 했다. 나에게도, 구경하는 입장에게도 박진감이 있었으면 웃음이라도 나왔을 텐데 박진감은커녕 순간의 본능으로 미끄러짐을 피하지도 못했나보다. 몸은 하나도 닫히지 않았고 예상 외로 젖은 곳은 하나도 없었지만 더러워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기분이 더러웠다.


화장실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공중화장실에 대해서는 딱히 호불호가 없을 때에도 문이 열려 있는 화장실들을 싫어했었다. 야외에 있는 화장실 자체가 평소에는 발견하기 힘든 공간이다보니 문을 열어놓아야 찾을 수 있었지만 어렵게 화장실을 찾아내고 난 뒤엔 그 문을 열어둔 것이 그리 반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화장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쉽사리 들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낙서가 많은 장소는 누군가의 추억인 것 같아서 걸음을 옮기면서라도 바라보는 편이지만 그 낙서가 화장실에 많을 때는 한참을 낙서가 없는 빈 곳을 뚱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공중화장실이 아무리 모두를 위한 공간이라 해도 한 명이 나간 뒤에 다른 한 명이 사용하는 시스템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있다. 화장실을 공유하는 느낌은 괜찮은데 동시에 쓰는 느낌은 아주 별로다. 그러나 화장실은 하나밖에 없는 장소라는 것을 나를 지켜보는듯한 나무들 사이에서 알았고 점차 움츠러들지만 당당해지는 나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나의 강박증은 깔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 도서관에서 마주친 화장실의 문은 닫혀있었다. 도서관 화장실의 경우도 공중화장실이기에 늘 열려 있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아예 못 들어가게 잠궈 두었다고 느낄 정도로 굳게 닫혀 있었다. 아마 오늘 화장실을 쓴 사람은 굉장히 폐쇠적인 사람이었을 거다. 아니면 그저 닫혀있는 걸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닫혀있는 것의 좋은 점은 다른 색과 내가 섞이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인데 그런 생활은 의지로 변해 건강한 삶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나도 그 점을 좋아해서 화장실이라는 방에 들어갈 때는 곁에 열려 있는 무언가나 나보다 큰 무언가가 없기를 바란다. 없었으면 하는 것일수록 기억이 되어 내 곁에 오래 붙어있기에 미리 정해두긴 싫지만 예를 들자면 어쩌면 문보다도 중요한 벽면이 떼어져서 완전히 고장난 것이 된 화장실과 여유가 넘쳐서 잠깐이라도 나를 바라보는 듯한 나무가 그것에 속한다. 오늘은 고장 난 것도 없고 나를 지켜보는듯한 나무도 없었지만 나는 금세라도 들어가려던 화장실로 들어가질 않았다. 대신 읽다 말았던 책을 펼쳤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뽑아 들었던 책인 <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의 제목이 멀어질 때쯤에 내가 화장실로 바로 들어가지 않았던 이유를 발견했다. 가끔씩 책은 내가 한 행동의 이유보다 하지 않았던 행동의 이유와 그 여파까지를 집어서 알려다 주곤 했다.

그 책의 저자는 독자와는 깊이 교류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절감한 순간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원칙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던 인연에 대한 이야기일 것으로 예상하고 글을 읽어내려갔는데 작가는 단 몇 문단만에 새로운 두 사람의 친구가 되더니 단 몇 페이지를 넘긴 후에는 두 사람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아마 저자는 아예 교류하지 않겠다는 원칙이 아니라 깊게 교류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기에 그 원칙을 뚫고 들어오는 사람이 생겼을 것이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하며 짐처럼 들인 관계가 나를 귀찮게 할 때도 많지만 저자의 경우처럼 마음의 벽을 견고하게 세울 때 그 안으로 누군가 들어와서 마음 안에 따뜻함을 심어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심결에도 알고 있던 감정이었고 굳이 적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생겨있는 버킷리스트와도 같은 것이었지만 평소에는 그저 상쇄되는 무거움 정도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믿는다. 평소엔 무거운 것이 나의 속을 얹히게 만들었지만 평소답지 않은 일상의 순간들이 그 불편함을 이겨주었다. 힘듦의 실체는 무게가 아닌 시작에 있다.

저자가 가끔씩 연락하고 자취방에 놀러 가기도 하던 부부는 자취방에 아무도 들이지 않고 우울증을 겪었던 아내를 위한 배려로 흔한 친척의 방문 한번 없었다고 한다. 다른 가정 또는 부부라고 한다면 ‘너 무슨 일 있어?“하는 질문이 한 번쯤은 들릴듯한 상황이 되지만 이들에겐 이러한 생활이 외로운 힘듦을 겪는 사람들이 많이 선택하는 쉼을 위한 도피나 도피를 위한 쉼이 아니라 그저 서로가 편안한 방향으로 목적지를 틀기 위한 선택 하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질문들 앞에 참 많이도 고개를 돌리거나 숙여야겠지만 서로가 당당할 많은 날들을 위해 이러한 선택을 했을 것이고 늘 옳다고 판단했기에 조금은 쉽게 선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재와 미래를 모두 감당하기 위해선 여유로워야 한다. 이들은 그저 짊어지면 안 될 무거움을 덜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겐 그저 핸들 한 번 꺾은 것에 불과하더라도 마주치는 사람들은 영원히 발 디딜 틈 없이 단단한 길이 아니라 그들의 좌회전과 우회전에만 관심을 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조언 뒷면에 그들이 유턴을 했으면 하는 마음도 감췄을 테고.

독자와 깊게 교류하지 않겠다는 작가와 친척도 집에 들이지 않았었던 독자가 뭉쳤다. 서로 생각이 뭉쳐지기 전에 우선 같이 사는 것부터를 결정한 듯하다. 꽤나 현실적이게 세 명이 살기 편한 집으로 이사도 하고 평생 책임져주겠다는 각서까지 썼다. 부부 중 첫 번째로 저자와 아는 사이가 된 언니는 둘 사이에 몇 년 정도는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다시 저자를 만나자마자 더 이상 힘들어하는 모습 보고 싶지 않다며 둘이기에 해 볼 수 있는 같이 살자는 결심을 한다. 저자의 형부, 그러니 이들 부부의 남편과 저자의 사이에는 몇 년을 떨어져 있기 전에도 먼저 알게 된 언니와의 사이보다는 한 발짝씩 멀리서 걷게 되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형부는 아내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많은 것들에게 거리를 두며 지내왔지만 저자에게는 거리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책의 내용으로 짐작해보았을 때는 처음 같이 살게 되었을 때는 평소와 같은 친절만을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이 함께하는 시간을 평생으로 정했을 때부터는 호칭도 작가님에서 처제로 바뀌게 되었고 저자도 이들을 진정한 가족으로 생각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감히 평생이라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애써서라도 상처 주지 않게 된다.

가끔씩 굳게 닫힌 마음도 열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문을 연다는 것은 허락과도 같은 것인데 처음엔 그저 같이 한 시간을 보내는 것 정도를 허락하기에 상대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는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마주 보는 대화가 차갑지 않을 때 그제서야 나 자신이 마음의 문을 대문 열 듯 활짝 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부의 또 다른 남편처럼, 아내처럼, 그리고 아이처럼 살아가는 저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은 가족일 것 같다. 누구에게라도 셋이 한 번에 불리기 시작할 때 그들은 서로의 단합과 애정이 이어지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실감할 것이다. 애써 고독해지려 하거나 고립되려 하던 사람의 개방적인 모습은 꽤나 평화롭다. 그만큼 더 이상 개방적이지 못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상황을 미워했을 것이다. 어차피 문을 활짝 열어두어도 들어올 몇 사람만 들어오게 된다. 난 내 마음으로 들어와 줄 사람이 한 명뿐이라도 항상 다양한 방식으로 방문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조금 더 의미 있게 문이 열릴 것을 기대했기에 오늘 아침에도 화장실 문을 닫아두었다. 마음을 닫은 이유를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열릴 먼 훗날에 가까워질 수 있고 일상 속 작은 열림의 몇 초들을 숨죽인 1년보다도 큰 의미로 바라볼 수도 있다. 이젠 걱정을 놓을 수 있을 것도 같지만 그래도 마음이 닫혀있던 사람에겐 마지막 확인 같은 것이 필요하다. 조금은 의식하며 서로의 웃음 속에 의미를 새겨둔다.

화장실은 원래 레스트 룸 (rest room)이라고도 많이 표기된다. 특히 식당의 공중화장실들은 화장실 표지판만은 같은 인테리어 업체에게 맡기기 위해 한바탕 경쟁을 벌인 것처럼 모두 똑같은 모양으로 ‘rest room’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처음엔 그 표시를 보고 휴식을 위한 휴게실인 줄 알고 기대에 차서 종업원에게 저기는 어떤 장소냐고 물었던 것 같다. 종업원은 너무도 간단하게, 그리고 간략하게 화장실이라고 답했다. ‘설마 화장실이 저렇게 고급스럽겠어’하고 들어가 본 화장실은 정말 좁고 난잡하기까지 했다. 그 후 학교에선 단어에 못을 박은 표시가 있는 단어장으로 화장실은 ‘bath room’이라고 배웠는데 나는 의미에 못을 박기 전부터 화장실은 ‘rest room’보다는 ‘bath room’에 가까운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쉼은 누가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가치를 얻게 된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다시금 치열해보려 시작된 쉼이든 걱정이 많아져서 시작한 쉼이든 결국엔 자신에게 쉼이 많이 필요했었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시간을 아껴보고 난 후에는 내가 따라가고 싶은 속도를 내 몸과 마음은 따라주지 않아 시간을 아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들게 된다. 행동과 깨달음이 같은 것은 쉼이 유일하고 오히려 더 깊은 깨달음을 담고 있다. 마음을 닫는 것은 화장실에서 휴게하는 것과 같아서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단순하게라도 생각해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굳게 닫혀있는 화장실에 단 한 명이라도 자주 드나든다면 민원이 쌓여가는 일터처럼 쉼을 되찾게 된다. 그러나 여러 아픔을 부풀려서 터뜨려도 그 중에선 나아지지 않는 아픔이 있고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한 아픔이 주변에 숨 죽여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책이 가장 필요한 장소는 유식한 머리가 아니라 화장실이다. 화장실처럼 환기가 잘되지 않고 차마 들여다보기도 민망한 장소에 누군가 편견 없이 숨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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