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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샤 Sep 12. 2022

약사, 오토바이 마니아

#3

약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여자가 우리나라에 몇 명이나 존재하는지 내가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굉장히 소수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여자 친구와 내가 언급하는 그녀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 또한 극히 낮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녀는 오토바이를 좋아했다. 직업이 주는 이미지와 다르게 다소 거칠고 당찼으며 털털하고 수수한 아름다움까지 갖춘 그녀가 오토바이를 타고 약국으로 출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질적인 것에 마음이 동하는 나로선 설레지 않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우리는 매우 평범한 연애를 했다. 그때는 아직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문자 값이 엄청나게 나가곤 했었는데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그동안 내가 여자들에게 들인 통신비, 데이트 비용, 숙박비 등을 모았다면 2022년 기준으로 수도권에 집 한 채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그녀는 꽤나 매력적인 외모에 안정적이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자 보는 눈이 낮았다. 가진 것이라곤 패기밖에 없는 나 같은 남자를 만났으니 말이다. 


나는 그녀와 함께 하는 사소한 일상들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했다. 지난 사랑에 의한 상처로 꼴사납게 마음이 뒤틀려있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밝고 당찬 그녀로 인해 빠른 속도로 마음속에 응어리를 제거하고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아직까지 가장 미스터리한 여자로 남아있다. 평소 우리는 남들과 다를 거 없이 평범하게 영화관에 가고 함께 맛집을 찾아다니며 간혹 노래방에 노래를 부르러 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평소 밝았던 성격과 다르게 싸우거나 특별한 일이 있지도 않은 어느 순간, 굉장히 잦은 주기로 기분이 급격하게 주저앉으며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장점이 무수히 많았기에 그저 단순히 예민한 것이라고 여겼지만 만남이 지속될수록 그 부분이 나에게 무겁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정사가 평탄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드세게 자라야 한다고 강요받았고 나를 제외한 남자들에게 불필요할 정도로 적의를 내비치곤 했다.


나는 평범하고 적당히 사이좋은 부모님 밑에서 외아들로 자라나 과분할 만큼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관대할 수 있었고 내가 무언가 바라지 않고 사랑을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도록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 그녀와 내가 운명이기 때문이라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타이밍에 극심한 감정 기복으로 예민하게 굴며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해서 나를 몰아세웠다가 뒤돌아서면 또 바로 사과하는 등 황당한 행동을 반복하곤 했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항상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대중교통을 두 번씩 갈아타며 이동하곤 했다. 거진 1년 가까이를 만나면서 그녀를 이동하게 아예 없었기 때문에 내가 매번 이동을 했었지만 나는 매번 그녀에게 가는 길이 설레고 행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이동하게 만드는 것이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싫었고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실 나의 무능력함을 그런 열정으로 포장하려고 한 영악한 생각에서 발현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습관이 참 무서운 것인지 그 부분은 심지어 지금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도 그런 부분에 대해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물론 내가 정말 대가를 바라고 하지 않은 행동이었기에 더욱 그녀의 마음을 그리 동하게 만들었으리라.


그런데 결국 평범한 일상, 연애 속에서 가끔씩 찾아오는 그녀의 극심한 감정 기복이 우리의 이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어느 날 나에게 감정이 고조되어 씩씩 거리며 말했다.


'너는 버스 타고 오는 길에 꽃집이 그렇게 많은데 왜 나한테 꽃 한 번을 선물하지 않아?'


나는 꽤나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말을 할 상황이 절대 아닌데 이런 말을 하는 그녀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생각이 짧아서 미안하다며 언제 한 번 멋진 꽃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녀는 나와의 만남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며 일주일 동안 나에게 연락을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너무 황당한 요구였지만 내가 모르는 나의 문제점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니 숙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나에게 우리 관계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봐야겠다며 홀로 여행을 떠나겠다는 문자 한 통을 남겼다. 나는 여자 혼자서 여행을 가는 것이 무척이나 걱정이 되었지만 약속한 것이 있기 때문에 초조하고 너무나도 길었던 일주일을 잘 참아내며 그녀의 연락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핸드폰을 들여다봤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결국 나는 마지막 7일째 00시가 지나자 즉시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다. 답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빨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내일 아침에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역시 너는 안 되겠다며 불같이 화를 내고는 나와 헤어지겠다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했다.


정말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조금 더 내가 납득이 갈만한 이유를 요구했고 그녀는 이야기의 맥락과 논리는 어디로 내버렸는지 횡설수설하며 화만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데없이 자신이 나에게 말을 하지 않고 중절 수술까지 한 적이 있는데 내가 본인에게 관심도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앞뒤도 맞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마음이 정말 혼란스럽고 심란해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이성적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지만 연거푸 사과만 반복했다.


하지만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만 하면 끝이냐며 자기가 병원에서 수술한 영수증이라도 보여줘야 믿겠냐고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계속 그렇게 내가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 같고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다며 불같이 화를 내다가 그렇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는 전화를 끊고 느꼈던 그때의 그 감정과 기분이 잘 잊히지 않는다. 그냥 내가 왠지 불쌍해진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왜 이상한 여자들만 사랑하게 될까?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병원에서 중절 수술한 영수증을 보여달라는 말 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절대 그 말을 믿을 수도 없었다. 언젠가 연애하면서 그녀는 나에게 나와 만나기 전에 자신이 루프를 착용을 했다며 피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었다.


당시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고 인터넷에 그 부분에 대한 검색을 해볼 생각도 못했으며 나는 그녀의 말을 단순하게 관계 시 안전하니까 편하게 생각하라는 과분할 만큼의 긍정적인 배려라고만 인식했다.


중절 수술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서 그제야 인터넷 검색 후 알게 된 내용이지만 처녀일 경우 루프 피임 방식은 보통 낙태 수술을 한 여성에게만 권하는 피임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는 더욱 알쏭달쏭한 상황에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그녀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고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흔한 꽃도 한 번 선물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그녀의 집 앞으로 찾아가서 적당한 크기의 꽃 바구니와 그 안에 사과의 편지를 한 통을 써서 넣고 대문 바깥쪽에 살며시 내려두며 집을 향해 돌아섰다.


그렇게 바구니를 놓고 문자나 전화 한 통도 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그대로 집으로 가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그녀가 새로 구입한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또 마음이 씁쓸해졌지만 역시 연락을 하는 것은 참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그 차 앞을 터벅터벅 걸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 차를 지나치며 유리창 앞에 폴라로이드 사진이 한 장 끼워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진 속에는 내가 예전에 만났던 여자와 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이것이 무슨 상황인가, 그녀가 지켜보고 있지 않은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심장이 빨리 뛰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그 폴라로이드 사진 속 내 옆에 있던 여자는 내가 세컨드 생활을 자처했던 여자였다. 이 사진은 내가 수개월 전에 버스 안에서 지갑 정리를 하다가 지갑 안쪽에 숨겨져 있던 것을 발견하곤 아무 생각 없이 버스 창밖으로 날려버렸던 사진이었다.


당시 나는 지금 이 약사인 그녀와 연애를 하던 중이었고 그것은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었던 것이기에 아무런 생각과 미련도 없이 창밖에 우거진 나무 숲을 바라보면서 날려버렸던 거라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왜 이것이 여기 있을까? 이곳에서 그 사진을 날려버렸던 지역은 1시간이 넘는 거리다. 심지어 내가 사는 동네와 지금 이곳을 오고 가는 동선도 아니었으며 이 사진은 폴라로이드 사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단 1장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이것이 내 눈앞에, 그것도 그녀의 차 유리창 앞에 버젓이 꼽혀있었다. 나는 너무 무서웠다. 이게 무슨 일인지,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저 무섭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받지 않았고 나는 계속해서 미친 사람처럼 전화를 걸어댔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그녀는 받질 않았다.


그녀의 차 앞에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나는 생각했다. 도대체 이 사진을 어떻게 입수했으며 어떻게 내가 다시 찾아올 거라고 예상을 했는지 또 굳이 왜 자기 차 유리에 이것을 꼽아놨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몇 번의 전화 통화를 더 시도했지만 그녀는 끝내 받지 않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할 수 없었으며 우리 동네에 도착하고 나서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녀의 가족에게 문자 한 통이 왔다. 그녀가 나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고 있으니 꽃 같은 것을 다시 가져오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답장했다.


헤어지고 줄곧 그녀에게 다시 연락해서 그 미스터리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가족에게 그런 연락을 받고도 다시 연락을 할 만큼 용감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찝찝함을 한가득 품은 채 이별해야 했고 천하의 바람둥이는 이별은 이별이고 의문은 의문인 채로 또 다른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새로운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헤어진 지 몇 달조차 되지 않은 미스터리한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 지내?'


나는 정말 진지하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왜 그랬어?'라고 답장을 했다. 하지만 내가 지하철에서 내릴 때까지 그녀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지하철에서 내린 후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돼..'




정말 나는 그렇게 수없이 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지나간 인연에 대해 궁금한 마음은 1도 없다. 하지만 그녀만큼은 지금도 가끔씩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사진은 버릴 때 꼭 찢어서 버려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후로 인화된 사진을 찍을 일이 지금까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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