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자와 무너뜨리는 자
#. 치열한 수싸움의 시작
바둑 격언에 '내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상대를 약하게 만든다', '공격을 하려면 상대방의 눈을 뺏어라'라는 전술적인 말들이 있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은 수싸움이 벌어지는 바둑판이었고 피의자신문조서 첫 번째 장에 쓰이는 인정신문을 넘어 사실관계를 물어가는 두 번째 장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 공격을 훌륭하게 막아낸 그는 연민이 쌓인 마음까지 슬며시 드러내며 감정적인 우위까지 선점했다고 판단했는지 서서히 역공을 준비한다. 생각보다 치밀했고 강했다. 그간 사업체를 운영하며 치열한 현장에서 상황별 대처능력을 배웠을 것이고, 부도로 인해 생길 법률적인 책임의 한계까지 검토가 끝난 듯 수사관을 대하는 자세와 의식의 흐름이 남다르게 기민했다.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던 그가 날카로운 질문을 해 온다. "수사관님 제가 고소인과 합의를 보면 오늘 안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데, 수사관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럼요, 합의가 되거나 변제를 하면 구속까지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기도 했다는 듯 바로 받아친다. "제가 연쇄부도를 맞고 급하게 사업체를 정리하다 보니 회수하지 못한 돈이 좀 있습니다. 저도 그걸 받아야 하니 고소라도 미리 해 두려고요. 허허허"
그는 돈을 갚으려고 했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에 더하여 연쇄부도를 맞아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고 뜻하지 않게 고소인 돈을 갚지 못했다는 변명을 교묘하게 깔아 사기에 대한 고의를 희석시키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여 수사관의 시선과 예단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고단수를 놓고 있는 것이다.
운전대를 잡고 도로를 응시하던 수사관은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미 수배자는 향후 조사과정에 할 변명의 형태와 초안을 다 드러냈고,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는 도 넘은 의도까지 봤으니 좀 더 밀도 있고 전문적으로 접근해야 할 상대임을 직감한다. 그가 말속에 숨긴 '사기 고의 없음'이라는 안전장치를 정교하게 해체하지 않으면 사건의 맥을 잡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니 느슨했던 전투의지가 슬슬 강화되면서 조금 더 정제되고 힘 있게 묻기 시작한다.
'선생님 근데 그 돈은 어디에 썼어요?' 반격의 서막이다. 그가 빌린 돈을 어디에 사용했는지부터 시작해서 갚은 능력이 없었다는 최종 단수까지 염두에 둔 질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그는 수사관의 근성과 기질을 발동시키고야 마는 천박한 악수를 냈다. 그의 변명은 실로 기발했다.
오히려 역질문으로 응대하며 '수사관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제가 그 돈을 어디에 썼어야 될까요? 수사관님 일하기 편하게 당장 고소인 돈도 갚고 합의를 하겠습니다 허허...' 대게 그런 류의 역질문은 수사기관의 생리를 잘 아는 일종의 브로커들이 수사관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비열하게 접근하는 최고의 악수 중에 베스트인 것이다.
수사관은 다시 냉정을 찾고선 "글쎄요 혹시 선생님이 이건 1,500만 원을 아까 그 여자분을 드렸나요?" 꼼수를 꼼수로 받아 그를 안심시켜야 했다. 뭔가 허술한 모습이 그를 안심시킬 수 있다는 얕은 생각이다. "아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회사 운영자금이었습니다." 그 돈의 사용처가 돈을 빌릴 당시의 상황을 규정하는 단서가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 대답쯤으로 일단은 넘어간다.
그는 부연설명을 늘어놓았다. 서울 유명대학을 나와 외국계 회사 부장으로 중동과 동남아를 거쳐 중국 전역에서 활약했던 무공담까지 거침이 없었다.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라 그런지 약간의 흥분감조차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소개를 마치고 배가 고팠는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산 호두과자를 쉬지도 않고 먹어 치웠다.
달리는 차 안에서 그가 드러낸 마음을 모두 간파한 수사관은 서서히 말을 줄이고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의지를 강화시킨다. 그는 앞으로 있을 조사에서 수사관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여념이 없을 것이고, 유리한 최상의 변명을 찾아 일관되게 진술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궁지에 몰리면 상황을 모면할 온갖 거짓말을 했던 다른 사례들처럼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무너 지는 자, 무너뜨리는 자
서있는 장소에 따라 모든 가치와 상황이 다르듯이 수사관의 책상은 위치에 따라 온도차가 심하다. 수사관이 앉아있는 자리보다 건너편 조사를 받아야 하는 자리는 사뭇 싸늘하기까지 하다. 수배자는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가 사람을 얼마나 처량하고 작아지게 만드는 곳인지 느꼈을 것이고, 고소인에게 줘야 할 1,500만 원도 해결할 능력이 되지 못하니 어떻게든 거짓말이라도 해서 초라해진 지금의 수갑 찬 모습을 모면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조사가 시작된다. 그를 한참 동안 살피다 결심을 한 듯 수갑을 풀어주고 의사를 억압하지 않은 채 편안한 상황을 만들어 변명의 기회가 있음을 직관적으로 고지하자 그도 빠르게 반응을 한다.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해 댄다. "변명을 할 수 있다는 게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건가요?" 참으로 어이가 없다. 그러한 행위를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서 불리한 처벌을 받지 않을 기회가 주어졌다는 말을 마치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아갈 길을 보여 달라는 것인지 듣기 거북하고 동조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자꾸 해 댄다.
뭔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수사관은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지금 농담하신 겁니까. 아니, 선생님한테 피해를 당한 사람은 바보같이 사기를 당했다며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그 돈이 선생님에겐 정당하다는 건가요?" 라며 더 이상 가벼운 입놀림을 참지 않겠다는 경고를 한다.
이후 살기등등한 질문과 질문 속으로 들어간다. 그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이유를 낱낱이 파헤쳐 시간과 상황별로 사실관계를 배치하고 그 사연들 속에 녹아있는 그의 생각을 읽어내 숨어있는 사기의 의도가 있었는지를 알아내야 하는 정교한 작업의 시작이다.
만약 이 과정에서 그의 의도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이번 사건은 실패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조사가 그의 사기죄를 규정하고 더 나아가 구속여부까지 결정하게 된다는 걸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변명은 이랬다. 꽤나 화려하고 자랑스럽던 대기업 직장생활을 접고 큰 퇴직금을 받아 그간에 쌓아온 사업상 신뢰와 인맥을 이용하여 건설현장 중장비 사업을 시작하였고 그 케리어는 역시나 상당한 돈으로 보상이 되어 돈이 없어 겪었던 그간의 조그마한 시련들을 한 번에 씻어주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쌓인 돈은 사업 규모와 가족들 씀씀이 단위까지 여지없이 확장시켰고 그렇게 생긴 확장력을 힘이 세서 남자로서 사는 맛이 나는 자랑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런 자랑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오로지 인간 됨됨이와 가벼운 소주잔 만으로도 생겼던 사업하기 전의 의리는 조금씩 퇴색되어 갔고 오로지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기계적인 관계만 형성되었다.
소주는 양주로 바뀌었고 인간미는 돈으로 대체되어 이젠 더 이상 순수한 믿음이나 가슴 따뜻한 신뢰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사업을 유지하기 위한 관리비와 가족들의 소비는 계속 늘어만가 들쭉날쭉한 수입에서 생기는 경제적인 간극을 온갖 편법을 동원해 메꿔갔다고 한다.
그렇게 10여 년을 버티다 보니 사업이 주는 약간의 리스크 정도는 크게 힘을 쓰지 않아도 해결책이 보였고 사업의 계속성을 위해 구축한 정교한 시스템은 웬만한 외부충격 정도는 가볍게 막아주는 훌륭한 방어벽이자 동력이 되다 보니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더 이상 혁신이 멈춘 회사는 자연스럽게 리스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거품이 쌓인 줄도 모른 체 회사는 비대해졌고 더 이상 외부 충격을 다스리는 민첩성이 사라지자 조그마한 손실에도 재정에 충격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진 재정위기는 인건비를 줄이게 되었고 종국엔 회사 건물을 매각해야 할 시점에 이르자, 그렇게도 견고한 줄 알았던 직원들 마저 순식간에 등을 돌려 혼자 남아보니 회사를 만들었던 초기의 독기가 서서히 치밀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죽어가는 회사 영업에 잠시나마 활력이 생겼지만 무너진 시스템으론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주저앉기를 수차례 반복하였고, 그 과정에서 빌렸던 고소인 돈 1,500만 원도 회사 운영비로 흔적도 없이 녹았고 그간 부도낸 어음에 비하면 너무도 소액이었기에 고소인에게 갖게 되는 죄책감도 딱 그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그렇게 거만한 마음이 되자 제일 먼저 망가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받을 줄 아는 관계의 진정성이 없어졌고, 마음에 낀 기름끼는 온몸의 감각을 둔하고 탁하게 만들어 다가오는 위험에 둔감했고, 무뎌진 감각은 사업상 만나던 사람들과의 신뢰가 무너져 가는 걸 감지하지 못하자 더 이상 수익을 내는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아 망했다고 한다.
그의 말은, 교만해진 마음이 사업을 망가뜨렸고 그 과정에 회사 운영비가 부족하여 고소인으로부터 돈을 빌렸지만 생각만큼 자금사정이 좋아지지 않아 뜻하지 않게 갚지 못했다는 변명을 이런저런 감정과 사정을 더해 충분히 설명했다.
수사관은 매우 신중하게 경청했지만,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가졌다. 고소인에게 빌린 돈이 실제 회사 운영자금으로 사용되었는지, 그 돈을 빌릴 시점에 회사가 자금난에 허덕였다는데 회생가능성이 있다고 믿을만한 사정이 존재했는지, 변제를 약정한 일자에 약속을 지킬 구체적인 계획은 있었는지와 이후 변제 노력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강한 의구심이 들었고, 그가 가족에게 가져오도록 하여 제출한 각종 증빙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회사 회계장부를 아무리 뒤져봐도 1,500만 원의 대한 회사유입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고소인으로부터 돈을 빌린 시점에 회사는 이미 과다한 비용지출로 전년도부터 영업이익이 마이너스(-)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야 어떻든 다른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리더라도 정상 변제는 사실상 불가능 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 파악에 이르자 수사관은 마음 정리를 한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고소인에게 돈을 빌릴 당시 그가 말한 대로 회사 운영자금으로 쓰고 3개월 이내로 갚겠다는 말에 진정성이 있긴 했을까? 아무래도 거짓말인 듯하다.
이제부터는 수사관의 시간이다. 이미 도주를 했던 사람이니 구속 수사도 염두에 둔다. 그가 만든 가공의 거짓을 하나씩 하나씩 무너뜨리고 항복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시작된 본격적인 피의자 조사에서 그는 무참히 무너지지 시작하였다.
변명을 보강하겠다고 제출한 각종 재무, 회계자료는 그가 얼마나 방만하고 주먹구구식으로 회사를 운영했는지와 고소인으로부터 돈을 빌리기 전부터 이미 회생 불능 할 정도로 자금 사정이 악화되어 고리의 사채를 빌리지 않으면 운영자금을 충당하기 불가했음을 여실히 드러났고, 고소인에게 빌린 1,500만 원의 사용처도 회사가 아니라는 것도 들통이 나자 그때부터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무너져 가면서도 돈의 행방만은 입을 열지 않았고 급기야는 증거 있으면 처벌해 보라는 식으로 또 다른 비열함도 드러냈다. 검거되고 나서 시종일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자금의 사용처였던 것이다. 과연 그 1,500만 원 사용처에 무슨 비밀과 사연이 숨어있는 것일까?
(다음화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