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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T CONNECTOR Feb 02. 2021

칸 영화제와 삑사리: 드레스 입고 구걸하기

Connecting the dots #3 Cannes, France

칸 영화제. 막연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준비도 없이 가게 될 줄이야.

우주 먼지처럼 하찮은 내가, 이런 굉장한 곳을 갈 줄은 나도, 우리 엄마 아빠도, 우리 며느리(없음)도 몰랐다.


Connecting the Dots #2
Cannes, France ( City ) - Piksari ( Word )

한 점은 언제라도 다시 돌아가면 기꺼이 가고 싶은 달콤한 악몽, 칸.

두 번째 점은 엉망인 내 삶도 제법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단어, 삑사리.


운 좋게도 2020년 칸 영화제는 개최되지 않아서, 무려 1년 반이 지났음에도 애매하지만 아직까지는 나름대로 칸 영화제 '최신 리뷰'가 될 수 있어 영광이다. ( 자기 맘대로 생각하는 편 ) 기생충을 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떠난 칸 영화제 여행은... 우당탕... 그 자체... 잘 풀리지 않은 삑사리 여행이었다. 삑사리가 넘쳐나는 허술한 여행이었지만, 그럼에도 내 인생 최고의 여행 중 하나였다. 그 이유는.. 아래의 글을 읽으며 함께 느껴보시기 바란다.


©Dahyun Kim


무책임하고 무모한 부푼 마음으로

H&M에서 산 싸구려 구두와 드레스 한 벌을 챙겨, 난 칸으로 떠났다.




L’art du piksari: 삑사리의 미학



 나를 칸으로 이끈 결정적 계기라고 해도 무방한 봉준호 감독! 봉준호의 영화를 평론하며,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잡지 까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바로 삑사리의 미학, L'art du piksari다. 봉준호의 영화는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타고난 유머와 센스를 가지고 있다. 결정적인 순간 주인공이 갑자기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고, 어이없는 '삑사리'에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한다. 내가 봉준호 영화를 좋아하는 데에는 정말 많은 이유가 있지만, 영화를 가장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를 꼽자면 바로 삑사리다. 봉준호 영화의 플롯만 놓고 보자면, '완벽함'이란 없다. 친숙한 얼굴을 한 배우 송강호가 얼탱이 없는 상황을 만들거나 마주하는 그의 영화는 어찌 보면 인생과도 꽤나 닮아있다. 삑사리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아니, 어디엔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것은 삑사리로 가득하다.


©Dahyun Kim


화려함과 황홀함만을 기대했던 칸 영화제로의 여행 또한 허술하고, 삑사리가 가득했다. 멍하니 앉아 멍청한 실수를 자책을 하기도 했고, 내 손을 벗어난 불공평한 상황에 '왜 난 셀럽이 아닌가!!' 하며 철없이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점 투성이인 이 여행이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고, 아마 이 여운은 또 다른 칸 영화제로 씻어내기 전까지는 오래오래 간직하게 될 것 같다.


나의 여행은 생각보다 알차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2019년 칸 영화제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들이 많이 상영됐다. 켄 로치 감독의 <미안해요 리키>(2019), 다르덴 형제의 <소년 아메드>(2019),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2019),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칸테미르 발라고프의 <빈폴>(2019)까지. 다 정말 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하는 영화들이다. 물론 전부 집으로 돌아와 극장에 가거나 방구석에 앉아 티비로 보게 됐지만.. 말이다. 나는 꼴랑 2편의 영화를 보고 왔고, 결론적으로 길어진 일정 때문에 기말고사를 포기해서 가장 좋아하는 수업에서 F학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행은 나의 손을 벗어나, 어떻게 해도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의 무시무시함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자의던 타의던 내 인생에 침투하는 삑사리 하나하나에 분노하기보단, 그러려니 하며 삑사리가 날 이끄는 곳으로 흘러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든 여행이었다.




내가 칸으로 떠난 이유,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의 구구절절 변명



나는 영화를 안 좋아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 인성 패스 ) 오만방자한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에이. 어떻게 이걸 안 좋아할 수가 있어! 어떤 사람들은 영화가 너무 길어서, 제대로 쉬는 느낌이 나지 않아서, 활자를 읽는 것이 더 좋아서 '영화를 별로 안 좋아한다'라고 말을 한다. 입으로는 '그렇구나' 하면서도 이윽고 '아직 마음에 쏙 드는 영화를 못 만나봐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해버린다. 러닝타임이 15분인 단편영화들도 있고, 눈으로 줄거리를 읽으며 보는 무성영화도 있으니까! 영화를 향한 사랑은 나를 오만한 사람으로까지 만든다.


대단한 영화 전문가는 아니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영화를 아끼고, 즐기고 배우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는 영화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나를 바꾸고, 사람들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영화는 내게 꿈같은 존재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 | <Lazzaro Felice>(2018) Dir.


칸으로 떠나게 된 계기는 정말 간단하다. 밀라노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시절 교수님께서 던져주신 '여러분 같은 학생들도 가서 즐길 수 있으니, 주말에 시간을 내서 방문해보세요.'라는 한 마디 덕분이었다. (심지어 칸은 밀라노에서 자동차로 3-4시간이면 도착하는 곳이었다.) (근데 나 말고 아무도 안 간 것 같더라) 교수님과의 짧은 대화를 나누고 나니, 내가 안 가면 봉준호 감독도 서운하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개막식을 앞두고 한 2주간 계속해서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5월의 유럽을 몇 번이나 겪어볼까, 싶어 결국 시험과 시험 사이 아슬아슬한 1박 2일 칸 영화제 탐험을 계획했다. 코 앞의 칸 영화제를 놓친다면 아쉬움에 단 하루도 발을 뻗고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 물론 1박 2일이 2박 3일, 3박 4일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삑사리 투성이인 그런 여행이었다. 결국은 시험도 건너뛰고, 칸의 거리를 둥둥 떠다니다가 왔다. 그렇지만 그나마 다행히도 시험을 빠져 받은 F학점이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멋진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도 나는 몇 번이고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나에게 돈이 있는가? NO
나에게 연줄이 있는가? NO
나에게 똥배짱이 있는가?.... YES!





이탈리아에서 백발 할아버지를 만나 카풀로 프랑스에 도착한 뒤, 기차를 두 번 갈아타자 칸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칸이 가까워짐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모두 다 왠지 멋있어 보이기까지 하는 영화제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썰렁한 목 주변에 괜히 초라해진 나는 분위기를 살피며 조금씩 설레고 있었다.


창 밖의 풍경. 끝도 없는 바다.


칸의 최고 성수기인 5월, 빈 객실은 많지 않고 그마저도 비쌌다. 눈물을 머금고 딱! 1박만 하고 가기로 했다. 그 정도는 여태껏 쉬지도 않고 계속 돈을 벌었던 나에게 해줘도 될 것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짐이라기에도 민망한 캔버스 백 하나) 짐을 풀고 미리 준비해뒀던 드레스를 입었다.


얼굴 모자이크하고 싶지만 귀찮고 어차피 몇 분 안 읽으시니 그냥 두겠다.



드레스로 말하자면, 밀라노의 Porta Ticinese라는 동네를 오백 번 정도 돌아다니며 아이쇼핑을 할 때마다 유심히 보던 드레스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밀라노 출신의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작은 브랜드인 듯싶었다. 저런 화려한 옷은 입을 일도 없고, 살 돈도 없다고 생각하며 남 일처럼 구경만 하다 영화제를 계기로 대뜸 사버렸다. 심지어 마음먹고 가게를 찾아간 날 뜬금없이 가게가 도시의 완전 다른 부근으로 이사를 가버려서, 어렵게 찾아가서 구매한 드레스다. 가격은 대충 20만 원대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 200유로대라고 해야 하나.. (눈물) 아쉽게도 칸 영화제 이후로는 입어본 적이 없다. 유흥이라고는 성인병 돼지 파티 밖에 모르는 나에게 이런 옷은.. 그저 기념품일 뿐이다. 하지만 칸에서 3일간 알차게 입었으니 후회는 없다.



티켓 없이 칸 영화제에서 영화 보는 방법

단, 당신에게 체력과 배짱, 얼굴에 깔 철판이 있다면.



칸 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세계적인 축제라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칸 영화제는 철저한 계급(?) 중심으로 운영되는 영화제라는 사실. 원래는 일반인은 거의 참여가 불가능한 행사였다. 하물며 영화제에 초청받은 감독, 배우, 기자 등 관계자들에게도 중요도에 따라 두 가지 색깔의 다른 뱃지가 주어진다. (그리고 티켓도 레벨이 두 가지 있어서, 뱃지가 없으면 사용 불가능한 티켓도 있다) 그렇지만 최근 18-28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청서와 에세이를 제출하면 심사 후 칸 영화제의 뱃지를 부여하는 3일 패스 (3 DAYS IN CANNES) 제도를 만들어 젊은 영화학도들에게도 진입 문턱이 낮아진 추세다. 칸 영화제를 경험하고 싶다면 사전에 신청해보도록 하자. 아... 물론, 2-3주 전에 방문을 결심한 나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


(참고로 현장에서 신청해 발급받을 수도 있었지만, 100유로 정도의 비용이 들었기에 나는 가볍게 패스했다.)



비법은 바로 구걸!


©Dahyun Kim | 보타이까지 맨 청년이 타란티노 영화 표를 구걸한다.


그렇다. 내가 택한 방법은 바로 구걸이었다. 이렇게 말로만 들으면 정말 우스운 얘기지만, 실제로 칸에는 구걸 문화가 잘 자리 잡았다. 네이버 등 한국 웹에는 정보가 비교적 적어, 구글을 뒤져서 얻게 된 정보였다. ( 하긴 한국에서 5월 프랑스까지 영화제 보러 가는 사람 치고 이렇게 준비성 없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 칸에서는 정장과 드레스를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극장 앞, 길거리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티켓을 구걸한다.


©Dahyun Kim


사진 속 턱시도 입은 청년들처럼, 이인조로 길 한복판에서 구걸을 하기도 한다. 통행에 다소 방해가 되지만 눈에 띈다면 뭔들 못하랴. 뱃지를 가진 사람들은 주어진 티켓을 소진하지 않을 경우 페널티가 적용한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영화를 못 볼 상황이라면 구걸하는 사람에게 티켓을 넘겨줘 페널티를 피하는 것이다. 뭐 어찌 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싶은 칸 영화제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티켓과 뱃지가 없는 상황이라면, 구걸의 승산을 높이기 위한 전략을 짜야한다. 자기 PR! 명심하자. 비단 칸 영화제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참 중요한 요소이다. 약간 관종(?) 같이 느껴지더라도, 무조건 튀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봉준호 영화는 꼭 보고 가야겠다는 마음을 듬뿍 담아, 내가 '한국인'이라는 포인트를 어필하려 했다. 그래서 호텔 방에 앉아, 집에서 챙겨 온 형형색색 펜으로 자기 PR 구걸 포스터(?)를 만들어봤다.


©Dahyun Kim


구걸의 필수는 바로 공손하게 싹싹 비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유교던 가톨릭이던, 문화권을 불문하고 공통적인 편. 불어로 '부디' '부탁합니다'라는 의미를 가진 표현인 's'il vous plait'(S.V.P.)라는 표현을 사용해주면 된다. 보통은 1 ticket for XX, S.V.P! 이런 식으로 적는 듯하다. 나의 경우 one ticket please, 이런 문구와 함께, 'Came all the way from Korea. (Don't worry it's South)' '이거 보러 한국에서까지 왔어 (남쪽이니까 걱정 마)라고 적은 덕분에 꽤나 관심을 받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보며 웃기도 하고, 뉴스로 추정되는 카메라에도 담겼으며, 사진과 영상도 잔뜩 찍혔다. (그러나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 드레스와 구걸 포스터 준비를 마친 후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내가 도착한 날은 마침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기생충을 최초로 공개하는 날이었다.



여행의 첫 번째 삑사리



첫 번째 삑사리는 다소 어이가 없다. 에어팟을 잃어버린 일이다. 나에게 여행을 하며 가장 긴장되는 일 중 하나는 바로 현지의 버스를 타는 일이다. 일단 말이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해당 국가의 인사말을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면서, 돈은 얼마를 내야 하는지, 혹시 티켓을 미리 구매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느라 참 긴장된다.


호텔을 나설 때 괜히 소심해진 나는 기운을 내기 위해 당찬 노래를 들으며 걷고 있었다. 버스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 급하게 버스를 타고, 요금을 내고, 자리에 앉았다. 마시려던 탄산수가 좀처럼 잘 따지지 않아서 고생하다가 문득 노래가 안 들린다는 걸 깨달았다. ( 그제야 )..... 귀가 휑하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나는 멘붕에 빠져 에어팟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탈 때 실수로 귀에서 빼서 버스 밖으로 던졌나..? 혹시 요금 낼 때 앞에다 두고 그냥 왔나..? 오만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국 에어팟은 찾을 수 없었다. 아직도 어떻게 잃어버린 건지 그 경위를 모르겠어서 그저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을 뿐이다.


............ 두 세 정거장 먼저 버스에서 내린 나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길바닥에 철퍼덕 앉아 가방을 와르르 엎어 소지품을 확인했다. 역시나 가방 안에도 콩나물 두 쪽은 없었고, 나는 텅 빈 에어팟 케이스를 든 채로 행사장 쪽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시작부터 자기혐오와 알 수 없는 패배감이 가득한 여행이었다..


R.I.P 루트비히 22세... 이 글을 쓰면서, 이제서야 널 내 노트북과 핸드폰에서 지웠어.....


칸 영화제의 현장

티켓 구걸과 레드카펫



태어나서 길을 걸으며 이토록 떨어본 적이 있던가. 칸이라는 공간은 너무나도 대단한 사람들이 많아, 나 같은 건 우주먼지 쪼가리도 안 되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게 만든다. 그래서였을까, '그래.. 침착하고. 자신감이 중요해. 나도 어디서 꿇리지 않아.. 아직 쓸만한 건 죽ㅈ..' 이렇게 자기세뇌를 하며 영화제의 메인 구역으로 진출했다.


©Dahyun Kim


10분 정도 어슬렁 거리며 구걸의 트렌드를 파악했다. 다들 어떻게 하나, 관찰하고 따라 하는 자세가 아주 중요하다. 한참을 관찰한 후, 나는 대극장으로 향하는 길 옆에 서서 구걸을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스팽글 드레스가 눈에 띄는 것 같아서, 부끄럽지만 자켓도 벗고 드레스 차림으로 열심히 구걸을 했다. 티켓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과 눈을 열심히 마주치며 필사적으로 웃었다. 처음 10분은 굉장히 민망했지만, 하다 보니 점점 재밌더라. 역시 내 안에 관종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Dahyun Kim | 느껴지시나요 저에게 쏠리는 뜨거운.. 시선..?


기생충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덕분일까, 나 또한 구걸 현장에서 꽤나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은 봉의 나라에서 온 불쌍한 여자아이가 웃겼는지, 아니면 한국사람끼리는 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기생충이 꼭 이겼으면 좋겠고, 네가 꼭 티켓을 얻었으면 좋겠어!'라며 많이들 말을 걸어주었다. 영어를 배워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던 날이었다. 옆에서 구걸하는 사람들과 서로의 손에 든 종이를 보며 '너 뭐 구걸해?' '우리 힘내자!' 이런 대화도 나누고, 즐거웠다. 하지만 티켓 구걸이 마냥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초청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한 팀이, 방송 중인지.. 영상을 찍는 중인지.. 셀카봉을 들고 걷다가 한국인인 나를 발견하고 몇 마디를 나눈 뒤 '이래서 티켓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스러운 말을 하며 재수 없게 지나갔다... 본인은 별 뜻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굉장히 기분이 상해서 때려치우고 갈까, 하던 게 기억이 난다. 이때 존버 하길 정말 잘한 일이었다.



여행의 두 번째 삑사리


아마 5시에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의 레드카펫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레드카펫 시작 전 퀘벡에서 온 한 영화기자가 나에게 혹시 내일 아침 티켓도 괜찮다면 기생충 티켓을 주겠다고 하셨다. 구걸이 처음이라(?) 맨 처음엔 나에게 집적대는 아저씨인가.. 싶은 의심이 가득했지만, 돌이켜보면 그저 천사였을 뿐이었다. 일단 지금은 자기가 타란티노 영화를 보러 들어가야 하니, 여기서 기다리면 있다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티켓을 주겠다고 했다. 캐나다 사람들은 천사라는 말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너무 좋다고 기다리겠다고 하자, 옷을 갈아입고 그가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바보였고, 이 여행은 삑사리 여행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앞서 말했듯 티켓에는 아무나 티켓만 있으면 되는 티켓, 그리고 뱃지가 있는 사람과 동반해야만 볼 수 있는 티켓,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 나는 뱃지도 티켓도 없다. 그런데 나에게 티켓을 주시려는 이 친절한 분이 가진 티켓은 뱃지가 있어야 하는 티켓이었고, 나는 혹시라도 민폐가 될까 아쉽지만 뱃지가 있는 분에게 드리라고.. 말하며 티켓을 포기했다.. 아저씨가 혹시 모르니 전화번호라도 달라고 했는데, 어릴 적 가정교육을 너무 잘 받아버린 나는 무서워서 그냥 공손히 거절하고 감사하다고 오백 번 전하고 그를.... 대극장으로 보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가 아닐까 싶다. 왜냐면 결론적으로 나는 칸에서 기생충을 못 봤고, 한국으로 돌아와 8월 코엑스에서 봤기 때문이다....  (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뱃지가 없어도 입장 전 줄 정리하며 직원들이 알아서 뱃지 있는 사람이랑 같이 입장시켜준다고 들었다. ) ( 그냥 받을걸 WHAT THE F**K )


본인이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도 모르는 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레드카펫을 열심히 구경했다. 타란티노부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등 할리우드 대표 스타들이 모두 등장했고, 관중들의 열광도 대단했다. 수상자 발표를 제외하고 2019년 칸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Dahyun Kim


타란티노가 나오자마자 머리 위에서 우렁차게 '타란티~노! 타란티~노!' 하는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자 위에 이런 게 있었다. 타란티노를 응원하려고 온 사람들인가 보다... 아마 타란티노도 뿌듯했겠지..


©Dahyun Kim


이때 자리를 뜨지 않고 존버 했더라면 <기생충>의 레드카펫을 볼 수 있었겠지만.... 아침 일찍 출발해 발이 너무 아픈 싸구려 구두를 신고 온 세상을 헤집고 다닌 덕분에 HP는 이미 바닥이 나버렸다.




빠른 포ㄱ.. 아닌 선택과 집중



3시간 정도 구걸과 구경을 반복했기에 나는 너무 지쳐버렸고, 오늘치의 구걸은 포기하고 앉아서 쉴 곳을 찾아 걸어 다녔다. 칸의 대략적인 지리를 익히고 나서, 이 회전목마를 보고 홀린 듯이 이끌려 앞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프랑스 남부 특유의 근사한 날씨 덕분에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배우들이랑 같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도 실감이 잘 나지 않고... 무튼 참 대단한 하루였다.


©Dahyun Kim
©Dahyun Kim

햇살이 너무 좋아서 한참을 앉아 멍 때리며 '아 조금 집에 가고 싶다... 서럽다..'라고 생각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너무 좋아서 사실은 이 도시를 전혀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멋진 뷰에 위로받으며 기운을 낸 뒤, 나는 팸플릿에 나와있던 야외 무료 상영 스케줄을 보고, 다시 기운 내서 영화 볼 계획을 세웠다.


칸 영화제는 이렇게 해변에 멋진 영화관을 차려놓고 밤이 되면 무료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동네 꼬마 아이들까지 와서 쏴아- 파도 소리 들으며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아직 의자도 다 세팅하기 전인 것 같아, 간단히 식사를 하고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Dahyun Kim




여행의 세 번째 삑사리

눈물에 젖은 8유로짜리 콜라를 드셔 보신 적 있나요..


당신은 혹시 8유로 ( 약 1만 700원 ) 짜리 콜라를 드셔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전 있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 여행의 세 번째 삑사리랍니다.


칸의 첫날 기가 팍! 죽어버린 나는 왠지 햄버거나 케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싶지가 않았다. 하루 종일 구걸하느라 기가 팍 죽은 나에게 뭔가 좋은 대접을 해주고 싶었고, 내가 부담할 수 있는 정도의 근사한 식당을 가고 싶어 이 레스토랑을 찾았다. 사람이 무척 많았지만 시끄럽지 않았고, 분위기 있어서 너무 좋았다. 메인 요리는 25유로 정도의 금액이었는데 정말 정말 맛있었다. 양고기 요리였고, 왼쪽에 보이는 사이드로 나온 매시드 포테이토는 정말.. 극강의 부드러움을 자랑하는 나의 인생 매시드 포테이토다. 너무 인상 깊게 맛있어서 이후 집에서도 맨날 따라 한다.


©Dahyun Kim


와인을 마실까 고민하다가 가격대가 생각보다 높아서 절충안으로 떠올린 것이 콜라였다. 메뉴판에 없었기에 가격 확인을 안 하고 그냥 주문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적당히 2-3 유로 정도를 예상했으나, 콜라를 신나게 다 마셔버린 후에 확인한 영수증에는... 8유로라는 다소 어이없는 금액이 적혀있었다. 하지만 나의 실수였으니 이미 마신 콜라 값은 낼 수밖에. 허탈한 마음으로 가게를 나선 나는 그래도 맛있게 먹었잖아, 그냥 앞으로 '허리띠 졸라매자'라고 생각했다.


쿨하게 넘기기로 결심했지만, 8유로가 너무 아까워 내 마음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중이었다. 한편으로는 몇백만 원짜리 드레스를 입고 온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고작 8유로로 이렇게 맴이 아파 벌이는... 내 신세가 처량하고 우습기도 했다. 별거 아닌 일에 오만 생각을 다 하며 해변으로 향했다.


©Dahyun Kim


다행히도 영화 시작 전 미리 도착한 해변은 아름다워서 억울한 내 마음이 싹 풀렸다. 칸 영화제 썬배드에 앉아, 왼쪽에 펼쳐진 해변을 감상하며 앞서 구걸하던 공책의 뒷장에 내 심경을 마구 써 내려갔다. 흔히 말하는 구질구질 노란 장판 감성의 글이었지만, 노란 장판은 무슨. 이 날, 난 칸 영화제에서 8유로짜리 콜라를 마시는 부르주아(?)였는걸.



해변의 영화관



급격히 외로워진 나는 하늘과 바다를 열심히 찍어댔다. 온 사방이 화려함 천지라서 그런지 유독 나 자신이 더 작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에효. 이런 서러운 날에는 꼭 하늘이 유독 예쁘기 마련이다.


©Dahyun Kim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친구랑 연락도 하고.. 하릴없이 시간을 때우고 있으니 금세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사람들은 계속 들어왔고, 날씨도 제법 쌀쌀해졌다. 담요를 두르고 영화는 언제쯤 시작할까.. 하던 차에 영화를 시작하겠다는 안내가 나왔다.


©Dahyun Kim




내가 관람한 영화는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2000)이었다. 영화는 서양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일본을 제외한 동양의 영화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1980년대부터 중국 영화들이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는 무척이나 좋았다. 특히 <와호장룡>은 북미권에서 크게 흥행한 영화였기에 괜히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어깨가 한껏 올라가는 영화 중 하나다. 본격적으로 상영이 시작하기 전, 이안 감독의 영상 인터뷰가 나왔고, 주연 배우인 장쯔이가 무대 위로 올라와 영화를 즐겨달라며 인사를 하고 갔다! ( 들뜸 )


©Dahyun Kim


칸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 7악장 수족관이 울려 퍼지며, 바다에서 부상해 계단을 올라가다가 영화제 로고가 나오며 영화가 시작되었다. 오묘한 음악이며 밤의 해변의 분위기며 영화제에서 영화를 본다는 벅참이며... 오만 감정이 교차하는 정말 황홀한 순간이었다.


©Dahyun Kim

이렇게 황홀한 경험을 하며 칸 영화제에서의 첫날이 저물어갔다. 영화는 안타깝게도 원어 + 프랑스어 자막이어서 그냥 액션과 연기를 열심히 감상했다. 장쯔이는 참 열심히도 날아다녔고, 나는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영화가 끝나기 전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집에 가는 길에도 즐거운 경험을 하나 했다. 버스를 타러 버스 정류장에 서있었는데, 옆에 있던 스모키 화장을 하고 턱시도를 입은 남자분이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을 하냐기에 그냥 영화를 좋아해서 왔다고 하니, 자기는 이번에 초청받은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한 배우라며, 애프터 파티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이미 약간 취해 보이는 그는 자기의 출연작과 이름을 열심히 알려주었다. 기쁜 마음에 나는 너무 축하한다고, 가기 전에 네가 나온 영화 꼭 찾아서 볼게!라고 했지만.. 그는 너무 취한 나머지 발음을 제대로 못한 것인지.. 결국 영화는 못 찾았다. (이건 이름 모를 그의 삑사리..) 혹시나 해서 지금 메모와 영화제 명단을 대조해봤는데 아직도 모르겠다.... 아쉽네..


이렇게 삑사리로 가득했던 칸에서의 첫날. 2부에서 계속되는 3박 4일의 여정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2부에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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