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 영혼의 편지(케이, 시엔)

고흐의 '나와 너'를 찾아서

by 행복이

존재의 심연에서 부르는 이름

― 고흐가 갈망한 ‘너’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세계가 두 가지 근원어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대상을 관찰하고 분류하며 이용하는 ‘나–그것(Ich–Es)’의 세계,

그리고 나의 전 존재를 기울여 상대의 실재와 마주하는 ‘나–너(Ich–Du)’의 세계.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은 바로 이 냉혹한 ‘나–그것’의 세계 한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영혼을 울리는 ‘너’를 만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끝까지 소모해 간 처절한 여정이었다.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로 엮인 『고흐, 영혼의 편지』(위즈덤하우스출판)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얼마나 집요하게 ‘너’를 향해 팔을 뻗었는지가 드러난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고흐의 사랑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두 인물,
케이 보스와 시엔을 통해 그의 ‘나와 너’를 살펴보고자 한다.


케이 보스

― 거부당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한 ‘너’


1881년, 고흐는 사촌 누이 케이 보스를 사랑하게 된다.
케이는 그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고흐는 물러서지 않는다.


“절대 안된다”는 대답을 들을 때 포기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희망을 갖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까. 나는 후자를 택했다. ‘절대 안 된다’는 그녀의 입장 때문에 앞이 막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p30. 1881년 11월 3일


케이를 향한 고흐의 사랑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집착'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부버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케이라는 존재를 자신의 생 전체를 걸고 마주해야 할 '너'로 설정했다. 그는 단순히 연애 상대를 찾은 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거할 집을 찾으려 했던 거다. 케이를 향한 고흐의 마음과 태도는 어떠한 계산도 목적도 없는 순수한 ‘너’와의 만남과 사랑을 위한 처절함 뿐이었다. 케이는 고흐를 명백히 '그것'으로 밀어낸다. 그러나 고흐는 계산하지 않았다. 사랑의 성공 가능성 따윈...


“이 사랑이 시작될 때부터, 내 존재를 주저 없이 내던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승산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나를 던진다 해도 승산은 아주 희박하지. 주어진 기회가 크거나 작은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 아니겠니. 사랑에 빠질 때 그것을 이룰 가능성을 미리 헤아려야 하는 걸까? 이 문제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어떤 계산도 있을 수 없지.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니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p35. 1881년 11월 10~11일 테오에게


부버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랑은 이미 결과와 무관하다.
고흐는 케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 수 있는 ‘너’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랑은 관계의 성취가 아니라 존재의 투신이었다.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고, 살지 않을 것이다.”
이 극단적인 문장은 집착이 아니라,
‘너’ 없이 세계를 견딜 수 없는 한 인간의 절규에 가깝다.


이 시기 고흐의 절망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케이의 부모님 집에서 등불의 불꽃 위에 손을 올리고 “내가 불 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녀를 만나게 해주세요”라고 버티던 장면.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온전한 자신을 던져서) 영적인 만남(사랑)을 쟁취하려 했던 이 비극적인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지만 고흐는 이 아픔을 통해 '사랑은 한 사람의 존재를 향한 전적인 헌신'임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시엔

― 가장 낮은 곳에서 발견한 ‘너’


케이에게 거절당하고 헤이그로 간 고흐는 길 위에서 임신한 매춘부 시엔을 만난다. 세상은 그녀를 욕망을 배설하는 '그것', 혹은 사회적 쓰레기로 취급했다. 하지만 고흐는 달랐다. 그는 그녀의 상처 입은 육체와 버림받은 처지에서 자신의 고독을 발견한다. ‘그것’으로 거절 당한 고흐는 ‘그것’으로 사회로부터 외면 당한 시엔에게서 진정한 사랑의 대상인 ‘너’를 발견하고 맞이한다.


지난 겨울, 임신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남자한테 버림받은 여자지. 겨울에 길을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얻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겠지. 하루치 모델료를 다 지불하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주어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다. p53.1882년 5월 3~12일 테오에게


고흐는 시엔을 구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연민의 위계 위에 서지 않는다. '구원자'라는 우월한 위치(나와 그것)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의 '동반자(나와 너)'가 되길 원했던 고흐의 진심을 보여준다. 그는 시엔의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봤고, 그 비참한 방 한 칸을 '예술가의 안식처'로 만들려 했다.

그리고 고흐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고 있다.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만하게 해주는 힘이 아니겠니. p.58~59. 1882년 6월 1~2일 테오에게


이 문장에서 관계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다. 부버가 말한 ‘응답하는 만남’이 여기서 발생한다.

시엔은 고흐에게 도움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고통을 나누는 동등한 ‘너’가 된다.

고흐는 시엔의 평범함을 숨기지 않는다.


네가 이리로 온다는 생각을 하면 아주 기쁘다. 시엔이 너에게 어떤 인상을 줄지 궁금해진다. 그녀에게 특별한 점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거든.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 숭고하게 보인다. 평범한 여자를 사랑하고, 또 그녀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인생이 아무리 어둡다 해도.

p.59. 1882년 6월 1~2일 테오에게


세상이 하찮게 여긴 평범함 속에서 고흐는 인격의 숭고함을 본다.
이것이 바로 ‘나–너’의 시선이다.


함께 있음이 만든 예술

― 예술적 동반자로서의 ‘너’


그녀와 그림이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 시엔은 화가가 겪어야 하는 자잘한 고생을 도맡아 주고
모델이 되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케이보다는 시엔과의 동행이 나를 더 나은 예술가로 만들어줄 것이다.

p.60. 1882년 6월 1~2일 테오에게


시엔은 고흐의 삶을 지탱한 존재였을 뿐 아니라, 그의 예술을 가능하게 한 ‘실재하는 너’였다.

<슬픔(Sorrow)> 속의 시엔은 관찰된 육체가 아니라, 함께 견딘 고통의 흔적이다.

그림 속 시엔은 임신한 배를 안고 고개를 숙인 채 웅크려 있다. 메마른 땅에 뿌리 내린 앙상한 나무 같은 그녀의 몸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고흐는 이 그림 하단에 “어째서 어떤 여성들은 이 세상에서 버려지고, 외롭게 살아가야만 하는가?”라는 의미의 문구를 적어 넣었다. 단순히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당시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보호받지 못한 여성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 고흐가 살던 시대, 그리고 현대에도 유효한 사회적 문제를 던지는 강렬한 메시지이다. 고흐에게 시엔은 성적인 대상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는 '너'였던 거다. 그 그림은 미적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잔여물이다.



사랑, 완성되지 않는 ‘나와 너’


사랑에 빠지면 태양이 더 환하게 비추고 모든 것이 새로운 매력을 갖고 다가온다. 깊은 사랑에 빠지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난 사랑이 명확한 사고를 막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랑할 때 더 분명하게 생각하고 이전보다 더 활동적이 되거든.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물론 그 외양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p95~96 1883년 3월 21~28일 테오에게


러나 부버가 말했듯, ‘나와 너’의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다.

가난, 사회적 압력, 현실의 무게는 이 관계를 다시 ‘나와 그것’으로 끌어내린다.

고흐는 결국 시엔을 떠난다. 그는 사랑을 완성하지 못했다.
케이에게도, 시엔에게도, 훗날 고갱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다. 부버에게 ‘나와 너’는 성취가 아니라 지향이다.

고흐는 단 한 번도 타인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의 실패한 사랑들은 모두

‘너’를 향해 끝까지 몸을 던진 기록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그림은 여전히 우리를 흔든다.

그가 캔버스에 바른 것은 물감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서 누군가를 부르던

한 인간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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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를 찾아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