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동기와 함께"
|레트로 만남법|
내가 대학생이었었던 그 오래전 시절에는,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 있으면 남학생들이 자주 따라가서 전화번호를 묻고는 했었다.
요즘은 스톡킹이라고 신고라도 당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인스타, 페이스북, 메신저는커녕 핸드폰조차도 없던 아날로그 시절이었기에, 줄 수 있었던 전화번호는 집에 딱 하나씩 있었던 집 전화번호뿐이어서, 전화가 와도 오빠들에 의해서 검열 후 내게 전해지기도 혹은 중간에 차단이 되기도 하던 ,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다니던 교회를 성장해서 대학생이 되고 그리고 결혼 후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도 다니고 있었는데, 나의 전화번호를 묻는 남학생 중에 내 눈에 괜찮아 보이는 이들에게는, 종종 교회 주소를 주고 보고 싶으면 일요일에 오라고 하곤 하였었다. 그리고 실제로 몇몇의 남학생들이 내가 다니던 교회에 찾아온 적도 있었다. 어린 그때의 나는 가족과 나의 절친 뚱클럽 회원님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도 그 후로도 쭉 그리고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남녀 불문, 나의 사람 보는 눈은 제로가 아니라 마이너스 이하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교육 사무장님의 구애|
그러다가 항공사 승무원이 되었고, 나는 우리 기수 승무원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대표로 행사도 진행하고, 교육해 주시는 사무장님과 의논할 일도 많다 보니, 한 노총각 사무장님과 자주 이야기 할 일이 있었고, 그분은 내게 좋은 감정이 생겼다며 나와 만나 보자고 하셨다.
내 눈에는 그분이 괜찮으신 분 같았지만, 사람 보는 눈이 굉장히 꽝인 나이기에, 우리 교회에 한번 놀러 오세요라고 하였고, 나의 절친 뚱클럽 회원들도 괜찮으신 분 같다고 하여서 몇 번 데이트 형식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크게 간과한 것은, 괜찮으신 분, 남들이 봐도 괜찮은 사람을 떠나서, 나의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교육 중인 신입 승무원이었던 나와, 우리를 가리키는 선생님과도 같은 교육 사무장이었던 그분하고의 만남은 여간 마음이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러한 것을 감당하고도 만날 정도로 좋아하는 감정은 전혀 생기지도 않았다. 물론 누구나 아는 우리나라의 최고 S대학교를 나오시고 외모도 괜찮으신 편에 심성도 착하신, 존경스러운 사람이셨지만, 내게는 남성으로서는 큰 매력이 느껴지지가 않았기에 정중하게 헤어지고 싶은 의중을 표현하였다.
|그 후 8년 뒤|
나는 나의 삶의 여러 변화, 결혼, 출산, 육아 그리고 두 번의 해외 이주 등의 생활들에 집중하며 열심히 살고 있었고, 또한 내게 큰 기억이나 추억을 기릴만한 일은 전혀 없었기에, 나는 그의 존재조차 기억도 생각도 해본 적이 없이 나의 매일을 힘겹게 살아내 가고 있었다.
나는 결혼 후 미국 뉴욕으로 그리고 또 한국에 몇 년 거주 후엔 다시 뉴질랜드까지 오게 되었고, 말로 하지 못할 여러 가지 불행한 사태후 결국에는 오클랜드 시내에 작은 식당까지 열게 되었다. 식당이라고 하기에도 적은, 테이블에 3개 총 12명 그리고 선반식 코너에 한 4-5명이 앉을 수 있는 곳이었다.
|도망간 주방장|
처음에 초밥집을 인수하여서 하고 있을 당시에, 원래 그 식당을 운영하던 한국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고 있던 연변 남자 주방장이 우리와도 일을 계속하기로 하였었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실력으로 일식 그리고 중식까지 해내는 꽤나 솜씨가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 식당은 사무실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토, 일은 문을 닫았었는데, 금요일 가게 문을 닫을 시간 즈음에 그가 전화를 한통 받더니, 눈에 눈물이 가득하여, 자신의 아버지가 위독하니, 자신에게 4주 치 주급을 미리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난감했지만,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말에, 나는 가지고 있는 돈의 거의 전부로 그의 4주 치 주급으로 맞추어서 주었다. 그런데!!! 그는 그 후로 실종이 되었다.
월요일 당장 음식을 해서 가게문을 열어야 하는데, 나 혼자 뿐이었다. 그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그 후로는 지금까지도 본 적도 없다.
요리법도 혹시나 내가 배울까 봐 극도로 보여주는 것을 꺼리고, 보고 있으면 화를 내고 했던 그는 나중에 알고 보니, 심각한 도박 중독자였었고, 편찮으신 아버지며 글썽인 눈물도 다 악어의 눈물 같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처럼 어린 여자 사장의 나름 선한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은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을 것이고, 아마도 한치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같은 방식으로 다른 곳에서도 일을 갑자기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우리 다섯 가족의 생계가 걸린 일터에서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이 그에게는 그저 있을 수도 있는 일상이었나 보다.
|초밥집을 한식당으로|
어쩔 수 없이 나는 가게 문을 3주간 닫기로 하였고 닫은 동안 조금의 내부 공사를 한 후, 같은 교회에 다니고 계시던 연변 주방 이모님을 모시고 와서, 초밥집에서 한식집으로 메뉴를 바꾸어 장사를 하기로 하였다.
주 메뉴는 육개장이었고, 그 외에 대표적인 한국 음식, 김치찌개, 제육볶음, 오징어 볶음, 불고기 백반 등등이 있었다.
우리 가게는 다른 곳들이 보통 점심 장사를 위해 11시경에 여는 것과는 다르게, 이른 시간인 8시부터 영업을 하였기에, 아침 일찍 한국음식을 찾는 승무원분들 그리고 기장님분들에게 입소문이 났었던 것 같다.
이상하게 나도 비행을 할 시에는 외국에만 나가면 단 며칠이라도 그렇게도 한국음식이 먹고 싶었었고, 내가 근무했던 항공사 직원분들 중에 나를 기억하시는 부 사무장님과 인사도 나누며, 예전 승무원이 운영하는 한식당이라며, 오클랜드에 오는 승무원사이에서 알려진 것으로 보였다.
|묘한 동기|
승무원 교육 중에 나의 기수 동기들이 다 같이 서로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워낙 개성이 강한 젊은 또래의 여성들이 전국 각지에서 지원하여 모였기에, 물론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이들도 없었지만...
거의 6개월의 교육을 받는 동안 나와 자주 어울리던 친한 몇몇의 동기도 있었지만, 그 동기는 자신감이 굉장히 충만하였었고, 또 꽤나 재력가 집안의 자녀라고 들었던 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다였다.
그런데 우리 동기중 한 명이 그녀의 집을 방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랬다며 우리에게 이야기한 것은, 그녀의 방이 거의 비행기의 기내와도 같았다고 한다. 많은 상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기에 사실 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였지만, 왠지 가깝게 지내고 싶지는 않은 굉장히 자기애가 충만했었던 젊은 여성이었던 것임에는 분명하였다.
꽤나 부자라서, 제주도에 큰 저택과 땅도 많다던, 명문대를 졸업한 고고했던 그녀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머 너 식당 하니?|
썩 유쾌하거나 좋은 기억이 없었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뉴질랜드의 도시, 오클랜드에 있는 나의 식당에 이른 아침에 불쑥 들어왔다.
나는 원래 사람의 얼굴을 절대 잊는 법이 없기에 바로 그녀를 알아보았지만, 거의 8년 만에 처음 보는 그녀 또한 한 번에 나를 알아보고는 정말 큰 목소리로 마치 오래전 절친이나 갑자기 만났듯이 들뜬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 너 선영이 아니니? 우리 기수 대표? 결혼하고 미국에 유학 갔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근데 너 뉴질랜드에 있었구나?"
나의 이야기를 어떤 통로로 들었는지는 알 수도 없었으나, 굳이 시시 콜콜 개인적인 대화를 할 우리의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기에, 반갑다 오랜만이다 정도로 끝맺고 싶었다.
그녀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이제는 부사무장이 되어서 오클랜드에 비행을 온 것이라 하며, 그 옆에는 후배 승무원들도 몇 명이 같이 왔었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다가 손을 흔들며 호들갑스러운 큰 목소리로 그것도 뉴질랜드 길 한 복판에서 큰 한국어로 누군가에게 말을 하였다.
'자기야 자기야~~, 빨리 이리로 와봐, 여기 선영이, 내동기 기수 대표, 선영이 가게래"
|나를 짝사랑했던 사무장님과 여우 동기|
잠시 뒤 위에서 내가 언급했었던 당시 신입 승무원이었을 적 교육 사무장이었고, 나와 아주 짧은 만남을 뒤로 많이 힘들어했다고 들었던 그가 나의 가게로 불쑥 들어왔다. 우리 동기들 사이에서 그 사무장님이 나를 좋아해서 사귄다는 소문을 모르는 이는 없었기에, 어색했던 그녀의 과장된 행동과 말투가 다 이해가 되는 장면이었다.
사무장님은 멋쩍게 웃으시며 이야기하였다.
"아 선영아 정말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니, 뉴질랜드에..?"
그러자 나의 동기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끼어들며 말했다.
"자기야 자기야, 선영이는 결혼하고 아이도 있대. 식당도 하고, 정말 대단하지?"
그러고는 바로 묻지도 않은 나에게 말했다. 그야말로 갑자기 그녀만의 독무대가 나의 식당에서 펼쳐졌다.
"아 너는 모르겠구나. 우리도 몇 년 전에 결혼해서 딸이 하나 있어 이이랑"
사무장님의 팔짱을 끼고, 머리를 기대며 이야기하였다. 뭐 그다지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어필을 하니, 그래도 나도 어느 정도 답변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또 사무장님도 계시니 예의를 갖추어 겸연쩍게 말했다.
"당연히 몰랐지, 근데 두 분 다 축하드립니다."
그렇지만 나의 속마음에서는
"흠 그래 정말 잘했네, 칭찬해 주마, 행복하게 오래오래 천년만년 잘 살아라. 굳이 그렇게 까지 설명을 안 해도 되니까, 빨리 밥 먹고 갈길 가렴, 네 남편과 제발 행복하고 서로 바쁜데 굳이 안부 묻지 말고 잘 살자꾸나"
승무원 시절부터 그를 짝사랑해 온 그녀는 그 당시 그가 나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몇 번이나 일부러 내가 인사한 것을 모르는 척하는 유치한 행동을 했던 것도 갑자기 생각이 나며 그 모든 상황이 그제야 설명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식당을 하는 허름한 나의 행색을 보고 무슨 본인이 승리라도 한 듯이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들떠 있었고, 그런 그녀는 내게는 왠지 자신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처럼 위태하고 짠해 보일 뿐이었다.
|침묵은 금|
내가 같이 일할 때 들은 그녀의 집안은 꽤나 잘 알려진 부유한 집안이라고 했던 것이 나타나듯이, 그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가의 명품으로 치장을 하고 왔었고, 막 30대가 된 그녀는 고상하고 기품 있는 중년의 여성으로 보였다. 말을 하기 전까지는...
나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감정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오랜만이라며 조용하게 인사하고, 밥 먹고 서로 흔히 하는 인사치레 덕담으로 끝났다면, 최소한 이 정도의 안 좋은 상황으로 그녀를 기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앞치마와 식당일하는 허름한 차림이 그녀의 명품보다 결코 부끄럽지 않았던 그날, 그녀가 침묵으로 침착함으로 잠시 다녀 갔었다면, 그녀와 그런 유별난 그녀와 함께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순한 셩격의 사무장님이 짠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오래전 그리고 식당 일을 하던 때를 그리고 나의 아기들을 생각하다가, 떠오른 그때의 일로 나 또한 나 자신에게도 영원한 진리인 그 교훈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기로 했다.
"침묵은 금이다 (Silence is golden)”
**이미지: Pexel,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