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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talie Sep 26. 2024

|개가 씹던 처방전|

-이색직업 해외브런치작가의 삶 5-"의사와 나누는 당신의 건강 회의록"

지난 10년간 여러 곳의 약국에서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처방전이 하나 있었다.


오래전 오클랜드 서쪽에 위치했었던 굉장히 바쁜 약국에서 인턴약사로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중년의 뉴질랜드(키위) 여성이 조제실의 약국 테크니션에게 지퍼백에 담긴 것을 건네어 주었다.


자세히 보니, 처방전이 끝이 잘려 있었고, 젖어 있었는지 한쪽에는 습기도 차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퍼백에 담긴 처방전을 내밀면서,


"우리 집 개가 조금 씹어 먹었어요. 그래도 내용은 다 보이니까 상관없겠죠?"




일순간 조제실에 있는 7명의 팀원 전체가 하던 일을 멈추고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선뜻 나서서 일을 하려 하지 않았었고, 누구나 하기 싫고 성가신일은 역시 인턴 약사였던 나의 역할이었기에,  나는 바로 지퍼백을 받아 들고 안에 든 개 침에 흥건히 젖고, 끝이 찢어져 나간 처방전을 꺼내보았다.


개의 침에 젖어서 처방전에 코멘트와 사인을 할 수도 없었기에, 일단 복사부터 하고 나서,

복사본에 모든 처방을 위한 체크를 모두 한 후 원본을 다시 뒤에 첨부하였어야 했던,

가장 잊히지 않고 황당했었던 처방전 손상 사건이었다.






처방전으로 약을 조제하려면은, 약사들은 처방을 시작하기 전에 처방전의 안전 체크를 제일 먼저 하여야 한다.


대부분의 뉴질랜드의 약사들은 펜으로 처방전의 안전성과 정확성 체크, 체크하는 약사의 이니셜

혹은 그리고 날짜와 서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환자의 이름, 처방한 의사의 서명, 날짜  그리고 약물의 이름, 용량, 용법, 복용기간등이  정확한지

우선 살핀 후에, 환자가 현재 복용 중인 다른 약물과의 상호작용과 특정 약물의 조합이 위험한지

체크 후에 환자의 차트와 처방전에 또다시 서명을 한다.


그렇기에 처방전은 환자를 위한 약의 안전과 정확성 체크와 그리고 특이한 복용방법과 환자의 나이, 체중 건강 상태 등의 정보 등이 다 포함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기밀 서류이다.






그렇지만 위의 개가 씹던 처방전 외에도 그동안 수많은 음식물과 음료 그리고 흙탕물에도  떨어뜨려지기도 했던 여러 가지의 손상되거나 오염된 처방전을 수도 없이 받아왔었다.


가장 많았던 것이 커피를 엎질러서 색이 바랜 처방전 그리고 각 나라별 음식들, 카레, 튀긴 음식 기름,

케첩, 칠리소스, 그리고 한국 환자분의 김치와 라면 국물 등등...


그러고 어떤 남성분은 거의 3개월 동안 A4에서 A5 사이즈의 처방전을 명함크기로 접어서 그의

작은 지갑에 넣고 다니다가 가지고 와서 모양별로 다 헤어진 처방전을 테이프로 일일이 붙인 후

다시 복사를 하고 원본을 첨부하는 일까지 추가로 해야 했었던 적도 있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뉴질랜드에서는 전자 처방전 시스템이 도입되어 메디컬 센터로부터 처방전이 이메일로

오는 것을 반기는 약사들은 한둘이 아닐 것인 만큼,

별별것을 다 묻힌 처방전을 가지고 오시는 환자분들이 상상이상으로 많았었다.


전자로 이메일로 보내주는 것도 못 믿으시는 연세드신 환자분들은 여전히 종이 처방전을 가지고 오시지만,

예전에 비하면 반 이하로 줄게 되어서, 처방전을 잃어버리는 위험도, 손상되는 일도 동시에 줄어들어서 여간 다행인 게 아니다.





별거 아니라 생각하시겠지만, 약사들에게 있어서 처방전은 의사와의 "환자의 건강"이라는

가장 중요한 회의 목록 내지는 기밀 편지와도 같은 중요한 서류들이다.


거기에 의사가 실수로 잘못 기재하거나, 제대로 기재된 것을 약사가 잘못 읽거나 해석하는 순간,

그 작아 보이는 실수 하나가 환자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만큼, 처방전의 손상은 직접적인 것은

아닐지언정 안전한 조제에 불필요하고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방해물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5 짜리 뉴질랜드 지폐는 한국돈으로 치면, 4000원 정도에 되는 적은 액수의 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 지폐를 개가 물어 뜯게 하거나, 땅에 떨어뜨려 흙탕물에 젖게 하거나,

온갖 음식물에 묻게 내버려 두는 사람들은 정말 흔치 않다.


왜냐하면, 모두가 $5 지폐를 잃어버릴까 봐 혹은 손상될까 봐 주머니나 지갑 혹은 옷이나

가방의 안주머니에 고이 간직하기 때문이다.






한번 상하고 나면 다시 회복이 100프로 되기 힘든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몸을 또 때론 마음을

치료하는 여러 가지 중에 약물 치료는 아직도 가장 대표되는 치료와 예방법으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의사와 전문의들이 환자와 상담과 정밀 검사 후,  각 환자의 치료에 맞춘 처방전이, 불과 4000원짜리 지폐보다 함부로 다뤄지는 것은 마치,

아주 큰 고가의 집을 가진 사람이 집을 함부로 쓰면서, 집안에 있는 작은 물건 하나에 집착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처방전을 차 안이나 가방 안에 보관하다가 약사에게 안의 내용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상태로 전달해 주시기를 부탁드려 봅니다.




처방전은 의사와 약사가 환자의 건강을 위해서, 모든 위험과 치료의 필요성을 분석한 후에 결정한 중요한

기밀 회의록과 같습니다.


오늘도 우리 약국에서 약을 받아가시는 모든 환자분들이 빨리 회복하셔서,  짧은 인생이란 여행 중에 만난 사랑하는 가족들과 사랑하는 이와 오래도록 건강하시기를 기도 합니다.


**이미지: Pixa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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