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톡으로 나를 찾은 딸"
|Urgent Email (긴급이메일)|
2024년 6월 9일, 그날도 여느 날과 같이 약국에서 일을 하다가 모닝 티(영국식 차와 간식을 먹는 문화로 근무 중에도 오전 오후 각 10분씩 쉴 수 있다) 시간이 되어서, 직원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핸드폰으로 이메일을 체크하고 있었다.
"Urgent" (긴급)라고 제목이 쓰인 오클랜드에서 살다가 지금은 이주한 후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는, 내 예전 세입자한테서부터 온 이메일이 있었다.
프라나는 호주 콴타스항공사의 남승무원으로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서 일하면서 그의 아내와 함께 나의 집에 3년여 동안 살았었던 세입자였었다. 그는 늘 유쾌하고, 친절하고 또 성실한 사람이었고, 호주에 본사가 있는 콴타스 항공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시드니로 이주를 하게 되면, 장거리 국제선 비행을 더 많이 할 수 있고 고로 수입이 훨씬 많아진다며, 두어 달 전에 호주로 이사를 갔었고 그 후로는 그로부터 처음으로 받는 연락이었다.
|25년 전 딸과 함께 찍은 사진|
내가 전 집주인 레프런스 (호주나 뉴질랜드에서는 세입자를 구할 때, 그전 집주인으로부터 신용도를 체크하는 게 일반적)를 써 주었기 때문에, 무언가 다시 나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메일을 여는 순간, 상상하지도 못한 내용과 사진에 나는 심장이 멎는 듯 호흡이 가빠지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마치 드라마나 영화같이 과장되게 만들어 놓은 억지 상황과 황당 전개가 나의 인생에서는 참 자주 그리고 많이도 일어났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나름 괜찮은 대학을 나오고, 나름 괜찮은 직장을 다니다가, 나름 괜찮은 줄 알았던 사람과 결혼을 하고는 남들과 같이 나름 평범하게 평탄하게 살아갈 줄 알았던 나는 , 지난 몇십 년 동안 뉴질랜드에서 무일푼의 여성 피난소, 그리고 허름한 고시원 기숙사에서 생존하면서 너무나도 힘에 겹던 그리움, 외로움 그리고 빈곤과 좌절감을 다 겪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며 버티고 버틴 나였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그 짧은 순간에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눈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서 직원 휴게실의 티룸에 있던 다른 직원들은 모두 나를 보고 너무 놀래서 나의 가족 중의 누군가가 돌아가신 줄 알았다고 했다.
그 이메일을 열자마자 내 눈에 보인 것은 26년여 전에 내가 4살 베기 어린 딸과 같이 찍었었던, 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었기에 처음 보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딸이 올린 틱톡의 화면도 첨부되어 있었다.
|한눈에 당신을 알아보았어요|
나탈리, 혹시 이 사진 속의 여성이 당신이 아니라면 정말 미안해요. 그렇지만 나는 한눈에 그녀가 당신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채버렸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그때와 지금의 얼굴이 똑같기 때문이죠. 내가 일하고 있는 콴타스 항공 장거리 비행 중의 휴식 시간 중에 동료 호주 승무원 내게 물었어요.
"너 혹시 뉴질랜드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이것 좀 한번 봐줘. 어떤 젊고 예쁜 한국 여성이 어렸을 때 헤어졌었던 엄마를 애타게 찾고 있어. 우린 그 팈톸을 보고는 너무 애달파서 모두 울음을 터뜨렸어. 그런데 그 아이가 어릴 때 뉴질랜드에서 엄마와 살았었고, 엄마가 아마 뉴질랜드에서 의사를 하고 있을 거라고 했대. 이 사진 좀 한번 봐봐"
라고 하였고,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저는 온몸에 닭살이 돋으며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그 사진 속의 여성이 바로 나탈리 당신이었기 때문이죠. 틱톡으로 당신을 찾고 있는 딸의 인스타 그리고 팈톸 주소도 첨부합니다."
|5살아이가 서른…|
그렇다. 25년 전 고작 5살이었던 나의 딸, 혜지를 전남편과의 이혼 조정 중에 빼앗기고, 그가 한국으로 데려간 후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의 딸이 지금 30살이 되어서, 나를 팈톸에서 찾고 있었고, 혜지는 아주 유명한 인스타 크리에이터가 되어 있었기에, 단 하루 만에 5만 명 넘는 이들이 그 팈톸을 보게 되었던 것이었고, 그들 중의 하나가 프라나의 콴타스 항공사의 동료였던 것이었다.
나는 SNS나 인스타를 전혀 하지 않아 왔었기에, 내겐 아예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무지의 미지의 세계였다. 내가 그동안 나이불문 누구나 한다는 온라인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었던 것은, 섣부르고 무의미한 sns 활동으로 인하여 아직 만나지 못하였던 나의 아이들이, 또 너무 어려서 거의 기억에도 없을 엄마를 온라인상에 보이는 겉 이미지로만 오해하는 것을 막고 싶었고, 또한 나의 귀한 가족사는 나만의 깊은 가슴속 앨범에만 고이 간직하고 싶었었기 때문이었다.
|컴맹이라 10년 같은 24시간의 기다림|
인스타로도 나는 어떻게 딸과 연락을 해야 할지 몰라서, 좋아요도 눌러보고, 팔로워 가입도 눌러보고, 또 혹시라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까 봐 20여 년 전 나의 사진들도 올려보고 딸의 연락을 하루에도 수십 번을 확인하며 기다렸다. 인스타 메시지조차도 할 줄 모르는 나는 컴맹이었어서, 연락이 닿을 때까지 불안하고 떨리는 초단위의 시간을 보냈었다.
한국과 뉴질랜드의 시차도 몇 시간 차이가 나고 또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딸의 기상시간까지 하루정도의 시간이었었지만, 내게는 마치 10년 같았던 기다림의 시간 후에 드디어 딸에게서 연락이 왔고, 우린 곧 뉴질랜드에서 드디어 25년 만에 해후를 하기로 하였다.
딸이 유명 인스타그램 크리에이터라서 때로는 하루에도 수천 명씩 팔로워가 늘어나기 때문에,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내가 자신을 팔로우 한 사실조차 몰랐었고, 엄마의 세입자한테서 이미 연락을 받았는데, 정작 자신의 엄마로부터는 아무런 연락도 없고, 평생 안하던 인스타그램에 뜬금없이 본인 사진들을 올려서 무슨 의미인지 한참을 고민하고 생각하느라고 연락이 늦어졌다고 했다…
|딸을 공부합니다|
그래서 나는 sns, 인스타그램 그리고 스레드를 그때서야 막 시작해서 지금도 공부 중이고, 딸을 이해하기 위해 딸이 나온 모든 인스타 광고, 스레드, 유튜브 그리고 넷플릭스도 보면서 내 "딸"을 알아가며 배워가려 노력하고 있다.
25년이나 지나서 나랑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살아왔었던 팈톸이 연결해 주어서 나의 딸을 만나게 될 줄을 상상도 못 했다.
나 혼자만 아직도 아날로그식 80년대를 살고 있었다. 진작 배웠다라면..... 진작 차라리 나를 알렸더라면....
나는 내 기억에는 아직도 5살짜리인 성장한 내 딸을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이제 또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2024년 6월의 어느 날에 쓴 글을 몇 번을 망설이다가 올려봅니다.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딸의 이름은 가명으로 대신합니다.
그 후의 이야기는 여러 번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다가 아직 쓰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제 인생의 곡예같은 상황마다 나의 엄마를 애타게 그리는, 엄마로서는 단 5년 만을 살아서 성장한 자녀들은 처음 가져보는 엄마가 서투른 중년의 엄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