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저장성 연수이야기9

by 투삶

난징에서 배운 시간의 무게

2016년 11월, 나는 새로운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이름도 조금은 낯선 공상행정관리국. 말이 어렵지만, 이곳은 쉽게 말해 도시의 ‘생활 속 질서’를 지키는 부서다. 시내의 1만여 개가 넘는 식당의 위생관리와 공산품 관리까지 맡고 있어 매일이 분주했다. 뜻밖에도 한국어에 관심이 많은 직원들이 있어 점심시간마다 한국어를 조금씩 알려주곤 했다. 낯선 도시에서 누군가와 언어를 나눈다는 건, 그 자체로 꽤 따뜻한 일이었다.

내가 근무한 사무실은 인장과 문서를 관리하는 곳이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방문객이 인장을 등록하러 찾아왔고, 자리를 비우기 어려워 출장길에 함께 나가지 못했지만, 도장 하나에도 나라의 질서와 신뢰가 깃든다는 걸 새삼 느꼈다.


역사 속을 걷는 도시, 난징

주말, 나는 중국 강소성의 성도 난징을 찾았다. 명나라의 수도, 그리고 ‘난징조약’과 ‘난징대학살’로 기억되는 도시. 중국 근현대사 속 네 번의 정부가 생겨난 곳이기도 하다.

1912년, 청나라가 무너지고 쑨원이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한 중화민국 임시정부. 그 시작의 흔적은 지금도 ‘중산릉’에 남아 있다. 그 뒤를 이은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남경을 수도로 삼았다. 하지만 공산군에 밀려 대만으로 옮긴 뒤 ‘난징정부’라는 이름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다.

그다음은 일본의 지배하에 세워진 유신정부(1938~40) 와 왕자오밍 국민정부(1940~45). 그 시절의 어두운 흔적은 지금도 도시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실질적인 중앙정부의 기능을 했던 것은 장제스의 국민정부가 유일했지만, 어느 정부이든 이곳 난징시는 ‘한국의 경주와 같은 뿌리의 도시’였다.


기억해야 할 역사, 난징대학살

1937년 겨울, 단 40일 동안 약 30만 명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난징은 그 아픈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대학살기념관을 무료로 운영한다. 일본의 반대 속에서도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그 문장이 난징시의 바람을 대신하고 있었다.


쑨원을 향한 중국의 존경

난징시의 또 하나의 상징은 중산릉이다. 쑨원의 호를 딴 이 묘역은 3년에 걸쳐 건립되었고 길이만 7km에 달한다. 황제의 무덤에 붙이는 ‘릉(陵)’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만 봐도 그가 어떤 인물로 기억되는지 알 수 있다. 중국의 거의 모든 도시 중심부에 中山路 (중산로)나 中山公園 (중산공원)이 있다는 사실도, 그에 대한 존경의 증거다.


작은 도시의 대화, 큰 교류의 시작

이후 인근도시인 옥환에서 열린 간담회에 참석했다. 한국의 연구원, 태주시, 그리고 옥환의 직원들과 함께 ‘한중 국제교류의 방향’을 논의했다.
대화 속에서 우리는 공통된 고민을 발견했다.

중국에서 생활하며 얻은 경험이 귀국 후 이어지지 않는 현실. 대부분의 교류 귀국 후 중국 관련 부서가 아닌 곳으로 순환보직된다는 점.

중국에는 한국어에 능통한 현지직원이 없어 교류 시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크다는 점.

반면, 우리처럼 다녀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단체방을 통해 실시간으로 상호 교류를 나누는 사례는 중국 측에서도 높이 평가했다.


‘만만디’의 진짜 의미

중국에 있으면서 내가 가장 크게 배운 점은 하나다. 서두르면 안 된다.
‘만만디(慢慢的)’ — 느긋함으로 번역되는 그 단어는 사실 신중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들은 어떤 사업이든 철저히 분석하고, 결정이 나면 그제야 빠르게 움직인다. 우리처럼 ‘빨리빨리’로 접근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남방 지역의 중국인일수록 경제 개념이 치밀하고, 이해관계를 철저히 따진다.

중국은 ‘용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문화를 굉장히 중요시한다. 외국인이 중국어를 조금이라도 하면 눈빛이 달라지고,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는 미엔즈(面子) 와 관계의 꽌시(关系) 는 교류의 기본이었다. 무엇보다 ‘중국을 진짜로 아는 사람’, 즉 중국통 의 부재가 각 지방자치단체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다.

중국 외사판공실 직원들은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근무하며 경험을 쌓는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꾸준히 같은 일을 맡겨주는 제도가 생긴다면, 서로의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한국, 다른 듯 닮은 일상

이곳에서의 근무는 한국과 다른 행정 풍경을 보여줬다. 회계 프로그램 대신 손으로 문서를 기록하고, 퇴직 전 5년은 공로연수로 월급을 받는다. 종교의 자유는 없지만, 공산당에 대한 신념이 크게 자리한다.

퇴근 후 회의가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 끝에는 무료로 운영되는 구내식당의 따뜻한 식사 한 끼가 있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건, 중국 정부의 금주령. 공무원의 경우에는 근무와 관련된 어떠한 술자리도 금지되어 있다. 단, 외부 기업 접대나 투자유치 자리에는 정부의 승인 후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익숙하지 않은 문화를 이해하고, 낯선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던 그 시간들이 문득 그립다.
낮선 오래된 공기 속에서, 나는 ‘교류’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조금은 배운 것 같다.
서로 다르기에, 닮으려는 노력.
그게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국제교류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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