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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린남 Jun 06. 2022

욕심이 아니라 진짜 필요한 건데요

아이패드를 사야지만 완치될 수 있다는 아이패드 병에 걸렸다.

아이패드 병에 걸렸다. 아이패드를 사야지만 완치될 수 있다는 그 무서운 병이 전염병처럼 나에게 옮겨왔다. 아이패드가 필요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왠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이패드가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첫 번째 이유는 노트 때문이었다. 나는 노트를 좋아하고, 노트에 펜이나 연필로 기록하는 것도 좋아한다. 언제나 책상에는 두세 개의 노트가 올려져 있었다. 각각의 노트는 맡은 역할이 있었다. 일정을 기록하는 다이어리, 할 일과 업무를 기록해둔 노트, 그림 콘티와 아이디어를 편하게 기록할 수 있는 연습장이었다. 영어 공부를 하는 날에는 거기에 줄 노트가 하나 더 추가된다. 처음에는 하나의 노트로 모든 걸 기록하려고 했다. 그게 간편했지만 기록의 형태가 달라서 결국 하나둘씩 늘어났다. 


노트가 많아지자 어쩐지 정신이 없어졌다. 같은 내용을 이곳저곳에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종이만 낭비하는 꼴이 됐다. 필요한 기록을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이 노트 저 노트를 뒤적거린다. 미니멀리스트 관점에서 여러 개의 노트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하나의 노트로 다시 합치면 더 좋을 텐데. 여러 개 보다 하나의 노트만 있다면 편리할 텐데. 그때 아이패드가 떠올랐다. "아이패드 하나만 있으면 모든 기록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다던데..." 하지만 이때까지도 아이패드가 있으면 편하긴 하겠다. 딱 그 정도였다.


아이패드가 필요하다고 느낀 두 번째 이유는 그림을 그리는 시스템을 바꿔보고 싶어서였다. 오랫동안 노트북에 펜 태블릿을 연결해서 사용해왔다. 2009년에 처음으로 펜 태블릿을 샀을 때부터 펜 태블릿을 활용해 디지털 그림을 그렸다. 마우스로 작업을 하다 보면 검지 부분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 하지만 펜 태블릿은 손의 불편함을 줄여줬다. 영상 편집을 할 때도 그래픽 작업을 할 때도 일반 마우스보다 펜타 블렛으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펜 태블릿으로 그림 그리는 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손에 완전히 익숙해진 작업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동할 때마다 노트북이며 태블릿이며 바리바리 싸들고 다녀야 하는 게 번거로웠다. 펜 태블릿은 노트북만 한 크기였고, 선으로 연결해야 해서 챙겨야 할게 많았다(블루투스로 연결할 수도 있지만 충전을 또 따로 해줘야 해서 선으로만 이용한다). 간단한 그림 몇 개 그리면 금방 끝날 일인데 장비를 세팅하느라 시간이 지체된다. 아이패드와 애플 펜슬만 있으면 그림을 그리고 바로 전송까지 할 수도 있다던데. 아이패드와 애플 펜슬만 들고 다녀도 외부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던데. 가볍고 간편한 작업환경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이패드 병에 걸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동안 아이패드 병에 걸려 있었다. 그중 11개월 동안은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멀쩡히 가지고 있던 장비들로 잘만 일하다가도 느닷없이 아이패드를 떠올렸다. 이렇게까지 고민한 이유 돈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세상 수많은 장비들에게 너그럽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돈 값을 하는 장비에게는 언제든지 지갑을 열 수 있다. 다만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싶었고, 소유물을 의식 없이 늘리지 않기 위해서 고민하고 고민할 뿐이다. 그리고 11개월 동안은 내가 진짜 잘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아이패드라는 물건이 내가 생각하던 것과 다를 수도 있고, 나와 아이패드의 결이 안 맞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결국 '이제 사도 되겠다'는 결론을 냈다. 그다음 1개월 동안은 어떤 크기를 살지, 어떤 모델을 살지 고민했고 내가 오래도록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모델의 아이패드와 애플 펜슬을 구입했다(아이패드 프로 11형 3세대/128GB).


아이패드를 구입한 이튿날부터 아이패드를 왜 이제야 산거냐며 억울해했다. 아이패드가 내 곁에 없었던 시간이 아쉬울 만큼 아이패드는 내 업무 환경을 깔끔하게 바꾸었다. 아이패드 가진 사람들은 백이면 백 사용한다는 노트 앱(굿 노트)을 구입했다. 그다음 무료로 배포되는 다이어리 템플릿을 다운로드했다. 이런 고퀄의 다이어리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니! 친절한 다이어리 템플릿 제작자 덕분에 월간, 주간 일정을 쉽게 정리할 수 있게 됐다. 많은 기록들을 노트 앱에서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노트를 여러 개 펼쳐두어도 상단에 있는 탭 덕분에 바로바로 원하는 노트로 이동이 가능하다. 지금 펼쳐져 있는 노트만 해도 7개다. 그것을 바로바로 마지막에 쓰던 위치로 이동할 수 있다. 속지의 설정도 바꿀 수 있으니 상황에 따라 내용에 따라 쉽게 바꿀 수 있다. 매일 아침 아이패드를 켜서 할 일 노트를 켠다. 날짜를 쓰고 오늘의 할 일을 쭉 써 내려간다. 하나씩 지워가는 재미는 노트나 아이패드나 똑같다. 책상 위에 있던 여러 개의 노트가 없으니 책상 위가 깔끔해졌다. 속이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패드가 오자마자 너무도 매정하게 책상에서 치워버릴 것 같아 노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이패드로 작업을 하게 되면서 좋은 점은 그림을 그린 뒤에 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송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같은 펜의 형태라도 펜 태블릿과 아이패드에 애플 펜슬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또 달라서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림을 수월하게 그리기 위해서 종이 질감의 필름을 사서 붙였다. 종이 질감의 필름을 쓰다 보면 애플 펜슬 촉이 갈린다거나 화면의 화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종이 느낌이 거의 안 난다는 불만 섞인 리뷰가 달린 '종이 질감 필름'으로 '굳이' 구입했다. 종이 질감이긴 하지만 사각거림은 없고 적당히 미끌거렸다. 내가 딱 원하는 정도였다. 종이 필름인 척하는 필름 덕분에 적응이 금방 끝났다.


아이패드가 생긴 뒤로 그림을 더 자주 그리게 됐다. 노트에 그릴 때는 스케치만 할 경우가 많았는데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면서 색칠까지 이어져서 사진 폴더에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많이 생겼다. 내가 그린 그림을 바로 모아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자꾸만 그리고 싶고 자꾸만 내 그림을 보고 싶어 진다. 내 손에 들어온 아이패드는 그 어떤 물건보다 ‘잘산템’이 아닌가.


게다가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로 아이폰, 맥북, 아이패드를 서로 연동할 수 있다. 그래서 클라우드에 파일을 저장해두면 맥북에서도 아이패드에서 바로바로 열어서 파일을 볼 수 있고 고칠 수 있다. 또 맥북에서 복사한 이미지나 텍스트를 아이패드에 바로 붙여 넣을 수 있는 것은 놀라웠다.


"뭐야 아이패드 가지고 있는 사람들 다들 이렇게 일하고 있던 거야?

나만 복잡하게 디지털 장비들로 아날로그처럼 일하고 있던 거야?"


이제라도 최첨단 신기술(?)을 잘 활용해서 요즘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의 걸맞은 일 잘러로 거듭나 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을 대단히 잘 쓰는 작가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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