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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린남 Nov 06. 2022

모자는 못 돼도 바구니는 될 수 있지

뜨개질은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산책할 때 쓸 모자가 필요했다. 머리를 감지 않았어도 편하게 눌러쓸 수 있도록 챙이 컸으면 좋겠다. 버킷 햇을 갖고 싶었는지, 아니면 뜨개질로 새롭게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버킷 햇을 만들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자를 뜨려고 고른 실은 면 티셔츠를 만드는 원단을 가늘게 자른 ‘패브릭 얀’이었다. 얇고 넓적한 이 실로 버킷 햇을 만들면 세탁하기도 편하고, 땀도 잘 흡수될 것 같았다. 실타래가 말랑말랑해서 촉감도 좋았다. 하지만 내 상상과 달리 결과물은 모자보다 단단한 그릇에 가까웠다. 패브릭 얀의 특성상 실과 실을 엮으면 훨씬 무겁고 단단 해진다. 손에 잔뜩 힘을 주고 뜨개질한 덕분에 더욱 튼튼한 모양새가 됐다. 사과나 귤 같은 과일을 담아도 될 만한 안정감이었다.


혹시 몰라서 내가 만든 그릇, 아니 모자를 머리에 써 봤다. 튼튼한 바구니를 쓰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버킷’이 바구니란 뜻이라지만, 이건 아무래도 ‘햇’은 될 수 없었다. 한숨이 푹푹 새어 나왔다. 이렇게 실패로 끝나나? 사놓은 실도 아까웠다. 모자 만들다가 망했다고 이대로 둔다면 처치 곤란한 존재가 될 것이 분명하다. 남편에게 모자를 만든다고 실컷 큰소리쳤는데. 가끔 빌려주겠다며 잘난 척도 했는데! 그때 옷장 맨 아래 칸에서 나뒹구는 잡동사니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에는 화장대가 따로 없어서 거울과 가까운 옷장 아래에 화장품을 세워 놓았다. 어수선한 상태의 이것들을 한데 모을 수납함이 필요하다고 생각만 할 뿐이었다. 마침 내가 만든 모자가 꽤 괜찮은 수납함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패담이 추가되는 것도 싫지만 우리 집에 쓸모없이 방치되는 물건이 늘어나는 건 더 싫었다. 그러니 버킷 햇이 될 뻔한 이것을 바구니로 만들어 보자! 새로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짠 뜨개실을 다시 풀어야 했지만, 아쉽거나 속상하지 않았다. 필요와 쓸모를 만족시키는 새로운 대안을 마주하자 오히려 신이 났다.


뜨개질이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뜨개질은 실수나 계획 변경에도 너그럽다. 잘못됐다 싶으면 언제든 풀어 다시 만들 수 있다. 새로운 쓸모를 가진 물건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수정할 기회가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는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쓸모를 고민하고 움직이는 사이 자신에 대한 믿음이 견고해진다. 이 정도까지 해냈으니,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다는 기대도 생긴다.


한 타래의 실은 언제든지 처음으로 돌아가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목표를 바꾸고, 재도전하는 두려움을 줄여 준다. 버킷 햇이 될 예정이었던 실타래는 일련의 과정을 겪은 뒤 수납함이 됐다. 흩어져 있던 선크림, 파운데이션, 눈썹 펜슬, 립스틱, 머리 끈 등 잡동사니가 몽땅 새로 만든 수납함에 들어갔다. 이제 화장할 때 손을 여러 번 움직여 하나하나 가져오는 대신 이 바구니 하나만 꺼내면 된다. 적당히 크고 단단한

수납함은 지금도 옷장 맨 아래 칸에서 쓸모를 다하고 있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뜨개질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느껴진다. 과정이 절대 다정하지만은 않고 실패도 겪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하다 보면 결국 무언가가 만들어진다. 내 손으로 만든 무언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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