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린남의 취향탐구생활
봄이 오면 자연스럽게 소풍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소풍날은 목적지가 어디든 설렜다. 내 가방이 도시락과 간식, 음료수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소풍은 즐겁고 좋은 날이었다. 소풍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집 안이 고소한 참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나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벌떡 일어났다. 김밥을 먹으려고! 엄마가 일찍 일어나서 싸 준 김밥을 먹을 생각에 버스가 소풍 장소로 출발하기 전부터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나는 김밥을 좋아하는 어린이였고, 김밥을 좋아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나는 김밥이 대충 한 끼 때우는 음식으로 치부되는 것이 진심으로 속상한 ‘김밥 러버’다. 김밥은 그런 대접을 받아선 안 된다. 김밥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정성이 필요한데! 김밥이 얼마나 영양 가득하고, 맛있고, 사랑스러운 음식인데! 김밥은 뭐니 뭐니 해도 집에서 만들어 먹어야 제맛이다. 물론 사 먹는 것도 맛있지만 직접 만드는 걸 더 좋아한다. 도마에 대나무 발을 올리고, 김 한 장을 잘 편 뒤 밥과 속 재료를 올려 말면 완성! 힘을 골고루 분배해서 말고 썰어야 터지지 않고 예쁜 김밥이 만들어진다. 내가 원하는 양만큼 밥을 퍼서 간하고 정성스레 준비한 속재료를 김으로 둘둘 말아 입에 넣었을 때, 내가 생각한 그대로의 맛이 느껴지면 공들인 힘도 시간도 가치가 생긴다.
단단한 김밥을 만들기 위해서는 얇게 자른 대나무를 실로 엮은 김발이 있어야 한다고 당연하게 믿어 왔다. 김밥을 자주만들어 먹는 우리 집에서는 김발이 필수품이었다. 호주에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집 근처 상점에서는 의외로 대나무 김발을 팔지 않았다. 대신 얇고 맥없이 흐물거리는 실리콘 김발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거라도 사 왔지만 손에 익숙지 않아서인지, 실리콘 김발이로 만든 김밥은 어딘가 납작했다. 엉성한 모양은 내 탓이려니 하고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실리콘 김발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더 있었다. 실리콘에 묻은 기름기가 개운하게 닦이지 않았다. 아무리 닦아도 끈적거렸다. 대나무 김발이 그리웠다. 단단하고 예쁜 김밥이 만들어지고, 쓱싹쓱싹 잘 닦이는 그것이!
며칠 뒤 또 김밥이 먹고 싶었다. 김밥 재료는 다 있었다. 대나무 김발만 빼고. 인터넷으로 김발을 주문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김밥이 먹고 싶어질지 몰랐다. 차라리 손으로 김밥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마에 김을 올리고, 밥 한 주먹을 곱게 폈다. 단무지, 달걀, 맛살, 당근……. 재료를 가지런히 올리고 조심스럽게 힘을 줬다. 실패할 줄 알았는데 웬걸, 의외로 깔끔하게 마는 데 성공했다. 김밥의 단면도 예뻤다. 맛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몇 줄을 더 말았다. 맨손으로 김밥을 말수 있다니! 짜릿하고 통쾌한 성취감을 맛봤다. 성가신 설거짓
거리도 하나 줄었다.
‘김밥을 맨손으로 만드는 사람’이 된 뒤 우연히 김밥을 하루에 수백 개씩 만들어 판다는 김밥 달인의 영상을 봤다. 뚱뚱한 김밥을 순식간에 마는 모습을 홀린 듯 지켜보다가 한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김밥 달인도 나처럼 김발 없이 김밥을 말았다. 김밥 달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내가 김밥 달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김발 없이도 김밥을 만드는 데 아무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순간이기도 했다. 맨손으로 김밥을 말 수 있다는 게 그리 특별한 일인가 싶겠지만, 나에게는 아주 실용적이고 매력적인 능력이다.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을 테지만,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다. 대단한 능력이 아니더라도, 내가 특별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특별한 능
력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