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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린남 Nov 06. 2022

허술하고 빈약해도 충분한 내 홈 카페

에린남의 취향탐구생활

집에 그럴싸한 홈 카페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잠에서 깨자마자 주방으로 가 기분에 따라 커피콩을 고르고, 향긋한 커피 향을 즐기는 우아한 아침을 보내고 싶었다. 번듯한 홈 카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일단 커피 머신이 필요했다. 하지만 부피가 크고 세척도 번거로워서 탈락. 그렇다면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모카 포트는 어떨까? 모카 포트는필터 등 부자재 없이 원두 가루만 있으면 커피를 내릴 수 있으니 간편하다. 세척은 번거롭지만 귀찮음을 이겨 낼 만큼 예쁘다. 아주 의미 없는 고민이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집에서 커피 잘 안 마시는데?


나는 아침마다 커피를 꼭 마셔야 하는 사람은 아니다. 커피를 좋아하나, 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음식 단 하나를 고르라면 그게 커피는 아니다. 그렇지만 카페는 아주 좋아한다. 동네에 새로운 카페가 생길 때마다 설렌다. 어떻게 꾸며질지, 어떤 디저트를 팔지, 어떤 분위기의 장소가 될지 기대한다. 카페에 앉아 몇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커피가 아니라 카페가 좋아서 홈 카페를 열고 싶었다. 맛있는 커피가 없어도 괜찮은 홈 카페! 고민 끝에 내 취향에 맞는 공간을 마련했다. 홈 카페라는 이름을 붙여도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메인 메뉴는 있다. 얼그레이 홍차로 만드는 밀크티다.


처음 밀크티의 매력에 빠진 것은 멜버른에서 그레이트 오션로드 투어를 할 때였다. 나무 위에 야생 코알라가 자고 있는 어느 공원에서 쉬는데, 호주인 가이드가 간식으로 쿠키와 밀크티를 줬다. 커다란 보온병에 든 따뜻한 물을 각자의 플라스틱 컵에 따라 주면 관광객들은 홍차 티백을 넣은 후, 기호에 맞게 우유를 첨가해 마셨다. 평소라면 우유를 붓지 않고 차만 마셨을 테지만 호주에 왔으니 이곳의 문화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을 따라 설탕도 잔뜩 넣었다. 꽤 맛있었다. 처음에는 어릴 적 싫어했던 캔 홍차 맛처럼 느껴졌지만, 씁쓸하고 부드럽고 달달한 맛이 어우러져 매력적이었다. 그 뒤로 카페에 가면 커피보다 홍차를 주문했고, 함께 나오는 우유와 각설탕을 넣어 꼭 밀크티로 만들어 마셨다.그때부터 시작된 밀크티 사랑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사 먹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내 입맛과 취향에 맞게 집에서 밀크티를 만들어 마신다. 홍차에 물보다 우유를 더 많이 넣어 아주 진하고 고소한 것이 특징이다.


티백으로 된 찻잎을 사 먹다가 최근엔 아예 틴 케이스에 든 찻잎을 샀다. 틴 케이스는 예쁘기도 하지만 찻잎을 먹을 만큼만 덜 수 있어 좋다. 티백보다 쓰레기도 덜 생긴다. 찻잎을 사탕처럼 생긴 차망에 담아 머그잔에 무심히 둔다. 컵바닥에 까만 찻잎 가루가 떨어지지만 먹어도 괜찮다. 애초에고개를 완전히 꺾어 마시지 않는 이상 밑바닥의 가루를 먹을일은 거의 없다. 그사이 냄비에 우유를 데운다. 차가 까맣게 우러나면 설탕을 넣고, 머그잔에 우유를 조심스럽게 따른다. 우유를 너무 많이 넣으면 차 맛이 제대로 나지 않으니 색을 잘 봐야 한다. 밝은 베이지색 정도를 추천하지만, 나는 진하게 먹는 걸 좋아해서 우유를 커피믹스 색이 날 정도로만 넣는다. 여러 명에게 대접할 때는 냄비를 사용한다. 큰 차망이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그냥 냄비에 찻잎을 바로 넣고 중불에서 끓인다. 물이 살짝 졸았을 때 찻잎을 체로 거르고, 각설탕을 사람당 네 조각씩 계산해서 넣는다. 각설탕이 녹으면 우유를 붓고, 좀 더 끓여 주면 완성! 시크하게 국자로 머그잔에 옮겨 담는 것이 우리 집 카페의 특징이다. 여기가 식당인지, 홈 카페인지……. 어쨌든 자, 홈카페의 메인 메뉴이자 유일한 메뉴가 완성됐습니다! 


메뉴가 단출하니 우리 집 카페에는 커피 머신도, 여러 종류의 커피콩도, 예쁜 머그잔도 없지만 손님을 위해 정성스럽게 홍차를 우리고 우유를 끓여 완벽한 맛을 만드는 카페 주인은 있다(바로 나!). 기분 좋은 밀크티 한 잔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주인장이 우리 집 카페의 유일한 자랑이다. 카페 주인으로서 심혈을 기울여 고른 것 중 하나는 밀크티에 넣을 각설탕이다. 황설탕으로 만들어진 데다가 값도 다른 설탕보다 비싸, 큰맘 먹고 구입한 것이다. 요리할 때 쓰는 가루 설탕을 사용해도 상관없지만 이 각설탕을 넣으면 밀크티의 맛이 한층 더 깊어진다. 무엇보다 마실 때 확실히 기분이 더 좋다. 각설탕은 넣으면 넣을수록 맛있지만 나는 건강을 위해 한 잔당 네 조각이라는 적당한 선을 지키고 있다(너무 많이 넣는 건가?).


믹서기도 있다. 덕분에 종종 새로운 메뉴가 등장한다. 바 닐라 아이스크림과 우유를 넣고 갈면 밀크셰이크가, 바나나와 우유를 함께 갈면 바나나 우유가 된다. 집에 남은 과일로 제철 과일 음료를 만들기도 한다. 없는 게 많지만 내 마음에 쏙 드는 이 홈 카페에서 나는 차를 마시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서울 근교의 전망 좋은 카페가 부럽지 않다. 아주 잠깐이라도!


엄마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인스턴트커피를 한 뭉텅이씩 가져온다. 이 집은 마실 게 없다면서 식사 후에 마실 커피를 직접 챙겨 오는 것이다. 마실 게 없다니. 내 홈 카페엔 대표 메뉴인 밀크티가 있고, 부드러운 밀크티도 있고, 또 달달한 밀크티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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