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동물의 왕국 아닌가
봄인가 여름인가 헷갈렸던 계절을 지나 지금 완연한 여름이 되었다. 한국은 벌써 코트를 입어도 추운 날씨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럴 때마다 내가 호주에 사는 게 실감 난다. 지금 우리 동네는 30도인데!
개인적으로 겨울보다 여름을 선호한다. 차라리 땀을 흘리는 게 뼈가 시린 것보다 났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하지만 여름이 오는 게 두려운 이유도 있다. 추운 겨울에 어딘가로 사라졌던 각종 벌레와 동물들이 따뜻해진 틈을 타 예고 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떤 벌레와 동물이냐면..
자. 덥다 하고 느껴질 만큼 선명한 여름이 왔다. 드디어 호주의 바퀴벌레님들이 등판하실 차례다. 여름이 되면 검지 만한 바퀴벌레들이 걷기 힘들 정도로 길 위에 가득 나타난다. 한국에서 봤던 바퀴벌레들은 정말 정말 귀여울 정도다. 귀여운 콩벌레 같은 느낌. 하지만 호주 바퀴벌레는 정말 크고 정말 빠르다. 길 위에 있는 것만 봐도 놀라 자빠지는데 집 안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기절이다. 남편과 나는 바퀴벌레가 집에 나타나면 스프레이형 약으로 2분 동안 뿌린다. 얼마 안 가 바퀴벌레는 죽지만 우리도 죽을 맛이다. 분사된 약과 독한 냄새가 작은 우리 집에 가득해진다. 하지만 이 냄새가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는지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 거다. 벽에서 벽으로 날아가던 바퀴벌레가 갑자기 떠올라서 몸서리가 쳐진다. 올여름에는 집에서 볼일 없기를..
건물이 많은 시티 쪽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바닷가나 집들이 모여있는 거주지역이나 조용한 동네에 가면 도마뱀을 쉽게 볼 수 있다. 날이 따뜻해지면 광합성을 하려고 햇빛이 강한 쪽으로 도마뱀이 나타난다. 아기 도마뱀도 자주 볼 수있는데 겁이 많은지 걷다 보면 작지만 빠른 움직임으로 피해가서 자세히 보기는 힘들다. 언젠가 우리 집 발코니에서 가만히 광합성하는 도마뱀을 보았는데 내가 다가가자 재빨리 에어컨 실외기 아래로 숨어버렸다. 가끔 벽에서 나타났다가 스르륵 사라지기도 한다. 파충류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애기 도마뱀은 귀엽다. 블루텅 도마뱀이라고 하는 꽤 큰 도마뱀도 볼 수 있는데 걔네들은 가까이 가도 꿈쩍 않고 하던 일에 집중한다. 하던 일이라 하면 주로 광합성이나 자기 갈길 가는 일. 내가 공격하지 않으면 내게 관심도 없는 동물이라 도마뱀은 무섭지 않다.
최근에 장 보러 갈 때마다 커다란 터키가 길목에 서서 쫓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겨울 동안에는 보이지도 않던 터키가 갑자기 동네 구석구석에서 발견되니 혼자 다니는 게 좀 두려웠다. 어쩌면 한 마리가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는 걸지도 모르지만 자꾸 보여 무섭다. 큰 개 앞에서는 빨리 도망가더니 나를 보고는 쫓아오던 터키의 눈이 아직도 생생하다. 생각보다 무섭고 커다랗다..
바퀴벌레도, 터키도 꾹 참고 귀엽다고 봐줄 만하다. 퍼슴에 비한다면. 퍼슨은 다 큰 고양이 만한 주머니쥐과의 동물이다. 처음 퍼슴을 만났던 것은 시댁 집 앞에 있는 큰 나무에서였다. 어두운 밤, 나무를 감싸 안고 두 눈에 불을 킨 채 나를 째려보고 있던 퍼슴을 처음 봤는데 어떤 동물보다도 무서웠다. 몸집도 꽤 두껍고 꼬리도 튼튼한 느낌으로 두껍다. 울음소리도 가끔 들리는데 공포 그 자체다. 그 퍼슴이 여름이 되자 우리 동네에 한 마리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나무에서 서식하는데 움직임이 소리로 들릴만큼 위협적이다. 나무 가지를 누가 잡아 흔드는 것처럼 요란해서 어두운 밤에 만나면 소리치고 달아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퍼슴에 관련한 일화도 있다. 사촌오빠 가족이 살던 유닛 옆집에 한국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 집 할머니가 발코니에 고추를 말린다고 돗자리에 고추를 펴두셨다고 한다. 그런데 밤 사이 퍼슴이 고추를 먹고 죽어있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꽤나 놀랐던 기억.
덩치 큰 어른이지만 워낙 겁이 많아서 호주에서 만나는 생물들이 무섭기만 하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볼 때마다 겁이 난다. 한국에서는 작은 생쥐만 봐도 난리를 쳐댔는데 여기에서 보는 생쥐는 귀엽기만 하다. "으악 쥐다!"에서 "쥐다~ 쪼끔 해~" 이렇게 바뀌었다. 다른 동물이 들이 너무 임팩트가 세다는 말이다. 여기 사는 동물들 중 아무도 먼저 날 공격하지 않겠지만 별 탈없이 이들과 여름을 보내기를 바라본다.
-호주에서 겁쟁이가 쓰다.
글/그림 에린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