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포중학교

친구

by 복순이

서울살이 1년 차가 되던 해,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는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그 짧은 거리도 움직이기 귀찮아서 지각을 밥먹듯이 했다. 아침마다 빨리 학교 갈 준비 하라며 재촉하는 엄마의 잔소리를 들을 때면 '튼튼한 줄을 학교와 집에 연결해서 창문사이로 타고 다니고 싶다'며 철없는 소리를 했다. 일찍 결혼했더라면 10대 자녀가 있을 법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집라인을 타고 등하교하면 제법 재밌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당시 개포중학교 교복은 못생겼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두발 자유화가 시행되지 않던 시기에 유독 짧고 단정한 머리를 강요했다. 귀 밑 3cm, 아직도 기억나는 규정이다. 교문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선도부 선생님과 졸개들의 레이더망에 포착되면 훈계 조치가 취해졌다. 특히나 엄중한 날엔 가위나 바리깡을 들고 머리카락 일부를 직접 잘랐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일은 없다. 꽤 대범하지만 순진했던 나는 졸업식에도 두발단속을 한다는 거짓말에 속아 바보같이 머리를 삼각김밥 모양으로 자르고 갔다.


공부는 못했지만 친구를 사귀는 건 공부보단 쉬웠다. 수업시간에 친구들과 쪽지를 주고받으며 킥킥대다 벌을 서기도 하고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려 교과서 모서리에 낙서를 했다. 의자를 뒤로 잘못 밀면 마치 방귀 뀌는 듯 소리가 났는데 옆줄에 앉아있던 남자아이들이 낄낄대며 놀려댔다. 방귀 뀐 거 아니라고 투닥거리다 그들 중 한 명과 정이 들었고 그렇게 첫 남자친구가 생겼다. (쓰고 보니 너무 뻔해서 나도 기가차지만 실화라서 더욱 경악스럽다.)


남자친구, 친구, 친구의 친구, 그 시절 나에겐 친구가 가장 소중했나 보다. 친구랑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정말이지 책을 한 자도 읽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당연히 성적은 전혀 '우수'하지 않았고, 나는 부모님께 단 한 번도 성적표를 보여준 일이 없다. 부모님이 성적표 소식을 물어올 때마다 아직 안 나왔다 둘러댔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땐 정정기간이라 좀 걸린다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도 대봤다. 그렇다 해서 성적에 무관심했던 건 아니다. 엄마 아빠가 내 점수를 보면 실망할까 봐 종이성적표 숫자를 조심스레 칼로 긁고 얇은 펜으로 성적표를 위조하기도 했다. 내 딴엔 그럴싸한데? 하며 괜찮아 보인다 세뇌한 적도 있지만 안 주면 안 줬지 차마 그딴 걸 보여줄 순 없었다. 그렇지만 이미 다 봤겠지. 꽁꽁 숨겨둔 연애편지도 기가 막히게 찾아내던 엄마였는데, 아무렴.


가장 많이 기억나는 시절은 아무래도 3학년이지 않을까 싶다. 그땐 무슨 이벤트가 많았다. 새로운 전학생이 와서 그녀와 친구가 되었고, 활발한 성격의 전학생덕에 여기저기 많이 놀러 다녔다. 학원 끝나면 남자아이들과 양재천에 가서 자전거와 킥보드를 타고 잠실부근 한강까지 갔다. 한강에서 라면과 과자를 먹고 집에 오면 몸이 노곤해져서 꿀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2002년 월드컵이 개최되었다. 월드컵 열기에 잔뜩 취해있던 우리는 붉은 악마 티셔츠와 각종 아이템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는 코엑스, 잠실, 강남역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새벽 늦은 시간까지 집에 오지 않아 부모님 애를 잔뜩 태워놓곤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잤다. 그땐 왜 이렇게 혼내나 싶었는데 이제와 보니 쫓겨나지 않아 다행이지 싶다.


3학년 때 어울리던 친구들과는 전학생 집 근처 정자(쉼터)에서 매일 밤늦게까지 시시덕거렸다. 교실에서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뭐가 그리 재밌고 할 말이 많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재밌는 건 최근에 그들과 아주 오랜만에 개포동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날도 그때 추억을 얘기하느라 밤을 꼴딱 새워 버렸다.


어느새 아줌마 아저씨가 되어버린 우리는 24년 전과 다를 바 없이 한심하고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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