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고3 수험생
예나 지금이나 유난스러운 단어다.
나도 고3이 되자 꽤 유난스러워졌다. 공부도 안 하는 주제에 수험생 대접은 받고 싶었다. 엄마와 아빠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치만 무척이나 유난을 떨었던 나에게 부모님의 관심과 배려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아팠으니까
2학년 2학기, 그니까 가을즈음부터 엄마가 아팠다. 위암이라고 했다. 엄마의 건강상태에 대하여 나와 동생이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제야 문득 잃어버린 퍼즐조각처럼 맞춰지는 장면이 있다. 그날은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처음으로 우리 집에 갔다. 현관문이 열리자 식탁에 앉은 엄마, 아빠가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잠깐만 있다 갈 거라며 내 방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에 엄마는 잘 익은 단감 3개가 담긴 쟁반을 갖다 주며 알아서 깎아 먹으라고 했다. 당시에는 빠른 속도로 매끈하게 감을 깎는 친구의 솜씨에 감탄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 두 분 모두 대낮에 회사가 아닌 집에 있었다는 사실과 어색함이 감돌던 그날의 분위기, 식탁 위에 놓여있던 갈색 서류봉투마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일차의료기관의 오진과 갑작스러운 수술, 이어지는 혹독한 항암치료에 엄마는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아빠는 직장과 병원을 오가며 엄마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에게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되도록 말을 아꼈다. 그래서 사실 큼지막한 일을 제외하고는 엄마의 병세에 대해 자세히 알았다거나 병간호에 시간을 쏟은 기억은 없다.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저 기억나는 거라곤 퇴원 후 집에 돌아와 의료용 침대에 누워있던 앙상한 모습의 엄마, 사과를 먹고 싶은데 씹을 힘이 없어 숟가락을 이용해 즙을 내어 먹여주면 맛있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엄마와 나눴던 대화들
"엄마 고향 내려가서 요양하면서 쉬다 오고 싶은데... 어떨까?"
"엄마는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갔으면 좋겠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자신의 생을 목전에 두고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고작 자식의 입시라니
그깟 하찮은 소원 하나 시원하게 들어주지 못한 자식이라니
공부도 안 하는 주제에 꼴에 수험생이라고 엄마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도 자식이라니
엄마는 봄이 온 것도 모르고 화창한 4월 우리 곁을 떠났다. 나의 즐거웠던 학창 시절을 함께해 준 친구들 덕에 엄마의 마지막 길을 잘 배웅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다시 공부 못하는 고3 수험생으로 돌아갔다. 꼴에 양심은 있었는지 공부를 전혀 안하진 않았다. 조금씩 하다 보니 일부 과목 성적이 더디게나마 오르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다. 다가오는 수능시험일에 조급해지는 마음, 늦게나마 공부 좀 하겠다는데 집안일까지 해야 한다며 히스테리를 부렸다. 그땐 아빠와 나, 동생, 그리고 내 고함소리에 피해를 본 옆집 수험생까지 모두가 지쳐있었다.
당연히 수능은 보기 좋게 말아먹었고, 단감을 예쁘게 깎던 친구와 부둥켜안고 우리 망했다며 울었다. 나중에 서야 알게 된 일인데 시험당일 아침에 나를 바래다주려 집을 나섰던 아빠는 현관문 잠그는 것을 깜빡 잊었고, 그날 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우리 집 재산도 사라졌다.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나의 10대가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