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씌워지는 기억

위키드 보러 갈 사람

by 이전철

나는 중학교 때부터 뮤지컬을 좋아했다. 하이스쿨 뮤지컬로 시작한 나의 뮤지컬 사랑은, 고등학교 때 봤던 뮤지컬 ‘렌트’로 이어졌다. 수업시간에 영어 문제를 푸는데, 그 지문이 뮤지컬 렌트에 관한 내용이었다. 영어 선생님은 뮤지컬 렌트의 대표 넘버인 ‘Season of Love’와 ‘Take Me or Leave Me’를 보여주셨고, 노래가 너무 좋아서 영화를 찾아봤다. 그런데 넘버 하나하나가 너무 좋아서 그다음부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뮤지컬은 렌트라고 말하고 다녔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직장인이나 학생들이 뮤지컬을 준비해서 공연하는 동호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도 당연히 관심이 생겼고, 틈틈이 찾아보다가 어느 동호회에서 이번에 뮤지컬 렌트를 공연할 팀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친한 동기를 몇 명 꼬셔서 등록했다. 총 30만 원이었는데 2회에 나눠 낼 수 있어서 15만 원만 냈었다. 뭐, 적다면 적고, 크다면 큰 금액이다. 그렇게 기대에 차서 갔지만, 제대로 돌아가는 동호회가 아니었다. 수업을 담당한다는 선생님은 안면 있는 팀원들에게 일을 다 떠넘기고, 몸이 안 좋다면서 수업 당일 취소를 하지 않나(지금 생각하면 99% 술병일 거 같다), 그나마 한 수업 몇 번도 자기소개, 대본 리딩, 오디션 등 선생님의 역할이 거의 필요 없는 소위 말해 날먹 수업들이었다. 학생인 우리도 열 받는데, 직장인 분들은 오죽했겠나. 결국 그 동호회는 터져버렸고, 환불 못해준다고 뻐팅기던 그 선생에게 관련 법 조항을 보내 돈을 받아낸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이 날 이후로 나의 소중한 렌트의 기억에 흠이 생겼다며 투덜대곤 했다.

그러고 나서 작년, 정말 오랜만에 서울에서 뮤지컬 렌트 공연이 열렸다. 친한 친구랑 보러 갔다. 렌트를 영화로 말고 실제 공연을 보는 건 처음이어서 너무 좋았다. 내가 뮤지컬을 좋아하는 이유는 노래 때문도 있지만, 그 공연장에서만 느껴지는 배우들의 열정 때문이 더 크다. 그렇게 친구와 공연을 보고, 사운드트랙 앨범도 사고 (앨범특; 뜯지는 않는다) 맛난 디저트를 먹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이것이 뮤지컬 렌트에 관한 나의 가장 최근 기억이다.



어쩌다 보니 뮤지컬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는데, 이번엔 위키드 이야기다. 21살 때 나 포함 6명이서 유럽 여행을 갔었다. 런던이 뮤지컬로 꽤나 유명해서, 나는 위키드를 보기로 했다. 다른 친구들은 별로 땡기지 않아 해서 나 혼자 봤었다. Defying Gravity랑 Popular라는 넘버밖에 몰랐지만, 그래도 그 두 곡을 좋아해서 보고 싶었다. 줄거리도 하나도 몰라서 네이버에서 검색해 열심히 읽어갔었다. 정말 소용없게 영어 듣기에 처참하게 실패해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때문에 기억나는 넘버는 아직도 그 둘 밖에 없다. 3층 정말 구진 자리에서 봤는데, 무대장치가 화려해서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그 뮤지컬보다 더 기억나는 건 보고 나서 숙소에 가는 길이었는데, 진짜 내 생에 처음으로 외국에서 혼자 다닌 거라서 정말 새가슴이 됐었다. 소화전을 보고 깜짝 놀라고, 나뭇가지를 보고 철렁하고 그랬다. 숙소에 오니 친구들은 저녁으로 파스타를 시도했다가 처참히 망했다나 뭐라나. 어쨌든 위키드는 이때까지만 해도 ‘나 런던에서 그거 봤어!’로 시작하는, 하나의 여행썰 기억이었다.

위키드에 관한 기억은 또 덧씌워졌는데, 소개팅한 애가 위키드를 보러 간다고, 아주 신나서 프사까지 해놨더라. 나는 걔가 꽤나 마음에 들었던지라, 내 위키드 썰을 풀면서 대화를 이어나갔고, 나름 친해져서 몇 번 더 만났다. 그런데 얘가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건지, 아니면 어장 관리하는 건지 도무지 애매하게 굴더라. 나는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해 수작질(?)을 하고, 더 이상 애매한 관계로 이어가고 싶지 않아 고백했다. 뭐 결과는, 잘 되지 못했다. 이 일 이후로 이제 난 위키드를 생각하면 실연의 아픔이 생각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돼버렸다.



나에게 뮤지컬 렌트는 아직도 너무 좋아하는 뮤지컬이면서도, 열 받게 하는 그 선생과 함께 친구랑 본 공연이 동시에 생각나게 한다. 위키드도 여행의 추억과 실연의 씁쓸함을 동시에 생각나게 한다. 이렇게 뮤지컬뿐만 아니라 어떤 물건, 공간, 특정한 날짜, 심지어 향기 같은 것에도 기억이 차곡차곡 덧씌워진다. 싫은 기억이든, 좋은 기억이든, 그 대상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의 뇌는 걷잡을 수 없이 연상을 시작해 저 저편에 있던 기억을 꺼내버린다. 그러다 그 기억은 다시 또 다른 기억에 묻히고, 그 대상은 다시 또 새로운 모습이 된다. 얼른 위키드에 새로운 기억을 씌워야겠다. 같이 위키드 보러 갈 사람 어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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