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수 행복

by 오눈송이

아홉수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올 한 해가 시작되었다. 전래동화 속 호랑이가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잔인한 짐승이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아홉수는 누군가의 아홉 살을 잡아먹는 무서운 나이었다. 조심해야 하는 수, 아홉수. 이게 뭐라고 괜히 긴장되었다. 아무래도 아홉수에 당한 것 같다는 말을 연초에 유난히 많이 했던 것 같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역시 아홉수 때문이었고 좋은 일이 생기면 그건 아홉수를 비껴간 행운이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아홉수의 저주에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지레 겁먹은 것이 머쓱하게 정작 아홉수는 아무것도 집어삼키지 않았다. 되려 아홉수라 행복했던 것들이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아홉수라는 무시무시함이 행복과 행운을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작년에 우연히 친구의 추천으로 읽었던, 범유진 작가의 「아홉수 가위」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 해 한 해 삶을 쌓아 9라는 숫자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누구든 대단하다.” 한 해 한 해 삶을 쌓았다니.. 지금까지 쌓아 온 0에서 8까지의 삶들이 두툼한 솜이불이 되어 나를 묵직하게 감싸는 듯하다. 내게 남은 9라는 숫자로 지난 10년을 어떻게 매듭지을 것인지 고민해 볼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저 문장의 의미는 충분하다. 어느 나이대의 아홉이라는 숫자는 그 시절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래성의 깃발과도 같은 것이다. 혹은 빼내고 쌓아 올리길 반복하는 젠가 제일 꼭대기의 나무막대기와 같은 것이다. 쓰러질 듯 말 듯 아슬아슬 불안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그 모습이 꼭 숫자 9의 모양을 닮았다.


0부터 9까지. 모든 걸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가도 한없이 꼿꼿해지고 그러다 구부러진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때론 죽일 듯이 미워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지난하게 애쓰다 금세 평안해진다. 이 행운이 영원할 것 같다가도 어느새 불안해지지만, 결국 모아 놓고 보니 그저 청춘이었다. 나의 20대는 그렇게 여물어갔다. 이제 또다시 모든 걸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은 0으로 넘어가 본다. 앞자리 숫자만 바뀌었을 뿐 새로운 모래성 쌓기가 시작된다. 스무 살에 그랬던 것처럼 어리둥절하고 낯설고 어색하지만 얼른 내 나이와 친해지고 싶은 그 마음을 만끽하러 간다.

아홉수를 떠나보내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끄적여 본다. 운동을 마치고 직접 운전해서 집으로 가던 순간, 목발 때문에 엄마랑 배꼽 빠질 듯이 웃었던 순간, 푸르공에서 책을 읽다 고개를 들었는데 눈앞에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던 순간, 처음으로 가족과 해외여행을 다녀온 추억, 고된 출장 중에도 나만의 힐링법을 찾았던 순간, 시간에 쫓기지 않고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던 순간, 사계절을 놓치지 않고 눈과 마음에 꾹꾹 눌러 담으려 했던 순간, 그리고 한 해를 돌이켜보니 지난 1년 참 옹골차게도 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이 순간마저. 모든 순간에 스물아홉이라는 옷을 덧입히자 한층 더 애틋하고 찬란한 행복으로 탈바꿈되는 걸 보니 이건 아홉수가 가져다준 행복임에 틀림이 없다. 한 해 한 해 쌓아 온 노련함을 지닌 아홉수라 행복했던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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