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리향과 할머니

by 영차영차

저희 본가 베란다에는

백리향 화분이 하나 있습니다


꽃 향기가 백리까지 간다고 해서

백리향이라고 부른다죠


백리향과 저의 인연은

외할머니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린이집에 다니던

혹은 그보다 더 어린시절

할머니댁에 있는 백리향의 존재를 인지했습니다


제 기억 속 '할머니댁 백리향'은

연보라색 꽃잎을 가득 달고 있는

수수하게 예쁜 꽃이었습니다


파스텔톤의 꽃잎들은

앙상한 가지를 잊게 만들만큼

아름다웠어요


저희 외할머니는 꽃, 나무, 선인장 등등

식물을 엄청 잘 기르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할머니의 관심을 듬뿍 받아

풍성한 꽃잎을 자랑했나봐요


볕이 드는 곳으로 화분 위치를 옮겨주고

분무기로 열심히 화분에 물을 주시곤 했습니다


반면 저희 엄마는 '파괴자'입니다

화분에 물을 꾸준히 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햇빛이 잘 드는 베란다 한 켠에

화분을 쪼로록 놓아두고

그저 생각날 때만 물을 주는 그런 분이죠


저희를 키우실 때도

한때 멍멍이를 키울 때도

한없이 우리의 성장을 바라보고

밥을 챙겨주고

예쁜 말들을 일삼았던 분이지만

그 애정이 식물까지는 가지 않았나봐요


저도 기억 안 나는

제가 학생 혹은 어린이였던 어느 순간부터

저희 집 베란다에도 백리향 화분이 들어섰습니다


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땐

때때로 핀잔을 주곤 하셨어요


백리향이 너무 앙상하다면서요


할머니댁에 있는 백리향은

꽃잎이 무성한데

저희 집 백리향은

꽃 개수도, 꽃잎의 풍성함도 훨씬 덜 했습니다


할머니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여름 어느 날

저희 곁을 떠나셨습니다


할머니가 떠나시고 난 어느 날

거실에 있던 아빠가

방에 있는 저희를 소란스럽게 부르더라고요


"백리향 꽃이 올해도 피었어!"


열과 성을 다해 키우지 않음에도

저희 집 백리향은

매년 꽃을 피웁니다


풍성하진 않더라도

소박한 꽃을 피웁니다


아빠가 우스갯소리로 그러시더라고요

"엄마가 꽃을 잘 못 키우니까

할머니께서 보살펴주시는 것 같아."


기억이 흐려져서

아빠인지 엄마인지

이 말씀을 누가 하셨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암튼 두 분 중 누군가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할머니가 우리집에 오신 기분이야"


라고요.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그런 대화를 나눈 이후에

두 분은

전보다는 조금 더 많이

백리향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할머니는 고관절이 많이 안 좋으셨습니다

수 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하시다 돌아가셨어요

코로나로 인해 저희를 많이 볼 수도 없고

집에도 가기 어렵게 되자

"집에 가고 싶다"고 맨날 말씀하셨어요


비록 늦었지만

백리향의 향기를 타고서

저희 집에서 조금 더 머물다 가셨으면 좋겠어요


할머니가 그토록 오고 싶던 '집'

집으로 오는 길에

'향기의 길'이 깔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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