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조선인들이 유카탄 반도에 도착한지 이년의 시간이 벌써 흘러갔다. 억척스럽게 일을 하여 빚을 거의 갚아 나가고 있는 조선인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그들의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의사와 약이 그들에게 필요하였지만, 농장 안에서만 거의 생활하여서 멀리 메리다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매점에서 약을 비싸게 팔았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하지만 샀다가는 다시 빚의 더미 속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었다. 스페인어가 서투른 조선인들은 농장을 탈출하여 멕시코의 다른 지역으로 도망간다는 것도 쉽지가 않았지만, 너무 힘든 현실에 큰마음을 먹고 도망갔다가 잡혀 오는 날에는 농장의 멕시코 감독관과 부하들에게 엄청나게 구타를 당했고, 몇 주 동안 창고에 갇혀 있다가 풀려 나와야 했다. 이러한 구타는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심심찮게 발생하였고, 동물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조선인들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빚이 늘어 가고, 농장의 일이 힘든 것은 더 열심히 일하면 빚을 갚고, 돈을 벌어 농장을 떠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참을 수 있었지만, 채찍을 맞는 일은 조선인들을 충분히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유카탄 반도의 곳곳에 위치한 아시엔다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들은 너무나 힘든 현실로 인해 농장주와 그 부하들에 대한 적개심이 커져만 갔다. 몇몇 농장에서는 조선인들이 조직적으로 뭉쳐 농장주에 대한 거센 저항이 시작되고 있었다. 봉수가 속해 있었던 아시엔다의 주인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하여 독신 남성 조선인들을 거의 뽑아 갔는데, 이들 중에는 조선의 퇴역군인들이 상당수 들어 있었다. 일본에 의해 조선의 군인들이 무장해제 당하여 그들은 군대를 떠나야 했고, 더 나은 기회를 찾다가 제물포에서 배를 탔던 것이다. 그들은 신식 총기를 다룰 수 있었고, 지휘자가 정해지면 그의 명령에 따라 빠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봉수. 자네는 농장 안에 있는 창고에 불을 지르면 되는 거야. 그러면 거기로 저 놈들이 달려 갈 것이고, 창고 주위에 모두 몰려 들면 우리가 한꺼번에 달려 들거야.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야 하네."
봉수는 대장의 말을 침을 삼키며 듣고 있었다.
"네. 지는 그저 불만 지르면 되는 거네요. 잉."
"우리 중에 무술에 능한 자도 있으니, 일단 먼저 도착하는 놈들부터 기회를 봐서 때려 눕힐 걸세. 그리고 무기를 뺏고 다음에 도착하는 놈들을 총으로 위협해서 잡아 나가는 거야. 우리가 군인 이였다는 것을 저 놈들이 아직 모르니까, 우리가 공격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할 거야."
다음 날, 농장의 창고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시뻘건 불길이 보이자, 농장의 멕시코인 들은 거기로 달려갔고, 창고로 가는 길목에 숨어 있던 날쌔고 발차기 기술에 능한 조선인들에게 하나 둘 씩 제압을 당하였다. 마지막으로 멕시코 감독관이 도착하자, 총을 든 조선인들이 그를 에워 샀다. 잠시 후에 멕시코인 들을 모두 묶은 후에 농장주의 저택으로 몰려갔다. 놀란 농장주는 가족을 데리고 피신하였지만, 이미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조선인들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이 모든 광경을 마야인 들은 놀라며 구경하고 있었다.
"길수네 집 아들이 스페인어를 좀 하죠? 빨리 가서 데리고 와요. 일이 이렇게 빨리 성공할 줄은 우리도 예상을 못 했소!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승부를 내야 하오."
길수네 집 아들은 급하게 와서 농장주와 조선인 대장 사이에 통역을 맡았다.
"얘야. 내가 하는 말을 농장 주인에게 가능한 정확하게 전해라. 우리는 당신과 가족들을 죽이거나 당신 집안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려고 이런 게 아니오. 우리는 개와 돼지 같은 짐승들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전하려고 하오. 그동안 당신 부하들이 우리를 얼마나 때리고 업신여긴 것을 당신은 제대로 모를 수도 있을 것이오. 첫 번째, 우리를 절대 때리지 마시오. 둘째. 우리는 사년동안 여기서 일하기로 계약을 하고 왔지만, 여기 매점의 물건 값이 너무 비싸서 빚만 늘어나고 있소. 그 동안 우리가 알아 본 결과, 매점의 물건 값이 메디아에서 살 수 있는 값에 비하여 4~5배 비싸다는 것을 알게 되었소. 메디아에서 파는 가격과 똑같이 매점의 물건 값을 맞추시오. 세 번째, 그 동안 우리에게 팔았던 물건 값을 다시 계산하여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시오. 이 빚으로 인하여 우리는 당신의 농장을 떠날 수 없고, 영원히 이 농장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앞으로 여러 조건을 더 말할 터인데, 지금까지 말한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오."
농장주는 조선인의 말이 통역되는 동안 찬찬히 듣고 있었다.
"나는 너희 조선인들을 머나먼 멕시코까지 데려오는 모든 비용을 지불했다. 그래서 매점 물건 값을 비싸게 받을 수밖에 없다."
농장주는 조선인의 요구에 대하여 우선 이렇게 답을 하였다.
"우리를 개, 돼지처럼 때렸던 것을 알고 있었나?"
"그렇게까지 심한지는 사실 모르고 있었다. 여기 멕시코에서는 흔한 일이다. 조선인들에게만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 맞으며 일을 하라는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때리지 않도록 내가 조치하겠다."
"알겠다. 그러면, 매점의 물건 값은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부터는 매점의 물건 값은 다시 조정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지나간 시간동안 너희들이 사먹고 한 값은 나도 양보할 수 없다. 그건 좀 전에 말했 듯이 내가 너희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오면서 지불한 돈에 대한 것이다."
여러 차례의 대화가 오고 갔고, 결국은 조선인에게 멕시코인 들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매점의 물건 값을 내리는 점에 대해서 최종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농장주는 뜻밖의 사태가 비폭력적으로 하루 만에 해결되었기 때문에 우선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분고분하게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 마야인 들에 비하여 조선인들은 조직적으로 저항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사항은 앞으로 남은 시간에 그들이 일하여 벌어 줄 돈과 매점 값을 내려 줌으로써 줄어 드는 돈을 비교하면 조선인들이 벌어 줄 돈이 훨씬 많았으므로 그렇게 손해가 되지 않았다. 앞으로 이년 정도 남은 시간동안은 조선인들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나가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 농장을 위해서도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문은 다른 농장주들과 조선인들 사이에도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농장마다 그러한 변화를 어떻게 이루어 나가냐는 것이었다. 몇몇 농장은 유혈 충돌이 발생해 경찰이 출동하여 조선인들이 잡혀 가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농장은 마야인 들과 조선인들이 모두 가세하여 저항의 불길이 더 크게 일어났다. 유카탄 지역에서 번져 나가는 폭동의 불길 속에서 농장주들은 저마다의 선택을 하여야만 했던 것이다. 명학이 속한 아시엔다는 겉으로는 아무런 저항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유카탄 지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을 조금씩 듣고 있었다.
"우리도 뭔가 조치를 해야 되지 않아요?"
"근데, 저 감독관이 무슨 허튼 수를 부리면 바로 즉석에서 총질을 할 기세인데..."
"누가 죽어야 해결이 되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다른 방법이 없을까?"
"명학이가 요즘은 농장 주인에게 가서 소리를 들려주고 있으니 우선은 명학이를 시켜서 농장 주인에게 바로 얘기해 보는 것도 방법이 아니겠소?"
명학은 몇 달 전부터 농장 주인에게 가끔씩 가서 조선의 소리를 들려주고 돌아오곤 했다. 마야인 들과 조선인들이 충돌하지 않게 되자, 두 마을 사이에 정기적으로 잔치가 벌어졌고, 음악이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농장 주인이 듣게 되었던 것이다. 마야인 들의 음악은 조선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들었던 까닭에 그는 조선의 소리를 한번 제대로 듣고 싶었다. 그래서 명학을 집으로 부르게 된 것이었다.
"자네가 한번 주인에게 말을 해 보게. 우리도 이년 후에는 이 농장을 떠나야 되지 않겠나? 지금 이런 조건으로 일하다가는 영락없이 평생 이 농장의 노예로 살게 되는 거야."
명학은 눈을 감고, 마을 사람들의 여러 얘기를 귀 담아 들었다. 그리고는 한 달 후에 농장 주인의 집에 가게 되는 날에는 어떻게든 조선인들의 얘기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적벽가의 한 대목을 구슬프게 들려 준 뒤에, 명학은 농장 주인에게 말을 하였다.
"그 동안 저를 댁에 직접 불러 소리를 들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농장주인은 벽난로를 배경으로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궐련을 피우고 있었고, 명학의 소리에 오늘도 만족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말해 보게. 자네가 원하는 것이면 가능한 들어 주지. 나는 음악을 하는 자는 최대한 존중해 주는 편이지."
"아. 오늘 드리는 말씀은 저의 부탁이 아니라, 마을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입니다."
"아. 그런가? 무슨 내용인가?"
"저희가 조선에서 여기까지 사년 계약을 맺고 주인님의 농장에 일을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벌서 이년 넘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이 농장에서 일하면서 주인님과 정도 많이 들었구요. 하지만, 저희들은 조선에서 일할 때 보다 더 돈을 벌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시겠지만, 모두들 빚만 늘었고, 사년 계약이 끝나는 때에는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여기 농장일이 만족스럽지 않은가?"
"저희 조선인들은 목표가 있기 때문에 모두들 주인님의 농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빚이 늘고 돈을 모을 수 없다는 현실에 모두들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점의 가격을 낮춰 주시기 바랍니다."
"음. 다른 농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조선인들도 듣고 있었구먼. 언젠가는 나도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 조선인들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네. 아무튼, 나는 음악을 존중한다네. 그래서 음악을 하는 사람을 최대한 챙겨 주는 편이지. 다른 농장처럼 총과 칼을 들고 나에게 던비는 것이라면 나도 총으로 답을 하겠지만, 자네와 같은 음악인이 나에게 오늘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는 점에 대해서 나는 무척 만족스러워. 안 그래도 조선인들을 멕시코까지 데려왔던 비용은 이제 충분히 메워졌지. 이제부터는 자네의 제안대로 물건 값을 내리도록 하지. 그게 조선인들에게 일할 의욕을 더 높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내 부하들이 자네들을 무례하게 구는 것은 말이야. 저 자들이 자기 하는 일에 너무 책임감이 강해서 그런 거야. 오랫동안 여기 유카탄 반도에서 원주민들을 다스려 온 방식이네. 하지만, 매질하는 것은 조선인들에게 적개심만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다른 농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서 충분히 증명이 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네. 내가 부하들에게 충분히 이해가 되도록 얘기를 하지. 그리고 말이야. 마을에 돌아가기 전에, 지난번에 불렀던 소리를 다시 한 번 들려주겠나? 조선의 소리가 처음에는 듣기에 어색하지만 자꾸 들으면 은근히 중독이 되는 것이 있어. 지난번에 불렀던 대목이 뭐였는지 나는 모르지만, 자네는 기억하리라 믿네."
뜻밖으로 수월하게 일이 풀려 버리자, 명학은 마음속에서 짠한 감동이 몰려왔다. 자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음악으로 소통을 하고 또한 음악이 바탕이 되어 그의 마음이 움직이게 된 점에 감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심청가 중에서 소리의 마지막 대목인 심봉사 눈뜨는 부분을 천천히 부르기 시작하였다.
시간은 계속 흘러서 조선인들이 유카탄 반도에 도착한지 사년이 되었다. 사년계약이 끝나게 되었고, 돈을 모두 갚은 조선인들은 자유노동자의 신분이 될 수 있었다. 조선으로 갈 비용을 마련한 아주 극소수의 조선인들은 고향의 방향으로 아주 먼 길을 떠나기 시작하였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그들이 사년 동안 살았던 농장을 떠나느냐 아니면 계속 남아 있느냐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아직 스페인어가 서투른 이들에게는 그 동안 살았던 농장을 떠나 멕시코의 다른 지역으로 간다는 것은 큰 모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수가 그 동안 일했던 아시엔다에 잔류하거나 아니면 유칸탄 반도의 근무 조건이 더 나은 아시엔다로 이동하여 농장 일을 계속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한편, 다른 조선인들은 스스로의 운명의 주사위를 던진 채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가까이는 메디아 혹은 인근의 프로그레소와 같은 항구지역으로 가서 다른 일거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명학도 사년 만에 만난 봉수와 함께 농장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마차에 실려 멀리 떠나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며 농장주인은 말에 탄 채 모자를 흔들며 말했다.
"자네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리고 어디에 있든지 음악이 주는 즐거움과 힘을 잊지 말기를~"
그들은 다시 정처 없이 떠나가기 시작하였다.
라밤바
유카탄의 대농장을 떠난 명학과 봉수는 메디아에 도착하였다. 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십대의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머나먼 타국에서의 힘들었던 기억들로 인하여 마음은 많이 움츠러 들어 있었다. 지난 날, 프로그레소 항구에 내려 기차를 타고 메디아에 도착했을 때는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으나 이미 그 시간은 지나가 버렸고, 지금 이 순간은 아시엔다에서의 노예와 같은 처지에서 벗어난 자유인이었지만 오히려 그 자유가 어색하고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 동안 시키는 일만 하면 되었고, 힘든 시간들 중에서도 매일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목표는 빚을 갚아서 어서 빨리 농장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힘들게 얻게 된 자유였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하여 뚜렷한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봉수형. 우리 이제 앞으로 뭐 하면서 살면 되는 거지? 좀 앞이 캄캄해. 무작정 농장을 나오기는 했지만 말이야. 하긴, 나는 거기 계속 남아 있기는 싫더라고. 차라리 다른 곳에서 굶어 죽을 지언정."
"어따. 언젠가는 조선으로 돌아가야 되지 않겠냐? 내가 명학이 네가 걱정이 되어서 너 농장에 갔던 거여. 너는 성격이 여려서 내가 너 찾으러 안 갔으면 너는 어쩌면 거기 계속 눌러 앉아 있어지라이."
"형이 나 찾으러 우리 농장에 왔을 때 어찌 되었던 간에 저는 봉수형 따라 가려고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언젠가는 조선으로 돌아가야겠지만, 지금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조선에 갈 배도 탈 수 없지 않아요?"
"뭐. 설마 굶어 죽기는 하겄어? 앞으로 돈 벌어서 고향에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일단 살아 보자. 농장에 같이 있었던 형님들이 여기 메디아에 먼저 도착해서 계시거든. 내가 그 분들 있는 곳을 조만간 알아 낼텡께. 너는 이 형만 믿고 따라 와라. 근데. 배고프다. 우선 뭐라도 좀 사 먹자."
그들은 차이나타운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국인들이 하는 식당에서 밥을 사 먹은 후에 그들의 허름한 여관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그들이 유카탄의 농장에서 왔다는 것을 아는 듯 했고, 처음에는 행색이 초라한 그들을 업신여겼으나, 밥값과 여관비를 지불하자 이내 손님대접을 해 주었다.
"혹시 우리 말고 조선인들 보셨소?"
명학과 봉수는 스페인어와 중국어를 최대한 섞어 가며 차이나타운의 중국인들에게 물어 보고 다녔다. 그러다가 조선말을 할 수 있는 중국인을 운 좋게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하여 봉수와 같은 농장에 있었던 조선인들을 찾을 수가 있었다. 군인 출신이었던 그들은 농장을 떠난 이후에도 같이 몰려다니고 있어서 중국인들의 관심을 받았던 것이었다.
"조선인들이 여기 메디아까지 나와서는 하나둘씩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지고 있다네. 그리고 아직 아시엔다에 남아 있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그 사람들도 이제는 농장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일을 해 주며 돈을 번다고 하더군."
"스페인어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도 많이 생겼으니, 충분히 옮겨 다녀도 되지 않겠어요?"
"그렇지. 우리야 이제 농장을 떠났으니 말이야. 근데, 우리들이 알아보니까, 여기 메디아 보다는 돈을 벌려면 베라끄루쓰까지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거기가 아주 큰 항구여서 우리가 일할 자리가 많을 거라고 들었어."
"그러면 형님들은 언제 거기로 가실 거여?"
"아. 우리는 여기서 좀 더 있을걸쎄. 미국의 한인회에서 올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거든. 자네들이 먼저 베라끄루쓰로 가 보게. 이제는 스페인어로 얘기가 통할 테니까 거기서 일자리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거야. 가서 자리를 잡으면 편지로 안부 전해 주게. 여기 여관으로 보내면 될 거야."
"조선으로 돌아 갈 여비를 마련하려면 거기로 가서 돈을 벋어야겠네요."
"몇 달 전에 여기 메리다에서 베라끄루쓰로 간다고 떠난 조선인들이 몇 명 있었네.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타국에 나와서는 서로 도와야지 살아남을 수가 있지."
식탁 위에 놓인 독한 중국술을 마시며 그들은 얘기를 나누었다. 독주의 기운이 명학의 목구멍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며 몸 안을 뜨겁게 채워 주었다.
명학과 봉수는 배를 타고 베라끄루쓰까지 이동하였다. 삼등석 칸에 있는 멕시코인 들과 같이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다보았다. 사년 전에 이 뱃길을 이용하여 프로그레소 항구로 왔고, 다시 열차를 타고 메디아로 이동하였고, 거기에서 농장으로 가서 사년 동안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 감회가 깊었다. 하지만, 조선은 여전히 지구의 반대편에 머나 멀리 자리 잡고 있었다. 언젠가는 우리가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태평양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으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멕시코 만을 바라다보고 있는 베라끄루쓰는 미국, 쿠바를 비롯한 카리브 해 연안의 섬들, 그리고 유럽과 남미로 향하는 뱃길이 시작되는 곳이었으므로 항구는 항상 드나드는 배들로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도시의 분위기는 활기가 넘쳤다. 도시 곳곳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특히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주일을 여관에서 지낸 후에 명학과 봉수는 우연히 항구에서 육체 노동일을 하는 일자리를 구할 수가 있었다. 둘은 매일 일하고 받는 돈을 조금씩 모아 가기 시작하였다. 쥐들이 들락거리는 아주 더럽고 오래된 건물 속에 위치한 허름한 방이었지만 그들은 언젠간 돈을 모아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며 살기 시작하였다.
모처럼 휴일을 가지게 된 그들은 어느 일요일에 시내로 가서 도시 구경을 시작하였다.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거기로 걸어가서 멕시코인 들과 섞여서 음악밴드의 거리공연을 보게 되었다.
"띵띵띵띵 띵띵띵~"
줄이 많이 달린 커다란 악기가 광장바닥 위에 세워져 있었고, 그 수많은 줄을 한 남자가 빠르게 연주하며 소리가 시작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다른 줄 악기들을 든 남자들이 소리에 섞여 들어오며 같이 연주에 동참하였다. 소리의 흐름이 아주 빨랐고 듣는 사람을 흥겹게 해 주었다. 어느 구간에서는 나팔 같이 생긴 것을 든 사람이 소리에 들어왔고, 다른 이들은 그 나팔수를 위하여 연주 소리를 약간 낮춰 주는 듯 했다. 나팔수의 멋진 연주가 멈추자, 나머지 사람들은 앞에 연주했던 소리들을 다시 한 번 한참을 연주하며 소리를 이어가서는 마지막에는 차츰 잦아들며 소리를 멈추었다. 소리에 맞추어 젊은 남자와 여자 무용수들이 서로 짝을 맞추어 신나게 춤을 췄지만, 명학은 춤을 구경하기보다는 그 소리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으며 그 흐름과 장단이 조선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자신도 모르게 찾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우와. 명학아. 여기 소리는 마야인 들과 다르게 엄청 신나고 빠르다. 저 깽깽이 소리 같은 게 줄을 당겨서 나오는 것 같은데, 줄 악기들도 소리가 저마다 다르게 나오네."
"봉수형. 턱에 괴어서 연주하는 저 작은 줄 악기는 바이올린이라고 해요. 농장에 있을 때 본 적이 있어요. 서양인들 악기라고 하더라고요. 몸 앞에 대고 손으로 뜯는 악기는 기타라고 해요. 멕시코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 같더라고요."
"근데, 저 커다란 줄 악기는 뭐여? 너무 커서 바닥에 세워 놓고 줄을 뜯어서 소리를 만드네."
"농장 주인집에 갔을 때 저 악기도 봤는데, '아르파'라고 부르더라고요. 서양인들은 하프라고 하는데, 멕시코에 와서는 약간 모양이 바뀌었다고 하네요. 비파처럼 생겼는데, 크기가 더 크네요."
"조선에서도 가야금, 아쟁 같은 줄 악기들이 있는데, 여기는 줄 악기로 많이 연주를 하는 모양이다. 근데, 저 나팔은 앞으로 길쭉하게 생긴 것이 엄청 신명나게 소리가 나오네."
"아. 저것은 트럼펫이라고 부르더군요. 피리처럼 악기 속으로 바람을 불어 넣으면 통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인데, 아주 높게 음이 나오더라고요."
"아따. 명학이 너는 그 농장 주인집에 가서 노래하면서 멕시코 악기들 많이 구경한 모양이구나."
"농장 주인에게 제가 조선의 소리도 들려주었지만, 다른 음악회가 있으면 주인에게 부탁하여 다른 소리를 구경하러 갔었죠. 그때 서양악기들 많이 알게 되었죠."
"근데, 방금 연주한 소리는 이름이 뭐던가? 아직까지도 귀에 소리의 장단과 가락이 맴돌고 있다."
그들은 옆에 서 있는 멕시코인 들에게 노래의 제목을 물어 보았다.
"방금 연주한 노래의 이름이 뭐죠?"
"라밤바"
그는 쾌활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여기 베라끄루쓰 지방의 오래된 노래이고 아주 유명하지. 베라끄루쓰 지방 노래를 우리는 '손 하로초'라고 부르지. 라밤바는 손 하로초의 노래 중에서 아주 유명한 곡이야. 노래할 때 춤추는 사람들 봤어? 결혼식에 신랑과 신부가 추던 춤에 라밤바가 연주되지. 그런 것을 방금 전에 춤으로도 공연했던 거야."
# 멕시코 베라끄루쓰 지방의 전통 라밤바
# 록버전으로 편곡하여 세계적 히트를 한 라밤바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 악단들은 아주 연주를 잘 하네요. 베라끄루쓰에서 유명한 악단인가 보죠?"
"아. 저 정도면 나쁘진 않지. 우리 멕시코인 들은 음악을 좋아하지. 우리는 저런 악단들을 '마리아치'라고 부르지. 우리들에게 아주 즐거운 음악을 연주해 주는 사람들이야. 아주 훌륭한 마리아치는 멕시코시티에 많지만 저 친구들도 제법 괜찮게 하는 편이야."
"저렇게 연주하는 사람들을 마리아치라고 부르는군요. 암튼 설명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하하. 자네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말투를 보니 외국 사람들이군 그래? 중국인인가?"
"아니오. 저희는 조선인입니다."
"조선인? 처음 듣는군. 아무튼, 자네는 우리 멕시코인 들처럼 음악을 좋아 하나 보군 그래? 이렇게 많이 묻는 걸 보니까."
"네. 저희들은 음악을 좋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음악을 했습니다. 멕시코 음악은 저희의 것과 많이 다르지만, 아주 신이 나고 매력이 있습니다."
"아. 그래? 그러면, 저 마리아치들 따라 다니면서 배워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 저 친구들은 매주 일요일에 광장에 나와서 연주하는 친구들이니까, 한번 부탁해 봐. 어쩌면 들어 줄 거야. 하하하!"
그는 호탕하게 웃고 나더니, 가족들과 자리를 떠났다.
명학과 봉수는 매일 항구에서 짐을 옮기며 돈을 벌고 있었지만, 그날 봤었던 마리아치가 연주한 라밤바의 장단과 가락이 그들의 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야. 명학아. 저 사람들 소리를 우리도 배울 수 없을까?"
"그러게요. 조선의 소리와는 아주 다른데, 한번 제대로 배워 보고 싶네요. 여기 악기는 줄 악기가 많아서 소리가락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말이다. 저번에 갔던 시내 광장에 다시 가게 되면 한번 큰마음 먹고 마리아치인가 뭔가 하는 그 사람들한테 가 보자. 네가 나보다 멕시코 말이 더 나으니까. 니가 한번 말을 걸어 봐라."
"형과 나는 조선에서도 풍물패에 끼여서 몇 년을 삶았잖아요? 저 사람들도 그때 우리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같던데. 그래요! 다음에 그 사람들 만나면 한번 말을 걸어 볼게요."
다음 달에 시내광장에 다시 갔을 때, 그 마리아치는 연주를 하고 있었고 그들의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연주하던 사내들은 그날 벌어들인 돈을 챙기고 나서는 악기들을 가방 속에 담고 있는 중이었다. 명학은 그 중에서 우두머리인 듯 한 사람에게 다가가 음악을 배우고 싶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하하하! 우리에게 음악을 배우겠다고?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여 마리아치가 되었어. 너희가 지금 시작해서 언제 제대로 연주를 하겠어? 그리고, 너희는 아직 스페인어도 서투르고 말이야."
"선생님들 무리에 끼여 배울 수 있다면 뭐든지 시키는 일을 하겠습니다. 저희도 멕시코 오기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음악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저희가 했던 소리와는 많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저희들은 소리의 장단과 가락에 익숙한 편입니다. 멕시코 소리들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저희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그것을 배울 기회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지요."
마리아치의 우두머리는 다른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 이봐. 이 중국 놈들이 우리에게 음악을 배우고 싶다는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희 중국인들은 우리 음악을 배울 수가 없어. 그러니, 너희들이 사는 동네로 다시 돌아가!"
다른 동료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면서 차갑게 대답하였다.
"들었던 음악이 귀에 맴돌며 떠나지 않으며 그것 때문에 잠 못 드는 밤들을 보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그 소리를 배워 보고 싶어서 집을 떠나서 멀리멀리 가 본 적이 있습니까? 저희들은 우리나라에서 그랬기 때문에 어려서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돌며 소리를 오랫동안 배워 왔고, 다른 사연들이 있어서 지금 이곳 멕시코까지 흘러와 있는 것입니다."
비웃고 있는 멕시코인 들을 바라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 깊이 담고 있었던 말을 해 버렸다. 그의 말에 마리아치들은 갑자기 조용해지며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빠른 스페인말로 얘기를 한참동안 주고받았다. 말이 너무 빨라서 명학과 봉수는 거의 알아 듣지를 못하였다.
잠시 후에 마리아치의 우두머리는 그들에게 돌아 섰다.
"너의 마지막 말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어. 우리들도 한때 음악에 미쳐서 어렸을 때 집을 떠나 마리아치에 들어와서 생활했지. 우리가 어렸을 때 계셨던 분들은 이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우리를 가르쳐 주신 분들이었지. 마리아치로서 생활한다는 것은 아주 힘들 단다. 일단 들어와서는 바로 음악을 배우지는 못해. 아주 허드레한 일부터 시작해서 몇 년을 보내다가 겨우 제대로 음악을 시작하게 되지. 우리의 소리에 귀가 익숙해질 때까지 말이야. 일단 너희들은 말이야. 뭐 하면서 지내는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너희가 하는 일을 하면서 일단 먹고 살아라. 그리고 시간을 내어서 자주 우리한테 와서 우리 일을 도와주며 음악을 배우는 게 나을 꺼다. 솔직히 우리가 사는 것도 힘들기 때문에 너희를 거두어 주는 것은 어려워."
명학은 자신이 알아 들었던 말을 봉수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려. 소리로 밥 벌어먹고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우리가 잘 알제. 우리는 우리 일 하면서 살다가 여기 한 번씩 와서 이놈들 하는 일도와 주며 천천히 멕시코 소리들을 한번 잘 배워 보자."
명학과 봉수는 그 후로 부두에서 일이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마리아치를 찾아와서 그들의 일을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같이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 오랫동안 풍물패 생활을 했던 점은 마리아치와의 생활에서 많이 도움을 주었다. 남자들이 모여 있는 집단에서 음악을 배우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눈치껏 미리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들의 빨래도 대신 빨아주는 등 허드렛일부터 직접 해 주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환심을 얻어 가기 시작하였다. 줄 악기의 가락들을 지겹도록 들으면서 그 소리를 귀에 익혀 나갔고, 틈틈이 줄 악기를 연주하는 방법도 배우기 시작하였다. 명학은 마리아치의 노랫소리를 배우면서 조선의 소리와는 다르게 몸통을 울리게 하여 소리가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노래 창법을 조금씩 배워 나갔다. 조선의 판소리와는 창법이 많이 달랐지만 목에는 덜 부담을 주는 것 같았다. 오히려 판소리를 선생님에게 배웠을 때보다 더 빠르고 수월하게 적응해 나갈 수가 있었다.
부두에서 일을 하는 시간 이외에는 마리아치들과 생활하면서 보내는 베라끄루쓰에서의 시간들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