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까_9편. 검은 눈물, 엘 마니세로

음악장편소설

by 김주영

검은 눈물


"노래 부르고 있었던 사람들이 당신들이었어요?"


누군가 뒤에서 그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들려왔다. 잠시 쉬고 있었던 명학과 봉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 쿠바인 남자가 서 있었고, 그는 언덕을 바삐 올라 왔었는지 다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맞아요. 여기 언덕 위에 우리 밖에 더 있어요? 저희가 시끄럽게 했나요? 노래는 충분히 불렀으니 조용히 있다가 내려 갈 예정입니다."


"아니오. 노랫소리가 시끄럽다는 말을 하려고 올라 온 것이 아닙니다. 어느 분이 시켜서 여기에 올라 왔어요. 그 분이 저더러 올라가서 누가 노래를 했는지 알아보고 가능하면 본인에게 데려오라고 부탁을 했거든요."


명학과 봉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군지 알고 싶으면 지가 직접 올라 올 것이지, 뭐땀시러 사람을 시켜 올려 보냈당가?"


"그러게요. 이 사람 얼굴을 보니 급하게 올라 온 모양이네요."


"그리고 자기에게 직접 와 보라는 거는 뭐여? 궁금하면 지가 몸소 와 보면 될 것이지?"


"우리가 조금 있다가 내려가야 되긴 하잖아요? 지금 내려 가 보죠. 봉수형!"


둘은 그 남자를 따라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내려가는 방향은 조선인 마을 쪽이 아니라, 농장주의 저택이 있는 곳이었다. 평지로 내려와서 조금 더 걸어가니 큰 나무 밑에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덩치가 큰 흑인남자를 중심으로 몇 명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명학과 봉수를 데려 온 남자는 선글라스를 낀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멈추었다.


"로드리게스씨. 말씀하신 데로 저 언덕 위에서 노래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데려 왔습니다."


"고맙네. 생각보다 빨리 데리고 왔군."


그는 심부름을 한 남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나서는 말을 이어 나갔다.


"안녕하세요? 나는 로드리게스라고 합니다. 내가 여기 마딴사스 농장에 아는 지인이 있어서 왔다가 우연히 이곳을 산책하고 있었소. 그런데, 언덕 위에서 노래가 들리더군요. 쿠바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아니었소. 혹시 누가 노래를 하고 있었죠?"


"네. 저희가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안드레아라고 합니다. 저와 같이 노래한 사람은 미구엘 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안드레아씨는 쿠바인이 아니신 것 같은데, 어디 출신이죠?"


"저희들은 꼬레아에서 왔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나라인데, 잘 모르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꼬레아는 제가 들어 본 적이 없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워낙 멀리 있는 나라인걸요."


로드리게스의 눈은 시커먼 선글라스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안드레아 쪽을 계속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부르고 있었던 노래는 꼬레아의 것인가요?"


"네. 맞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노래 중 하나입니다."


"노래가 한참을 이어지는 것을 보니 제법 긴 노래인 것 같네요. 쿠바 음악과는 많이 다르지만, 꽤 들을 만 했어요. 옆에 같이 있었던 미구엘 씨는 코러스처럼 사이사이에 소리를 넣어 주던데, 주된 가수는 안드레아씨였죠?"


"네. 정확하게 들으셨습니다."


"안드레아씨는 음색이 고우면서도 창법이 쿠바에서는 좀 찾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게 나오더군요. 혹시 쿠바 노래 중에서 아시는 것이 있으면 한곡 부탁드려도 될까요?"


명학은 바로 대답을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로드리게스는 눈치 채고 다시 말을 하였다.


"내가 처음 보는 분에게 무례하게 부탁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저도 음악을 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노래를 한번 들어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무 노래라도 좋으니 한곡 부탁드립니다."


명학은 잠시 생각을 하고 나서는 라디오에서 많이 들어 봤던 노래 중에서 한 곡을 선택하였다.


"옆에 계신 친구 분들이 가지고 있는 악기들을 잠깐 사용해도 될까요?"


"네. 사용하세요."


명학은 봉수에게 봉고 연주를 부탁하고, 자신은 기타를 들었다. 둘은 의자에 앉아서 자세를 잡고는 "손 데 라 로마"(그들은 언덕에서 왔어요)라는 노래를 시작하였다.


"저 가수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어요.


그들은 매우 매력적이네요.


그리고 환상적인 그들의 노래를 배우고 싶어요.


매력적인 노래를 하는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어요.


....


하바나에서 왔을까요?


산티아고에서 왔을까요?


매력적인 곳


그들은 언덕 지역에서 왔고 평원에서 노래하죠.


...."


명학은 전주곡을 기타로 치면서 노래를 시작하였고 가사들을 반복하며 끝까지 불렀다. 봉수는 명학의 기타에 박자를 맞추며 봉고로 맛깔스러운 리듬을 계속 넣어 주었다. 명학의 쿠바 노래는 어느 순간 잦아들며 멈추었다.


https://youtu.be/LfdwBDo2jqA


"대단하군요. 쿠바인들이 아닌데, 이렇게 우리 노래를 잘 부르다니... 그리고 안드레아씨의 독특한 창법으로 이 노래를 잘 소화했군요. 혹시 내가 안드레아씨의 목을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명학은 당황하였다. 그러자 로드리게스는 말했다.


"아. 나는 장님이오. 그래서 이렇게 밤에도 시커먼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앞을 보지 못 한 것은 아니었고, 어렸을 때 있었던 사고 이후에 점점 시력이 나빠지다가 나중에는 앞이 완전히 보이지가 않게 되었소."


"아. 저는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니오. 미안할 것 없습니다. 안드레아씨 책임도 아닌걸요."


로드리게스는 안드레아의 얼굴에 천천히 손을 대어서 이마, 눈, 코, 입 부분을 주의 깊게 더듬어 보더니 목을 한참동안 만졌다.


"제가 안드레아씨를 볼 수는 없지만, 얼굴이 잘 생겼군요. 그리고 목을 만져 보니, 노래 부르는 것은 타고 난 것 같습니다. 여기 마딴사스에서 일을 하고 있으신가요?"


"네. 저희들은 멕시코에서 쿠바로 일하러 왔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하바나에서 전문적으로 음악밴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생각해 보고, 기회가 되면 나를 한번 찾아오세요."


그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명학에게 주었다. 종이에는 하바나의 어느 곳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는 의자에서 큰 몸을 일으키더니 옆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농장 주인의 저택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잠시 후 숲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무슨 일이냐? 한밤중에 귀신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여? 근데, 너 좀 전에 쿠바 노래 엄청 잘 하더라? 평소에 연습 좀 했냐?"


"라디오에서 자주 나오길래, 자연스럽게 노래 전체가 외워지라고요. 리듬과 멜로디가 좋아서 혼자서 연습을 했어요."


"그랬구나. 어쩐지... 종이에는 뭐가 적혀 있냐?"


"하바나의 저 분 주소인 것 같아요."


"언제 한번 하바나에 가게 되면 찾아 가 봐라."


"찾아 가더라도 봉수형과 같이 가야죠. 우리 이참에 하바나로 옮기는 걸로 아예 결정해 버릴까요?"


"그려. 우리야 어디로 가든지 그게 우리 집 아니겄냐? 하늘 아래 어느 곳에든지 몸을 누이면 그 곳이 우리 집이 되는 거지. 그렇게 살아 왔지 않냐?


명학은 로드리게스가 적어준 종이를 다시 한 번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숲을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카리브 해의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은 하늘 위에 또 하나의 거대한 바다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오늘 밤에 로드리게스에게 불러 주었던 노래처럼 그들은 정말 언덕 위에서 내려 왔고, 그 덩치가 큰 쿠바인은 그들의 노래를 좋아했었던 것이다.



"하바나는 여기에서 먼가요? 저희들은 거기로 가려고요."


"하바나로 간다고? 거기는 에네켄 농장이 없잖아? 거기서 뭐로 돈 벌려고?"


"하바나가 항구도시라고 들었어요. 저희도 멕시코에 있을 때 베라끄루쓰에서 10년 넘게 지냈는걸요. 아마 먹고 사는 게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거기에는 조선인들이 살고 있어도 아마 몇 명 되지 않을 거야. 하바나로 먼저 간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없을걸."


옆집에 살고 있는 노인이 명학과 봉수를 보며 걱정되는 듯이 말하였다.


"그래도 자네들 표정을 보니까 이미 결심이 서 있는 것 같군. 나는 조선에서도 농사를 지었고, 멕시코에서도 쿠바에서도 땅에서 자라는 저 에네켄을 자르는 일을 하며 평생을 살아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꿈을 못 꾸는데, 자네들처럼 배짱 있는 사람을 보니 부럽기도 하군 그래."


"저희야. 뭐 아직 처자식이 없으니 홀가분하죠. 이제는 젊은 나이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몸 쓰는 일을 할 수 있으니 하바나에 가서도 굶어 죽기야 하겠어요?"


명학과 봉수는 반년 후에 농장에서 계약기간이 끝나자 모아둔 돈을 챙겨서 조선인 마을을 떠났다. 이미 까르떼나스의 에네켄 농장으로 옮겨간 100여명의 조선인들 때문에 이제 마을은 텅 빈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떠나는 것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그들도 마을을 나오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뻬드로가 있는 마을로 찾아 갔다.


"빼드로! 우리 왔어."


"하바나로 안 가셨어요? 이미 마딴사스를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도 빼드로와 그동안 얼마나 정이 들었는데, 그냥 가버릴 수가 있다냐? 오는 길에 음식 좀 사왔으니까, 이 음식들을 식구들과 나누어 먹어라. 뭐 더 사오고 싶은데, 우리도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말이여."


"미구엘씨.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오시고... 작별선물인가요?"


"작별선물? 뭐 별거도 아닌데 말이여. 그래도 다시 떠나려니 눈물이 날려 한다. 그 동안 뻬드로, 네가 우리에겐 친동생과도 같은 놈이었는디 말이여."


"안드레아와 미구엘씨에게 쿠바음악을 가르쳐 준 것은 저에게도 큰 행복이었어요. 그리고 저한테도 멕시코 음악과 꼬레아의 음악을 가르쳐 주셨잖아요."


그때 갑자기 패드로의 여동생이 집에서 나와 황급히 그들의 사이를 빠져 나갔다. 잠깐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많이 울어서 퉁퉁 부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생 얼굴이 많이 부어 있어. 아마 많이 울어서 그런 거 같은데. 무슨 일 있었어?"


"남자 친구가 떠나 버려서 그래요.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울었는데. 오늘은 좀 기분이 가라앉은 것 같아요."


"저렇게 어린 나이에는 실연의 상처는 굉장히 크지. 나이가 먹을수록 그런 상처에도 둔해지지만 말이야. 살면서 겪는 과정의 하나이지만 나중에는 더 성숙해질 수 있단다."


명학은 벽에 세워져 있는 기타를 잡아 몇 번 줄을 쳐서 음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천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비록 너가 날 내동댕이쳤더라도


설령 너가 나의 꿈들을 이미 없앴을지라도


당신이 당연히 받아야 할 증오로 그대를 저주하기 보다는


나는 나의 꿈속에서 당신에게 축복을 듬뿍 주겠어!


너를 잃어 벼려서 슬픔으로 끝없이 괴롭고


너가 떠나버려서 너무 고통스러워


내 삶처럼 나의 슬픔은 검은 눈물을 가지고 있다는 걸 너는 모른 채 나는 울어요


너는 나를 떠나려 하고


나는 고통 받고 싶지 않아


나는 그대와 떠날 거야. 나의 성자여


비록 그것이 나를 죽일지라도


어느 사랑의 정원사는 꽃과 잎들을 심고


다른 정원사가 와서 그것을 키워요


둘 중에 어디일까요?


내 사랑. 나는 너와 죽을 거야


나는 너와 떠날 거야. 나의 성자여. 난 다시 말할 거야


너는 나를 떠나려 하고

나는 고통 받고 싶지 않아


나는 그대와 떠날 거야. 나의 성자여


비록 그것이 나를 죽일지라도



레몬 트리, 레몬 트리


너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나는 너의 키스를 훔쳐야 해


..."

https://youtu.be/fvFWPlmdFus


명학이 노래를 부르는 중에 빼드로는 목소리의 키를 달리하여 노래를 하며 같이 들어왔다. 봉수는 타악기로서 조용히 볼레로 리듬을 쳐 주었다. 세 명의 연주와 노래는 몇 번이고 되풀이 되다가 멈추었다. 패드로의 여동생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검은 눈물이었다. 하지만 인생을 다시 알아 나가고 있는 듯이 검은 피부 속의 하얀 눈동자는 또렷한 윤기를 띠며 희망을 품은 듯 했다.


"그려.. 그러면서 크는 거여. 때로는 상처도 받으면서 말이여. 지금은 가슴이 쬐지는 것 같아도... 먼 훗날 생각하면 하나의 추억이여.."


봉수는 어린 여동생을 바라 보듯이, 빼드로의 여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명학은 빼드로의 마을을 떠나기 전에 그의 여동생을 위해 '라그리마스 네그라스'(검은 눈물)이라는 쿠바의 유명한 노래를 불러 주었던 것이었다.


빼드로의 마을을 나온 명학과 봉수는 끝없이 뻗어 있는 길을 걷고 있었다.


"명학아. 이 길이 하바나로 가는 길이 맞것지?"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서 헷갈리기는 하지만, 서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하겠죠."


"우리가 어릴 적에 조선에서 놀이패 형님들하고 조선팔도 다녔던 거 생각나냐?'


"네. 생각나지요. 하긴 그때하고 지금 처지가 비슷할 수도 있겠네요."


"맞아. 그렇지만 우리 놀이패의 다음 목적지는 하바나가 될 것이여. 놀이패야 우리 둘 밖에 없지만..."


"이제는 봉수형과 저만 있어도 충분히 재미나게 노래하고 연주할 수 있지 않아요?"


"조선소리, 멕시코소리, 쿠바소리, 이거 다 할 줄 아는 놈도 흔치 않을 거여."


"흔치 않은 게 아니라, 우리 밖에 없겠죠. 그러고 보니 우리가 귀한 존재인 것도 같네요."


"그렇지! 우리는 국보급 존재여! 이제는 뭐 알아 줄 우리나라도 없어졌지만 말이여."


해가 천천히 저물어 가는 서쪽 하늘을 보며 둘은 걸어가고 있었다. 등에 짊어진 짐들은 이제는 무거워 보이지 않았고 그들의 어깨와 걸음걸음에는 희망이라는 기운이 들어가 있는 듯이 보였다.



얼 마니세로


명학과 봉수는 서쪽으로 쭉 뻗어 나간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카리브 해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온 흰 구름이 뭉게뭉게 깔려 있었다. 그들이 걸어가는 양 옆으로는 저 멀리까지 담뱃잎 농장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야자수 잎으로 얽어 만든 모자를 눌러 쓴 쿠바 노동자들은 허름한 옷을 입은 채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면서 담배 잎을 부지런히 따고 있는 중이었다. 저 잎을 말려서 그 유명한 쿠바산 시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걸어가고 있는 명학과 봉수도 고생스러웠지만, 담뱃잎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쿠바 현지인들도 무척이나 힘든 삶을 살아가는 듯이 보였다. 명학과 봉수의 눈에는 담뱃잎이 에네켄이었고, 담배농장에서 일하는 쿠바 노동자들이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던 그들처럼 보였다.

"저 사람들도 우리가 일했던 만큼이나 힘들어 보이네요? 조선 땅에서도 멕시코에서도, 그리고 여기 쿠바에서도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있는 것 같아요."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제. 여기 담뱃잎 농장 주인은 아주 잘 살꺼여. 어디를 가든지 말이여, 자기 땅을 가지고 있어야 사람대접 받고 사는 거여. 나는 멕시코에서 돈 벌어 조선으로 돌아가서 내 땅을 사려고 했었어. 이제는 다 부질 없는 것이 되었지만 말이여."


"그런데, 이곳을 지나가고 있으니까, 어렸을 때 살았던 고향 마을의 뒷동산에 심어져 있던 담뱃잎들이 생각이 나네요. 물론 여기 담배 농장이 훨씬 커긴 하지만요."


"명학이도 고향 생각이 나냐? 사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 우리 고향에도 담뱃잎을 키우던 밭이 있었제. 어른들이 거기 잎을 말아서 담배 피시던 모습도 생각이 난다."


"어릴 적 일이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요."


"너 머리카락을 보니까 흰 머리가 이제 좀 보인다. 너는 얼굴이 애리애리하게 생겨서 시간이 흘러도 안 늙을 줄 알았는디. 누구든 세월을 빗겨 가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게요. 봉수형. 고향 떠났을 때가 어제 같은데, 이제는 제 나이도 사십 줄에 들어서게 되었네요. 참 허망하다. 그죠?"


"그러게 말이여. 인생사가 참 허망해야. 우리 인생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겠냐?"


"지금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꽃도 피고 한 것이 꼭 봄 같네요? 하긴 쿠바는 더운 지방이니까, 사시사철 꽃이 피어 있겠네요."


"명학아. 한 곡 뽑아 봐라! 오랜만에 '사철가' 한번 듣고 싶다. 우리 인생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겄지? 허망하고 허망한게 우리 인생이다."


명학은 천천히 걸어가다 목을 가다듬고 이내 소리를 서서히 내기 시작하였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 만은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데가 있더냐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승화시​​​​라


옛부터 일러 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삭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도 어떠한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려 은세계가 되고 보면


월백설백천지백​​​​하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 내 한 말 들어보소

인간이 모두가 백년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 살 인생 아차 한 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사후​에 만반진수​​ 불여생전​​ 일배주​​만도 못하느니라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아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세월아 가지 마라 가는 세월 어쩔거나


늘어진 계수나무 끝터리에다 대랑 매달아 놓고


국곡투식​​ 하는 놈과 부모불효 하는 놈과 형제화목 못 하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 세상 먼저 보내 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 앉아서


한 잔 더 먹소 그만 먹게 하면서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세"


https://youtu.be/qdt8BFpR54o

https://youtu.be/5bW4anSpuHA


구슬프지만 맛깔스럽게 사철가를 부르는 명학은 슬픈 가사와는 반대로 발걸음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장단에 맞춰 천천히 춤을 추었고, 봉수도 추임새를 넣으며 명학과 함께 길을 걸어가며 손을 이리저리 흔들고 몸을 기우뚱 기우뚱 움직이며 춤을 추었다. 사철가의 가사를 느리게도 부르고 빠르게도 부르면서 몇 번이나 되풀이 하면서 그 길고 긴 담배 농장을 뉘엿뉘엿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쿠바 현지인 노동자들은 잠시 일을 멈추고 그들의 소리와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철가의 노래는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조선말이었지만, 소리의 가락과 구슬프고 맛깔스럽게 꺽어지는 명학의 창법은 쿠바인들의 마음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명학의 소리가 끝이 나자, 시커먼 얼굴을 하고 있는 쿠바 현지인들의 무리 속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으로 시작한 노래는 하나, 둘 씩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합쳐지기 사작하였다. 쿠바의 자방 사투리가 심하게 들어가고 여러 소리가 합쳐져서 그 뜻을 알기가 쉽지가 않았지만, 시골적인 정서와 함께 그들의 애환이 담긴 노랫소리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명학과 봉학은 그들의 노랫소리를 듣고는 걸음을 멈추고 기타와 봉고를 들고 그들의 음악에 맞춰 연주를 시작하였다. 악기소리가 가세해지자 그들은 더욱더 리듬을 타며 노래를 계속 불렀다. 나이에 비해 주름이 얼굴에 가득한 그들은 어느덧 그 검은 색 얼굴에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을 지어 주었다. 고달픈 삶이었지만 노래로서 그들은 어려운 시간들을 잠시나마 잊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노래와 명학과 봉수의 악기연주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감독자가 그들이 일하는 곳으로 들어오자 음악은 비로소 멈추게 되었다. 명학과 봉수도 악기를 다시 어깨에 메었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천천히 걸음을 움직이며 그 곳을 서서히 떠나갔다. 현지인들은 감독관의 눈을 피하며 일을 시작하였고, 몇몇은 손을 흔들며 명학과 봉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아따! 담배농장 사람들 정말 잘 놀더만! 감독관만 안 왔었어도 우리가 같이 좀 더 놀아 주는 건데 말이여."


"이런 게 음악의 힘이 아니겠어요? 우리 노래를 저 사람들이 알아 들었을 리가 없었을 텐데, 아까처럼 우리 노래에 반응하여 자기네들의 노래를 불렀잖아요? 우리는 그 사람들 노랫소리를 다 알아 듣지는 못했더라도 기타와 봉고로서 멜로디와 리듬을 맞춰 주었고요. 세상에 이것보다 더 멋진 공연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렇지! 이거야 말로 진짜 음악이여. 세상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음악을 부르고 듣고 해서 견딜 수가 있는 거지. 어디를 가도 백성들의 음악은 이런 거 같어. 조선의 소리들도, 멕시코의 소리들도, 그리고 여기 쿠바의 소리들도 말이여. 백성들의 힘든 삶을 노래로서 담아내어 주고 그리고 때로는 말이여. 소리로서 그것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하는 것이여."


"네. 이제야 저도 그게 보이네요. 그 동안 소리를 내기만 했는데, 이런 생각은 한 번도 못 했었거든요."


"그려. 명학아. 그런 것을 깨달았으면 너 노래에 녹여 내어라. 노래는 너 인생과 깨달음이 담겨 있어야 제 맛이제!"


그들은 길고도 길었던 담배 농장을 어느 순간 벗어나고 있었고, 깨달음의 공간이었던 그 곳은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명학아. 이제 해가 저물어 가는구나. 오늘은 저기 보이는 헛간 같은 곳에서 하룻밤 묵어가자. 보아 하니 사람이 안 산 지가 꽤 되어 보인다."


"그래도 오늘은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잘 수가 있겠네요. 감사해야겠는걸요."


둘은 안으로 들어가서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불을 피우고 보자기 속에 있는 옥수수와 고구마를 꺼내어 허기를 채웠다.


"봉수형! 하바나까지는 이제 며칠만 더 자면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마딴사스에서 하바나까지 아주 먼 거리는 아닌 것 같아요."


"조선에서 형님들 따라 조선팔도 다니던 때 생각하면 이런 거는 뭐 힘든 것도 아니야."


"하바나에 가면, 마딴사스에서 만난 그 사람이 적어 준 주소로 가 볼까요?"


"자기가 찾아 와 보라고 했으니까. 한번 찾아 가 보는 것도 좋을 것이여."


"찾아가면 일자리라도 얻을 수 있을까요? 거기서 청소나 다른 막일 같은 거라도 괜찮은데..."


"하바나에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일단 그 사람에게 한번 가 보자. 너 말대로 거기에서 갖은 잡다한 일 해주면 뭐 밥은 먹고 지낼 수 있겄제..."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보며 그들은 잠이 들었다. 앞으로 닥쳐 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쏟아져 오는 잠으로 인해 그 두려움은 우습게도 금방 사라져 버릴 수 있었다.



"이제 이 도시가 하바나로 들어가기 전에 지나게 되는 마지막 도시가 될 것 같아요."


"그러면, 내일이면 드디어 하바나에 도착하겠네. 오늘은 노숙하지 말고 돈을 주고라도 어디 허름한 여인숙에서 잠을 자자!"


둘은 도시로 들어와서 하룻밤을 묵을 집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에서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나무 밑에 수레를 놓아두고 몇 시간째 땅콩장수는 목이 터져라 외치며 땅콩을 팔고 있는 것이 그들의 눈에 보였다. 하지만 땅콩장수는 오랫동안 땅콩을 하나도 팔지 못하고 있었다.


"야. 우리가 가서 하나 팔아 주자. 안쓰러워서 못 보고 있겠다. 사람들도 각박하지.. 뭐 하나 팔아 줘도 될 성 싶은데 말이여..."


봉수는 땅콩장수에게 가서 한 봉지를 사들고 돌아 왔다. 둘은 봉지에 든 구운 땅콩을 나누어 먹었다.


"맛있네요! 저 사람이 직접 구운 것 같은데, 사람들이 한 번 사서 먹어 보면 많이 팔릴 것 같은데 말이에요."


"명학이 네가 노래 한번 불러 줘라. 혹시 사람들이 모일지도 모르잖냐? 그러면 사람들이 땅콩장수 있는 거 보고 땅콩 팔아 줄 수도 있잖냐?"


"네? 여기서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이 곳에서요?"


"너는 멕시코에서 마리아치 형님들한테서 뭘 배웠냐? 거기 형님들 노래하는 거 기억 안나냐? 원래 노래와 음악은 모르는 관중들 앞에서 할 때가 제대로 맛이 나는 법이여."


명학은 한번 숨을 내쉬고 생각을 하더니 이내 노래를 불렀다.


"땅콩. 땅콩.


입이 궁금해서 뭔가 먹고 싶다면


땅콩을 먹으세요.



얼마나 잘 볶았고 기름질 줄 아세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거에요.


저기 젊은 아주머니, 그냥 저를 보내지 마세요.


왜냐하면 나중에 후회하시게 될테니까요.


너무 늦어버릴 것이고 또 벌써 늦어 버렸을테니깐요.



땅콩장수는 왔다가 가요


땅콩장수는 왔다가 가요


저기 젊은 아주머니! 땅콩을 먹지 않고는 자지 마세요.



거리가 조용해지면


내 마음 속의 젊은 아주머니!


땅콩장수는 거리에서 홀로 노래를 하죠


만약 저 젊은 여자 분이 그 노래를 듣는다면


발코니로 나와 땅콩장수를 부르죠



땅콩 좀 주세요!


땅콩 좀 주세요!


왜냐하면 오늘 밤에는 땅콩을 먹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으니까요



저는 갑니다


저는 갑니다."


명학은 쿠바의 유명한 노래인 '엘 마니세로'(땅콩장수)를 기타로 연주하며 노래하였고, 봉수는 마라카스와 봉고를 연주하며 노래의 흥을 돋워 주었다. 건너편에서 땅콩장수는 흥겹게 흐르고 있는 그들의 노래와 연주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그들의 주위로 몰려 들기 시작하였고, 주위의 건물에서 발코니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구경을 하였다. 사람들은 명학의 노래에 박수를 쳐 주었다. 명학과 봉수는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였고, 이어서 두, 세곡을 더 연주해 주고 자리를 떠났다. 그 동안 땅콩장수의 수레에 담겨 있던 볶음 땅콩은 점점 줄어 들게 되었고, 사람들은 손에 땅콩봉지를 들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https://youtu.be/vWTdZp9EYcM?si=A-KTFKBnJnbnalqK

https://youtu.be/fQExZiQnHs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