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롭게 외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자동차 창문 밖으로 운전기사가 얼굴을 내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조금 전에 '빵빵'거리는 경적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는데, 명학과 봉수는 그 소리가 자신들에게 길을 비켜 달라고 내는 소리였던 것을 몰랐다.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니, 고급승용차는 차가운 금속을 번쩍거리며 그들의 옆을 지나가 버렸다. 쿠바에 도착한 이후 마딴사스의 시골에서만 세월을 보낸 그들에게는 하바나는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수많은 건물들, 거리를 메우고 있는 자동차들과 사람들의 움직임과 소음은 벌써부터 그들을 지치게 하였다.
"우와! 생각했던 것 보다 하바나가 큰 것 같다. 사람들이 모두 바쁘게 어디론가 가고 있네. 우리가 여기서는 완전 촌놈이 되어 버렸어라!"
"네. 하바나 시내에 들어오니까 정신이 없어지네요. 조용한 곳에서만 지내다가 여기에 오니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사람들도 너무 많구요. 자동차들도 많이 보여요. 처음 보는 고급 승용차도 많아요. 부자들이 하바나에 모두 모여 사는 것처럼 보이네요."
"하바나가 쿠바의 수도이니까 그런 것이겠제. 멕시코시티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거기도 멕시코 수도였으니까 아마 굉장히 크고 사람과 자동차도 많았을 것이여. 여기처럼 말이여. 명학아. 우리가 아침도 못 먹었으니까, 어디서 밥 좀 사먹고 가자!"
명학이 주위를 둘러보니, 고급 레스토랑들만 보였고 노천카페에서는 멋진 옷을 입은 하바나 시민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와 간단한 다과를 먹고 있었다. '저런 곳에는 우리가 들어가지도 못하겠구나!'라고 생각이 들어서 그는 저 너머 건물 사이의 골목길 안쪽을 쳐다보았다. 그 골목 안에서는 그들처럼 평범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보니 어쩌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이 들었다.
"봉수형! 저 골목 안으로 들어 가 보죠."
"그려. 이 주위는 옷을 겁나게 빼 입은 사람들만 밥 먹고 차 마시고 하는 곳들만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들어갔다가는 문전박대 당하것다. 돈도 많이 내야 할 것 같아!"
둘은 화려한 거리를 벗어나 골목길로 걸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 갈수록 평범해 보이는 쿠바인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돈 때문에 싸우고 있는 남편과 부인의 소리, 울고 있는 아기를 재우려고 애쓰는 젊은 여인의 모습, 발코니에 나와 우두커니 밖을 쳐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늙은이, 그늘에 책상을 놓아두고 카드게임을 하는 남자들, 부지런히 몰려다니며 놀고 있는 남자 아이들, 허름한 인형의 머리를 빗겨 주는 어린 소녀의 모습, 마실을 나온 듯 킁킁거리며 다니는 거리의 개들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더위를 피해 건물 담벼락에 기대어 멍하게 앉아 있는 하바나의 서민들은 그들과는 다르게 생긴 명학과 봉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명학의 하얀 피부도 멕시코와 쿠바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색깔이 짙어졌지만 얼굴의 모습은 흑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혼혈인종의 얼굴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짐을 메고 기타와 악기를 손에 쥔 그들의 모습은 골목 안의 하바나 서민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다행히 건물 한편에 조그만 노천 식당이 있었고 쿠바인들이 앉아서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명학과 봉수는 비워져 있는 식탁에 자리를 잡고 짐과 악기들을 내려놓았다. 모자를 벗고 수건으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으니까 식당 종업원이 다가 왔다.
"뭘 드시겠어요? 그런데 혹시 중국들인가요? 아니면 쿠바인들이 아닌가요?"
"저희는 중국인이 아닙니다. 저희는 꼬레아.. 아! 아니. 멕시코에서 왔어요. 음식은 우리 옆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걸로 주세요. 맛있어 보이네요."
"아. 멕시코인 들이군요. 스페인어 억양이 우리와 조금 다른 것 같군요. 하바 나는 처음이세요?"
"네. 하바 나는 처음입니다. 사람들이 정말 많이 사는 것 같군요."
"네. 하바 나가 쿠바의 중심이니까요. 선생님들을 보니까, 음악 연주하시는 분들인가 봐요! 악기를 들고 다니시는 걸로 봐서는요."
"네. 저희는 음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와. 저희 쿠바인들은 음악과 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죠. 저기요! 여기에 있는 분들은 멕시코인 들인데, 음악을 하신데요."
종업원은 수다스럽게 주위를 돌아보며 갑자기 외쳤다. 그러자, 골목안의 사람들은 그들을 쳐다보았다.
"멕시코에서 오셨소? 쿠바에 오신 걸 환영해요!"
"실례가 안 된다면, 멕시코 노래와 음악을 좀 들려주시겠어요?"
사람들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명학과 봉수는 당황스러워졌다. 조선인이라고 말해 보았자 저들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를 것이기 때문에 그냥 멕시코에서 왔다고 말해 버렸는데, 어느새 그들은 멕시코에서 온 음악인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명학아! 뭐..우리가 멕시코에서 온 것은 맞잖냐? 그리고, 멕시코에서 마리아치 형님들한테 멕시코 음악도 오랫동안 배웠고 말이여. 거짓말 한 것도 아니제. 그냥 밥 먹기 전에 멕시코 노래나 한 곡 들려주자. 배고픈데 말이여.. 이놈들 요구하는 것도 많어.."
명학은 기타를 잡고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하바나인들은 쿠바 음악의 멜로디와는 다른 멕시코의 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명학의 연주소리에 매료되기 시작하였다. 봉수도 기타를 잡고 키를 달리하여 명학의 기타 멜로디에 같이 들어갔다. 명학은 멕시코의 노래 중에서 '씨에리또 린도'(아름답고 푸른 하늘)이라는 유명한 노래를 불러 주었다.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쳐 주었다. 명학이 노래를 부르던 중에 일부는 가사를 따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던 것도 같았다. 멕시코의 유명한 노래였기 때문에 쿠바 하바나의 라디오 방송에서도 한번쯤은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들! 오늘 식사는 제가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멕시코의 유명한 노래를 직접 멕시코인에게서 들으니까 정말 좋았습니다. 저희 식당에서 제가 제일 자신 있는 요리를 대접하는 것이니 맛있게 드세요!"
식당 주인이 직접 나와서 친절하게도 얘기를 하였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되면 저희도 노래를 더 해드리고 싶은데, 어디 가 봐야 할 곳이 있었어요."
"아. 그러신가요? 애석하군요. 멕시코 노래를 더 듣고 싶었는데요. 여기 하바나는 처음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지리를 잘 모르실텐데, 혹시 주소를 아시나요? 찾는 곳이 어딘지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명학은 주머니에 고이 넣어 둔 쪽지를 식당 주인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종이에 적힌 주소를 자세히 보고 나서는 옆에 앉아 있는 다른 하바나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을 하였다. 잠시 후에 그는 다시 명학에게 돌아 서며 얘기 했다.
"아. 이곳은 소셜 클럽인 것 같습니다. 하바나에서 유명한 클럽들 중에서 한 곳이라고 하는군요. 다행히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른 종이에 지도를 그려 주며 자세하게 찾아 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거 너무 감사합니다. 음식도 공짜로 주시고 저희들이 찾아 가야 할 곳도 잘 가르쳐 주시고요. 덕분에 하바나에서 길을 잃지 않고 그 곳으로 잘 찾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명학과 봉수는 골목에서 다시 큰 거리로 걸어 나왔다. 식당 주인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사십 분 정도를 걸어가니, 주소에 적힌 장소가 나타났다. 그 건물은 문이 열려져 있어서 안으로 들어 가 보았다. 클럽 안은 낮 시간이어서 그런지 손님이 없고 텅 비어 있었다. 청소를 하는 사람들만이 몇 명 보였고, 그 중 지배인처럼 보이는 한 명이 명학에게 다가 왔다.
"무슨 일로 들어오셨죠?"
"안녕하세요? 저희는 로드리게스 씨를 뵈러 왔습니다."
"로드리게스 씨는 지금 여기 안 계세요. 혹시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 오셨나요?"
"아니오. 저희가 온다고 말씀은 미리 드리지 못 했습니다."
"바쁘신 분이어서 미리 약속을 정하지 않으면 만나시기 힘듭니다."
"아. 그러면, 언제 정도 오면 로드리게스 씨를 뵐 수 있을까요?"
"아. 요즘은 언제 오실지 잘 알 수가 없어요. 어떤 이유로 만나시려고 하시나요?"
"약 반년 전에 마딴사스에서 로드리게스 씨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하바나에 오면 꼭 이 곳으로 찾아 와 보라고, 이렇게 종이에 여기 주소를 적어 주셨거든요."
명학은 상대방에게 그 종이를 보여 주었다. 그는 종이에 적힌 글씨를 유심히 보았다.
"아. 네. 이것은 틀림없는 로드리게스 씨의 글씨이군요. 직접 주소를 적어 주셨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잠깐만 저기 테이블의 의자에 않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제가 그 동안 로드리게스 씨가 계실만 한 곳으로 전화를 걸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명학과 봉수는 그가 안내하는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클럽 안을 구경하고 테이블에 놓아 준 레몬 음료를 마시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낮잠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둘은 의자에 기대어 꾸뻑꾸뻑 졸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잠을 잤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흑인 여자가 무대 한편에 앉아서 클라베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소리에 잠이 깨어 버렸다.
청소하는 종업원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 텅 빈 곳에서 그 여인은 혼자서 끌라베로 박자와 음정을 만들면서 아름답고 슬프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명학은 자신도 모르게 노래의 후렴을 같이 따라 불렀다. 봉수는 기타를 들고 노래에 맞추어 연주를 해 주었다. 노래를 하고 있던 여인은 놀라서 노래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서 명학과 봉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잠시 있다가 명학의 노래에 들어와서 같이 노래를 불렀다. 둘의 노래는 몇 분 동안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고, 봉수의 기타소리와 함께 클럽 홀 안을 애잔하게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저기. 이제 노래가 다 끝나셨나요?"
갑자기 홀 안으로 들어 온 종업원이 불쑥 말을 하였다. 그래서 오래전 헤어진 사랑에 관한 노래인 '베인떼 아뇨스'(20년)라는 볼레로 음악은 멈추어지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로드리게스 씨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두 분을 기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두 분이 이 곳 클럽에서 지내시도록 허락을 하셨습니다. 제가 방으로 안내해 드릴 테니 그 곳으로 가셔서 일단 짐을 풀어 놓으시죠."
"아.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명학은 그에게 대답하고 나서는 그녀가 있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봉수형. 그 여자가 언제 사라졌어요?"
"잉. 네가 저 사람하고 얘기하는 사이에 황급히 저 안 쪽으로 들어가 버리더라. 근데, 노래를 정말 끝내주게 잘하는 여자여!"
아직 낮잠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여자가 조금 전까지 같이 노래를 하였는지도 확신이 들지 않을 만큼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나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제정신이 돌아 왔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하바나에서 운이 좋게 거처할 곳이 마련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둘은 생각하자 그 여자는 머리에서 떠나 버렸다. 그리고는 앞장서서 바삐 움직이는 남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들도 부지런히 그를 따라 가기 시작했다.
클럽 뜨로삐까
"잘 잤냐? 명학아! 너가 많이 피곤했는지 한 번도 안 깨고 잘 자더라. 나는 여기 잠자리가 처음이라서 그런지 말이여. 영 편하지가 않아서 거의 잠을 못 잤다. 이상하게 말이지, 나는 나이가 먹을수록 예민해지는 것 같어."
눈을 뜬 명학을 바라보며 봉수는 말했다. 꿈을 여러 수십 번을 꾼 것 같았지만 명학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밤은 봉수의 말처럼 마치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고 잠을 잤던 것 같았다. 덕분에 하바나까지의 여행 중에 쌓였던 피로를 말끔히 풀 수 있었다.
"봉수형. 내가 너무 많이 자 버렸나 봐요. 형은 무슨 고민이 있어요? 마딴사스에서 하바나까지 걸어온다고 많이 피곤했을 텐데, 왜 잠을 안 잤어요?"
"그러게 말이여. 내가 원래 성격이 시원시원한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잔걱정이 많은 놈이여. 근데, 로드리게스 씨가 여기 클럽 사장이었나 보네. 굉장히 돈이 많나 보다. 하바나에는 가수나 연주자들이 거리에 널렸을 텐데, 왜 그 시골에 처 박혀 있는 우리에게 여기로 와 보라고 했을지 궁금하단 말이여."
"하긴 정말 그러네요. 우리가 나이가 젊은 것도 아니고 말이죠. 여기 클럽에서 노래 부르고 연주하려고 찾아오는 쿠바인들이 많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아무튼 말이여. 여기서도 우리가 밥값 하려면 엄청 신경 써야 될 것 같아.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지."
"맞아요. 저는 그냥 종이에 적힌 주소로 찾아 와야겠다고만 생각했는데, 형 말을 들으니 저도 이제 슬슬 걱정이 드는 걸요."
"걱정 마라! 다 잘 될 거여. 네가 노래는 끝내주게 잘하니까 말이여. 조선 소리며, 멕시코 소리며, 여기 쿠바 소리를 모두 하는 놈은 너 밖에 없음께. 얘네들 소리도 듣기에 맛깔스러워서 괜찮기는 한데, 좀 깊은 맛은 없어. 나는 니가 노래하는 것 매일 듣고 너 노래에 맞춰서 연주를 해 주니까, 다른 가수들과의 차이를 알 수가 있었거든. 아마 로드리게스씨도 나하고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 같단 말이지."
"저는 제 노래를 다른 사람처럼 들을 수가 없어서, 정확하게 다른 가수들과 비교를 할 수가 없었거든요. 봉수형이 생각한 것처럼 로드리게스 씨가 생각했으면 좋을 텐데요."
"그런 거 맞을 거여. 안 그러면, 왜 자기 클럽으로 찾아오라고 했겄냐? 그나저나, 내가 걱정이다. 여기 쿠바인들과 섞여서 연주하려면 똥줄 빠지게 연습해야겄다. 마딴사스에서 연습했던 것과는 다를 것이여. 여기 클럽 연주자들은 실력이 좀 차이가 많이 나지 싶어."
명학은 봉수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봉수형이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 걱정을 했던 것이 어쩌면 이런 염려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짐작이 들었다.
"봉수형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형보다 악기 연주는 잘 하지 못하지만, 형이 연주하는 소리를 평소에 다 듣고 있었어요. 쿠바 음악이 리듬이 많이 발달되어 있지만, 조선 소리도 엄청 장단이 발달했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조선 것이 쿠바 것보다 훨씬 복잡해요. 아마 형에게는 여기 리듬은 아마 쉬울 것 같아요. 안 그래요?"
"엉? 너도 그렇게 생각했냐? 조선소리가 사실 장단이 더 복잡하단 말이지. 사실 나는 이놈들보다 더 맛깔스럽게 쳐 버릴 수 있단 말이여! 조선 리듬도 이놈들처럼 기타와 같은 서양 악기들과 잘 어우러지게 만들었으면 아마 더 맛깔스러운 음악이 되었을 거란 말이지."
"응. 그러네요. 저는 아직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언제 한번 우리가 그런 음악을 만들어 봐요. 조선의 소리와 멕시코, 쿠바의 음악이 같이 녹아든 그런 음악을요."
"그러자. 좋은 생각이여!"
그 때 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명학은 일어나서 문을 열어 주었다. 밖에는 흑인 여자가 서 있었다. 어디서 본 듯 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바로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 오후에 클럽 홀 무대에서 노래 연습을 하고 있던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잘 쉬셨어요? 제가 안내를 해 드릴 테니, 잠시 후에 홀로 나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기...어제 노래 부르셨던 분이 맞으시죠? 저는 쿠바에 와서 아직 당신처럼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을 못 본 것 같아요."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돌아서서 사라져 버렸다.
"명학아! 누구냐? 왔다 갔나 보네."
"네. 어제 무대에서 노래하던 여자였어요. 우리더러 잠시 후에 홀로 나오라는군요."
"그래? 이제 슬슬 한번 움직여 보자."
둘은 간단히 세수를 하고 방을 나왔다. 어제 안내되어서 걸어 들어왔던 복도를 이리저리 돌아가니 큰 홀이 보였다. 그 곳에 가니, 구석 쪽의 테이블에서 종업원들이 아침을 먹고 있었다.
"잘 잤어요? 여기 앉아서 같이 식사를 해요! 우리도 방금 자리에 앉았어요."
명학과 봉수는 테이블의 빈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빵과 치즈를 덜어 와서 그릇에 놓고 떼어 먹었다. 모두들 시끌시끌하게 얘기를 나누며 아침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하바나는 처음이신가요?"
"네. 하바나는 처음입니다. 도시가 굉장히 세련된 것 같아요."
"네. 그렇죠. 하바나에는 쿠바인들도 많지만, 외국인들도 많아요. 특히, 미국인들이 많죠. 사업하러 오는 사람도 있고, 관광하러 온 사람도 있어요."
"네. 어제 여기까지 오면서 스페인어 이외에도 다른 나라 말이 많이 들리더라고요."
"어디서 오셨죠?"
"저희는 마딴사스에서 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멕시코에 있었고요."
"멕시코에서 오셨군요. 멕시코시티에서 오셨나요?"
"아니오. 저희는 베라끄루쓰에서 살았어요. 항구도시죠. 혹시 아세요?"
"아니오. 멕시코는 가보지를 않았어요. 근데 거기서 음악 했었나요?"
"네. 마리아치들에게 음악을 배웠어요. 멕시코 음악들이죠."
"거기 음악들도 좋더라고요. 멕시코 음악도 가끔 라디오 방송에서 틀어 주죠."
계속 이어지던 대화 속에서 어느덧 아침 식사는 끝나게 되었다. 옆에 앉아 있던 종업원이 말을 걸었다.
"이제 식사를 다 하셨으니, 마리아에게 가 보면 될 거예요."
"마리아가 누구죠?"
"아까 방에 찾아 갔던 여자 기억하죠? 그 여자가 마리아예요. 여기 클럽에서 보컬이자 가끔 피아노도 쳐요."
"아. 그렇군요. 어쩐지 노래를 잘하더라고요."
"언제 마리아가 노래하는 것을 들었어요?"
"네. 어제 왔을 때 우연히 듣게 되었어요."
"노래를 굉장히 잘 하죠. 그리고 우리 클럽에서는 보컬 연습도 시켜 주고 있어요. 마리아가 많이 기다릴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지금 가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해요."
명학과 봉수는 테이블에서 일어나서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무대의 한 편에 마리아는 기대어 뭔가를 적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마리아는 노트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식사는 다 마쳤나요? 저는 마리아라고 해요. 우선 클럽 뜨로삐까에 오신 걸 환영해요."
"네. 저는 안드레아라고 합니다."
"지는 미구엘 이라고 해요."
"저희 클럽은 아주 훌륭한 가수들과 연주자들이 공연을 많이 하는 곳이죠. 하바나에서 음악과 춤을 제대로 즐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꼭 찾는 명소 중 하나예요. 안드레아씨는 가수죠? 미구엘 씨는 악기를 연주하고요?"
"네. 맞아요."
"어제 우연히 안드레아씨와는 같이 노래를 해 보았네요. 발성법이 좀 특이했어요. 혹시 그런 훈련을 받았나요?"
"젊었을 때 우리나라의 전통 노래를 배웠습니다. 그때 익혔던 창법이 제 노래 중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아요."
"어느 나라에서 왔죠?"
"꼬레아라고 하는 나라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중간 정도에 있는 곳이죠."
"그런데, 쿠바 노래를 잘 하더군요."
"멕시코에서 거의 십오 년을 살았는데, 거기에서 마리아치들과 같이 많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에게 노래와 음악,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배웠죠. 스페인어도 멕시코에서 배웠고요. 그래서 쿠바 노래를 어느 정도 따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사실은 로드리게스 씨가 저에게 안드레아씨의 보컬 교정을 맡아 달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가 어제 노래를 같이 불러보니, 몇 군데를 좀 손 볼 곳이 있었어요. 물론 그러한 점이 안드레아씨가 살았던 꼬레아에서는 흔한 창법일 수도 있을 테지만, 여기는 쿠바이기 때문에, 쿠바의 노래 스타일을 알아야 우리 클럽의 무대 위에서 같이 노래 부를 수가 있어요."
"네. 마리아 씨께서 가르쳐 주신다면 저는 겸손하게 배우겠습니다. 저도 쿠바의 창법이나 노래스타일이 제가 자랐던 나라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멕시코와도 약간 다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소리에 대해서는 저보다 나은 사람에게 배운다는 마음으로 살아 왔습니다."
"안드레아씨는 우리 노래 스타일과 다른 문화에서 오셨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것이에요. 그런데, 제가 어제 잠깐 같이 노래하면서 느꼈던 것은 안드레아씨는 좀 타고난 가수라는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하바나에서 노래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그리고 미구엘 씨는 악기파트를 담당하시죠?"
"네. 맞아요. 지는 가수는 아니지요. 타악기가 제 전문이긴 한데, 기타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어제 기타 연주하는 소리는 제가 잘 들었습니다. 미구엘 씨는 제가 악기 파트를 담당하는 분에게 말씀을 드려 놓을게요. 그 분으로부터 지도를 받으면 되실 겁니다. 암튼, 두 분은 이제 얼마나 노력하고, 또 잘 따라 오느냐에 의해 클럽 뜨로삐까에 남게 되실 수 있는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셔야 될 거예요."
그 이후 거의 일련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명학과 봉수는 각자의 영역인 보컬과 악기연주에서 혹독한 연습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클럽에서 주요 공연 시간이 아닌 시간대에 밴드들과 같이 공연을 하는 기회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이미 40대 중년의 나이에 들어 선 그들에게는 이러한 적응의 시간들이 엄청난 스트레스였지만, 그들의 인생의 시간만큼 음악을 해 오던 경험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어느 새 현지 쿠바인 전문 뮤지션만큼이나 노래하고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또한, 현지인들을 넘어설 수 있는 독창적인 창법과 장단으로 이미 웬만한 쿠바 전문 뮤지션들을 넘어서고 있었다.
"명학아! 너 어제 루이스 팀하고 노래했냐?"
"네. 봉수형과도 같이 노래해야 하는데, 요즘은 같은 팀이 되기가 쉽지 않네요."
"잉. 그려. 언제 또 같이 연주할 순번이 돌아 오겠제. 아따 근데, 힘들 긴 힘들다. 한번 날 잡아 푹 쉬었으면 좋겠다."
"그러게요. 어제는 밤늦게까지 노래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요즘은 옛날 생각이 많이 나요. 마딴싸스에서 뻬드로랑 노래하고 연주하던 기억, 베라끄루쓰에서 마리아치들과 같이 음악 하던 일들, 등등요. 그때가 행복했던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은 말이여. 그때는 우리가 음악으로 돈 벌지 않아서 그런 거여. 엄연히 우리가 돈 버는 일이 따로 있고, 음악은 별도로 우리가 좋아서 배웠으니까, 행복했을 거란 말이야. 근데, 지금은 여기 클럽에서 우리가 음악 해주며 돈벌고 밥 먹고 살고 있잖냐? 그런 차이란 말이지."
"그러네요. 그 차이네요. 근데, 봉수형 얼굴을 보니 공연하기 전에 너무 하얗게 화장하고 들어가는 거 아녜요?"
"여기 클럽에 백인 손님들이 많으니까 그런 것이지. 다른 팀에 있는 트럼펫을 죽여주게 잘 부르는 그 친구도 얼굴이 너무 검으니까, 무대에 잘 못 서는 거여. 백인 놈들이 흑인들 많이 무시하잖냐?"
"맞아요. 사실은 저도 무대에서 노래 부르기 전에 최대한 백인처럼 보이려고 화장을 하고 올라가요. 아무리 화장해도 백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은 확실할 텐데 말이죠."
"더운 지방에서 오랫동안 조상대대로 살았으니까 살색깔이 짙어질 수밖에 없는 것일 건데 말이여. 아무튼, 백인놈들은 욕심도 많고, 백인 아니면 너무 무시해 버려. 지들은 뭐가 그리 잘 났다고 말이여."
명학과 봉수는 그 동안 쌓였던 불만과 피로에 대하여 서로 하소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클럽 사장인 로드리게스는 그들 옆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다.
"안드레아, 미구엘씨! 어떻게 이제 좀 지내실 만 하가요?"
"네. 로드리게스씨 덕분에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희들이야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하. 두 분이 음악을 잘 하시니까 아직까지 잘 버티고 계시는 거에요. 나이가 많지만, 두 분의 음악경력이 오래 되셨으니, 언젠가는 빛을 발할 수 있는 시간이 올거에요. 아참! 오늘 밤에 유명한 밴드가 공연하러 우리 클럽에 오는 거 알죠?"
"네.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그 분 노래를 라디오에서만 들었는데, 실제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두 분은 일하지 말고 공연을 구경하도록 해요. 그 동안 밴드에 섞여서 노래하고 연주한다고 제대로 쉬지도 못 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어요. 오늘만큼은 제가 얘기를 해 놓을 테니 일하지 말고, 그 분들의 오늘 밤 공연을 구경하세요!"
"감사합니다. 로드리게스씨! 덕분에 그 밴드의 노래와 연주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겠네요. 저희들에게 이런 기회를 주시다니, 축복받을실거에요."
그날 밤, 클럽 뜨로삐까는 하바나의 수많은 손님들로 가득 메워졌다. 빼곡히 찬 청중들 속에 끼여 명학과 봉수는 '셉텝토 나시오날'이라는 유명한 밴드의 연주와 밴드의 리더인 '이그나시오 삐녜이로'를 직접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우와! 명학아! 우리가 하바나에 진짜 잘 온 것 같다는 것을 오늘 같은 날에는 알 것 같다. 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를 저 사람들이 연주하고 불렀구나."
"아! 저도 오늘 이 순간을 영원히 못 잊을 것 같아요. 저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보다니요.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 연주하고 노래하는 소리를 직접 내 귀로 듣다니, 믿어지지가 않아요."
트럼펫의 솔로가 먼저 나오며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 유명한 노래인 '쑤아베씨또"(부드러운)의 전주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이그나시오 삐녜이로'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의 창법은 하바나의 전통 룸바였지만 이미 쿠바 각 지역의 음악들을 모두 소화하고 있었다. 잔잔하게 흐르던 노래가 끝나자, 두 번째 노래인 '에찰레 쌀시따'(살사 양념을 뿌려요)라는 유명한 노래가 시작되었다. 흥겨운 멜로디와 리듬이 울려 퍼지자,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명학과 봉수도 흥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연주 속에서 둘은 쿠바인들과 하나가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