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갑자기 당신에게 너무 불행이 닥친 것 같아서, 제가 많이 걱정이 되요. 뜨로삐까에서 계속 활동하면 언젠간 라디오 방송에 나올 수도 있고 더 유명해 질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우리와 같이 가면 당신 앞길이 불확실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쿠바에서도 여전히 이방인들입니다. 또, 우리의 모국인 조선은 이제 없어진 나라입니다. 저는 음악을 사랑하지만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고 마리아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명학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유명해진다는 것이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요? 어디를 가든지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그것을 들어 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당신과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보다 의미가 크다고 믿어요. 그리고 당신이 쿠바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저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안드레아! 당신이 아무 쓸모없다는 그런 말은 제발 하지 말아 주세요."
명학을 보고 있는 마리아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한 여인이 진심으로 들어왔고 어쩌면 이제부터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느껴졌다. 젊은 시절에 어떤 기생의 모함으로 인하여 조선을 도망치 듯 떠나야 했던 기억이 불현듯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죽을 뻔 한 위험을 겨우 벗어난 이후로 그는 여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가 쉽지 않았고, 멕시코를 거쳐 쿠바에서 정착해 가는 지금까지의 긴 시간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쫓기 듯 살아왔던 생존의 기간이었다. '내가 이 여자를 책임져 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갑자기 들었던 것이었다.
그때, 봉수는 명학에게 다가와서 어깨로 툭 치며 조용히 말을 하였다.
"어따! 너는 뭐 하러 그런 마음 약한 말을 하고 있냐? 마리아 눈을 보니까 이미 결심이 섰네 그려. 자고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말이여, 남자보다 강한 것이 여자란 말이지. 네가 지금 무슨 걱정하고 있는지 이 형님의 눈에 다 보인다. 너무 걱정 하덜 말거라! 너는 이제 마리아를 계속 사랑해 주면 되는 것이여... 참말로 복도 많은 놈이여!"
그리고는 봉수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안드레아가 마리아에게 말하는 것은요. 자기가 이제 마리아를 책임지고 계속 사랑할 텐데, 잘 할 수 있을지 걱정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 조선남자들은 여자를 한번 사랑하면 끝까지 책임진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두 사람은 서로서로 예뻐하고 사랑해 주기만 하면 돼요."
마리아는 봉수의 말에 미소로서 대답을 해 주었다.
그들은 전차가 다니는 거리까지 와서는 전차에 올라탔다. 승객들을 비집고 들어가서 짐을 내려놓은 뒤에 겨우 자리를 하나 잡았다. 둘은 마리아를 위하여 그 자리를 양보하여 주었다. 움직이는 전차의 창가를 통하여 하바나의 거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마리아의 집근처의 정거장에 오자 전차에서 내렸고, 마리아의 집까지 다시 걸어갔다. 마리아의 집 앞에 도착한 후에 명학은 말했다.
“며칠 푹 쉬도록 해요. 이제 새로운 클럽에서 다시 보겠네요. 저는 미구엘이 구해놓은 집으로 가서 오늘부터 자면 되요.”
“두 분은 바로 가시지 마시고, 잠시 들어오셔서 뭐라도 드시고 가세요.”
명학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는 모습을 보고 봉수는 그의 등을 뒤에서 살짝 앞으로 밀며 말했다.
“아. 마리아! 나는 지금 거기 집으로 가봐야 해요. 집주인과 지금 얘기할 것이 있거든요. 오늘부터 거기서 살아야 하는데, 아직 방이 제대로 치워졌는지도 확인해야 되요. 주소는 여기 적어 놓았으니까, 안드레아는 이거 보고 나중에 잘 찾아 와라!”
“어. 봉수형! 혼자만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그러면 같이 들어갔다가 집으로 가요.”
그러나 봉수는 빙그레 웃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걸어가 버렸고, 길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져 버렸다.
“집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지저분할 수도 있어요. 일단 들어오세요.”
마리아의 집은 말레꼰 해변을 바라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두니 바다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집안으로 불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집안에 걸려 있는 커튼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집안 곳곳에는 마리아의 가족사진, 공연사진들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자라오고 살아왔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백인여자와 흑인남자 사이에 어린 여자아이가 앉아 있는 사진을 발견한 명학은 유심히 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의 아이는 마리아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되었다. 그 모습을 본 마리아는 말했다.
“저의 부모님입니다. 그리고 저의 어린 시절 모습이에요. 둘 사이에서 제가 태어났어요. 지금은 두 분 모두 이 세상에 안 계세요.”
“아. 그렇군요. 어쩐지 마리아가 약간...”
“네. 저는 백인과 흑인의 혼혈이죠.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음악을 하시던 분이셨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연장에서 우연히 만나서 서로 사랑에 빠지셨는데, 어머니 집에서 결혼을 반대하셨어요. 백인여자가 흑인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죠. 결국 어머니는 집을 나오셔서 아버지와 사셨고 제가 태어나게 되었어요. 어려서부터 저는 두 분에게 음악을 듣고 배우면서 자라게 되었죠. 그러다가 어머니가 아프셔서 돌아가시게 되었고, 아버지도 몇 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마음이 많이 슬펐겠군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셨던 분들이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죠. 슬픔이 치유가 되었어요. 그 슬픔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제가 클럽 뜨로삐까에서 더 열심히 일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안드레아가 저희 클럽에 처음 오셨을 때도 저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죠. 쿠바음악과 스페인어가 아직 완전하지 않아 보였던 안드레아를 가르치면서 저는 온 정성을 쏟았어요. 무엇인가에 몰두해야만 슬픔을 잊을 수가 있었거든요. 다행히 안드레아가 저의 가르침을 당시에 잘 따라오셔서 저의 입장에서는 가르치는 기쁨을 많이 느낄 수 있었어요.”
그 말을 들으니, 명학은 가끔씩 마리아의 눈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을 보곤 했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때 왜 그녀가 수업 도중에 저런 모습을 하였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둘은 이른 저녁을 먹고 집을 나와서 말레꼰 해변으로 걸어 나왔다. 해변을 따라 둘은 말없이 걷기 시작하였다. 명학은 어느 순간 마리아의 손을 잡았다. 마리아는 그를 바라다보았고, 일몰을 준비하는 바다의 석양은 그녀의 머리 뒤에서 후광의 빛을 더해 주고 있었다. 파도가 한 번씩 벽에 부딪쳐서 물보라를 높게 만들면 그 주변의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집중해 있었던 명학과 마리아에게도 그 물보라가 떨어져서 둘은 갑자기 꼼짝없이 물세례를 당하였다. 처음에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가 몇 초 뒤에 서로를 바라보며 낄낄대며 웃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그들의 발걸음은 해변의 끝부분에 도착하였다. 거기에서는 거리의 악단들이 외롭게 연주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연주에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기를 되풀이하였지만 그들의 바쁜 일상은 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명학과 마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거리공연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노인들로 구성된 악단이었고, 그들의 인생경력만큼이나 음악은 들떠있지 않고 성숙한 느낌을 주었다.
악단의 리더처럼 보이는 노인이 말했다.
“저희들은 쿠바 남부에 있는 씨엔푸에고스 출신입니다. 하바나가 제2의 고향이긴 하지만, 저희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저희 어린 시절 자랐던 장소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희 고향에 관한 노래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들의 노래와 연주 실력은 상당하다고 명학은 생각하였다. 세, 네 명의 보컬들이 서로 다른 화음을 이루며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베이스와 트럼펫의 솔로 연주는 클럽 뜨로삐까의 전속 연주자들에 비하여 전혀 손색없이 훌륭하였다. 놀라고 있는 명학의 얼굴을 보고 마리아는 귀에 속삭였다.
“하바나의 거리연주자들의 실력이 어때요? 대단하죠? 가수들도 우리와 비교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아요. 전문적으로 음악을 배우신 분들이 아니어서 약간 정교함은 떨어지지만, 그것은 그들의 음악색깔로 보면 되거든요.”
“네. 대단하네요. 저 노인들은 평생 음악하신 분들처럼 보이네요. 그들 노래와 연주에서 그들 삶이 녹아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저 노인들의 고단했던 삶, 즐거웠던 시간, 때로는 슬펐던 기억들이 모두 저기에 들어 있어요. 노래는 흥겨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인생의 모습이 들어 있어요.”
“네. 제가 젊었을 적에 조선에서 노래를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이 나요. 노래에 가수의 인생이 녹아 들어가야 한다고요.”
“노래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을지라도 기본은 비슷할 것 같다고 생각이 들어요.”
명학과 마리아는 말레꼰 해변의 석양의 절정을 구경하다가 서로 키스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뒤로 한 채, 가로등의 불빛을 따라 걸으며 마리아의 집으로 향하였다. 잠시 후에 그녀의 집 현관 계단에서 그들은 멈추어 섰다. 헤어짐이 아쉬운 듯이 서로는 머뭇거렸다.
“마리아! 오늘은 늦었으니까, 이제 들어가서 쉬세요. 저는 미구엘이 적어 준 주소까지 찾아 가려면 지금은 떠나야 될 것 같아요.”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하였다.
“어쩌면 미구엘 씨가 걱정하겠군요. 잠시 기다리세요. 이런 늦은 밤에 주소를 보고 찾아가려면 힘들죠. 인력거를 부르겠어요. 그 사람들이 하바나의 거리들을 잘 알고 있으니까 쉽게 주소를 찾아 줄 것 같아요.”
그녀는 주위를 살피더니 저 건너편 건물 모퉁이에 대기하고 있는 인력거 일꾼을 향해 손짓하였다. 그러자 몇 대의 인력거들 중에서 한 대가 마리아의 집으로 다가 왔다. 그녀는 인력거 일꾼에게 종이에 적힌 주소를 보여주며 거기로 갈 수 있는지 물었고, 일꾼은 주소를 잠시 보더니 어딘지 알고 있으며 대략 어느 정도 걸리는지를 말해 주었다. 그녀는 일꾼에게 미리 돈을 지불하였다.
“마리아! 고마워요. 덕분에 오늘 밤은 편안하게 집을 찾아 갈 수 있겠네요.”
“내일은 편히 쉬시고 모레 오후에 새 클럽에서 만나요.”
일꾼은 명학의 가방을 받아서 인력거 밑에 넣은 후에 명학이 인력거에 올라타자 바로 출발을 하였다.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 가버리자, 명학은 얼굴을 밖으로 내밀고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한참동안 목을 내밀고 같이 보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가면서 그녀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자세를 잡고 자리에 앉았다. 인력거 일꾼의 뒷모습을 보다가 얼굴을 돌려 인력거가 지나가고 있는 거리의 야경을 감상하다가 그는 어느새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저기요! 선생님. 종이에 적혀있던 주소에 다 왔어요.”
인력거 일꾼이 깨우는 소리에 그는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가까이서 일꾼의 얼굴을 보니 스무 살이 채 되지도 않아 보이는 젊은이였다. 그에게서 가방을 받아서 인력거에서 내렸다. 일꾼은 다시 밤이 머물고 있는 거리 속으로 달려가더니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건물 입구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어느 뚱뚱한 부인이 문을 열고 그를 바라보았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이 집에서 미구엘씨와 같이 살게 될 안드레아라고 합니다.”
“어서 오세요. 안드레아씨. 미구엘씨에게 얘기를 들었어요. 어쩌면 오늘 밤에 들어오실 수도 있다고요. 두 분이 계실 곳은 삼층에 있어요. 들어오셔서 이 계단을 이용하시면 되요.”
그는 가방을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삼층에 도착하니 봉수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래도 여기에 잘 찾아 왔네! 나는 네가 어쩌면 오늘 밤에는 안 들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봉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명학은 낯이 약간 붉어지면서 대답했다.
“무슨 생각하시고 계셨어요? 새로운 집에 이사 들어온 첫 날인데 외박하면 되겠어요?”
“아이구야! 알었따! 얼른 씻고 너도 푹 쉬어라. 많이 피곤할 텐데 말이여.”
불을 끄고 둘은 각자의 침대에 누웠다. 잠시 후에 봉수가 말을 걸었다.
“명학아! 자냐!”
“아니오. 잠이 안 오네요. 형도 잠이 안와요?”
“그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잠이 잘 안 오는 것 같아. 너는 거기서 오늘 자고 오지 그랬냐? 뭐 땀시러 이렇게 들어왔냐?”
“무슨 말을 해요? 저와 마리아는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에요. 그런데, 마리아 집에 걸려 있는 사진들을 보고 같이 얘기를 나누어 보니까, 마리아도 아픔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랬구나. 아무튼, 마리아에게 잘 해 줘.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는데 말이여. 마리아는 보기에는 쌀쌀맞게 생겼지만 참 착한 여자여. 그런 여자는 너 같이 착한 남자를 좋아하거든. 너하고 마리아는 아주 잘 어울린다.”
명학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다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봉수형! 항상 고마워! 언제나 나한테 잘해 줘서 말이야.”
“내가 너밖에 더 있냐? 그리고 네가 착한 놈이니까 내가 잘 해주지. 아니었으면 너는 내 손에 벌써 죽었다. 아니다. 내가 말을 너무 무자비하게 해 버렸어라. 암튼, 조선 떠나서는 너하고는 가족보다 더 진한 사이가 되어 버렸지. 이제 너한테는 예쁜 마리아도 생겼으니 앞으로는 하바나에서 잘 정착해라. 마리아가 이제 제수씨네. 크크!”
키득키득 웃고 있는 봉수를 바라보며 그가 명학에게는 친구이자 친형이며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카리브 해의 밤하늘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부에노비스타 소셜클럽
콜럼버스가 3척의 배를 이끌고 1492년에 지금의 바하마, 쿠바가 있는 카리브 해 지역의 섬들에 상륙하였고 이를 이후에 세상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라고 하였다. 그가 기록한 항해는 이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오는 나침반 역할을 하였다. 쿠바는 한동안 유럽인들에게 신대륙 진출의 관문역할을 하면서 급속도로 성장을 하였고, 19세기 초에는 하바나는 신대륙에서 3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쿠바의 경우 원래 살았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과 같이 들어 온 전염병으로 대부분 죽게 되었고, 쿠바의 사탕수수 등 대농장을 운영하기 위해서 아프리카 서부해안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대거 이주시키기 시작하였다. 노예들은 다른 누군가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기본적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옥 같은 일상을 보내야만 했었다.
다행히 백인 기득권층에 속했지만 양심적인 지성인들도 있었다. 시인이자 쿠바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일컫어지는 '호세 마르띠니'의 평등, 박애주의 사상은 훗날 노예의 해방,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쿠바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는 원래 각각 변호사와 의사로서 삶을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혁명가로서 변신한 것은 호세 마르띠니의 사상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회고하였다.
1886년에 쿠바는 신대륙에서 마지막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하게 되었다. 농장에서 해방된 흑인들은 일거리를 찾아 대도시인 하바나로 점차 모여 들면서 그들의 음악들은 이후 쿠바음악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노예제는 없어졌지만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차별과 분리는 여전히 이루어졌고, 1959년 쿠바혁명 이후 들어선 카스트로 정권에 의해서 강력한 인종차별 철폐 정책이 시행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음악클럽도 백인들이 이용하는 곳들과 흑인들이 이용하는 곳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흑인들 음악클럽은 음악연주자들에게는 백인들 클럽에서 연주하는 것에 비해서 돈벌이가 되지 않았지만, 연주자 자신들이 모여서 진정으로 음악을 즐기면서 연주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30~1950년대 동안 하바나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흑인들의 음악클럽으로는 마리아나오 소셜 클럽, 유니온 프래터날, 클럽 아떼나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등이 있었다. 클럽들에서 이루어지는 연주를 모두 합치면 매일 공연이 있었고, 뮤지션들은 클럽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였다,
명학은 건물에 붙어 있는 주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종이에 적은 주소와 일치하는지 확인하기를 되풀이 하였다. 몇 십분 정도를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찾던 건물에 도착하였다. 그 곳은 목재로 만든 건물이었고, 입구에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 맞아요! 드디어 찾았어요. 봉수형!"
"그래? 여기가 맞냐? 한참을 찾아 헤맸네. 낮에 왔는데도 이렇게 찾기 힘든데, 밤에 왔더라면 찾았겠냐?"
봉수는 오늘따라 피곤한지 명학의 뒤에 처져서 겨우 따라오고 있었다. 둘은 건물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누군가 테이블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를 향해 명학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죠? 저는 안드레아입니다. 로드리게스 씨의 소개로 이곳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은 고개를 들고 명학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깐 생각을 떠 올리는 것 같더니 이내 대답을 하였다.
"아! 반갑습니다. 안드레아씨. 저는 여기 지배인인 곤잘레스입니다. 로드리게스 씨에게 여기에 찾아오실 예정이라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오늘인줄 제가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걱정 마세요! 나중에 연주하러 올 단원들과 한번 호흡을 맞춰 보시면 되십니다. 같이 오신 분은 혹시 미구엘 씨인가요?"
"네. 맞습니다. 지가 미구엘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기 클럽에서 연주하는 음악이 아주 좋다고 칭찬을 많이 하더라고요. 클럽 뜨로삐까의 연주자 친구들이 저에게 여기 클럽 얘기를 많이 했어요."
"아. 그러던가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두 분 모두 클럽 뜨로삐까에서 생활하셨을 때와 비교하면 여기 시설이나 사례금은 좀 열악한 편입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거기에 비해서 전혀 떨어지지 않죠! 뜨로삐까 음악인들도 우리 클럽에 가끔 와서 어울려 연주하고 가는 편이죠."
곤잘레스는 명학과 봉수가 클럽 뜨로삐까의 전속 단원이었다는 사실을 다소 의식하는 듯하였다. 그곳에 비하여 흑인사회의 음악클럽은 그들에게 돈을 충분히 줄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명학은 말했다.
"세상에 돈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즐거움이죠. 부에나비스타가 저희에게 그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저희들은 충분히 행복할 것입니다. 아참! 그리고 마리아라는 여자 분이 왔었나요?"
"마리아는 아직 도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우리 클럽을 이전부터 잘 알고 있으니 아마 조만간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리아가 우리 클럽에서 앞으로 노래를 많이 불러 줄 수 있으면 저희로서는 대단한 영광입니다. 아주 훌륭한 가수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원들이 오기 전까지 편안하게 쉬고 계세요."
명학은 클럽 안을 둘러보았다. 홀 안의 벽에 걸린 사진들을 구경하였다. 1932년에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 시작되었는지, 사진 속에는 몇 명의 연주자와 설립자인 듯 한 사람들이 1932년이라는 로고를 들고 있었다. 다른 사진들 속에는 유명한 뮤지션들이 있었다. 이스라엘 로페즈, 마라빌라스 악단, 오케스트라 멜로디아스의 사진들과 더불어 로드리게스 씨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사진들의 모습은 이곳 클럽과 그 음악인들이 많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그들이 이곳에서 연주했던 모습도 담고 있었다. 그러한 사진들을 보면서 명학은 이곳이 시설은 허름하지만 음악적으로는 세계 어느 곳의 훌륭한 뮤직홀에 비해서 손색이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봉수형! 이 사진들 봤어요? 여기서 연주하는 사람들이 지금 쿠바에서 음악적으로 아주 실력 있는 사람들이었네요."
"그래. 나도 보고 있었다. 우리가 클럽 뜨로삐까에만 갇혀 있어서 뜨로삐까 이외의 음악클럽을 몰랐것지! 흑인사회의 음악클럽 연주 실력이 아마 엄청날거여. 어쩌면 우리가 제대로 찾아 온 것 같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마리아가 나타났다.
"두 분 말씀들이 맞아요. 여기 흑인사회의 클럽들은 뜨로삐까에 비해서 전혀 모잔란게 없어요. 뜨로삐까와 같은 백인사회의 음악클럽에서 연주하는 흑인 뮤지션들도 시간을 내어서 여기에 와서 연주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저도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아버지를 따라서 여기에 몇 번 와서 같이 공연을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이곳에 와서 친한 뮤지션들과 같이 공연을 몇 번 한 적이 있어요. 안드레아와 미구엘 씨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실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마리아! 언제 왔어요?"
명학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도착했는데, 안드레아와 미구엘이 홀에 걸린 사진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어요. 사진들을 보며 많은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요. 먼 훗날, 여기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은 아마 쿠바음악의 전설적 공간으로 남을 거예요. 지금은 백인사회에서 쿠바 흑인들의 음악을 공식적으로 받아 주지 않고 있지만요.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백인들도 우리들의 음악을 지금도 많이 듣고 있어요. 다만 그들이 흑인들과 같이 섞이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뭔가 심오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고 있는 듯 했다. 셋은 자리에 앉아서 계속 이야기를 하였다. 마리아는 명학과 봉수에게 쿠바음악이 현재 흘러가고 있는 모습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다. 1920년 초부터 시작된 손 음악의 열풍은 이제 점점 가라앉고 있는 추세이고, 음악밴드에 더 많은 악기들이 보강되고 있어서 콘훈토와 같은 빅밴드의 추세로 가고 있다고 하였다. 로드리게스씨도 이 같은 추세에 따라가고 있으며 때로는 리드를 하고 있었다. 미국의 재즈가 영향을 미치며, 쿠바 음악에도 여러 실험적 요소가 이미 시도되고 있었다. 차랑가와 단손과 같은 쿠바음악에는 오케스트라 형식의 밴드 구성이 이루어졌고, 쿠바적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프리카 리듬을 만들어 줄 수 있는 타악기들이 여전히 같이 연주되고 있었고, 콩가와 같은 타악기도 추가되고 있었다. 명학과 봉수는 마리아의 설명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 흑인사회의 음악클럽에서 연주하는 시간들은 진행되고 있는 음악적 변화들을 모두 체험시켜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초저녁이 되자 다른 음악인들이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 모여 들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마리아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마리아는 명학과 봉수를 그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들은 둘을 환영해 주었다.
"안드레아씨와 미구엘씨는 부에나비스타에서 처음 연주해 보시는거죠? 뜨로삐까의 전속 단원이셨으면 실력은 이미 인정이 되셨으니까 저희들과 충분히 여기에서 호흡을 맞추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직 저희들이 배울 것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얘기해 주세요."
"오늘은 마리아의 노래부터 시작해 볼까요? 그녀의 노래를 듣기가 쉽지 않은데, 오늘 다함께 모였으니 노래를 들어 보죠."
마리아는 '라 빨로마'(비둘기)라는 곡의 연주를 부탁하였다. 스페인 작곡가 세바스띠안 이라디에르가 1850년대 중반에 쿠바를 여행하던 중에 쿠바의 민속음악인 '하바네라'라는 음악장르 곡을 우연히 듣고 반해 버렸고, 그 리듬을 기억하였다가 유럽에 돌아온 이후 이 곡을 작곡하였고, 이후 수많은 뮤지션들에 의해 편곡되어 계속 불리 지어지는 노래였다.
"배를 타고 하바나를 떠날 때
나의 마음 슬퍼 눈물 흘렸네.
사랑하는 친구여 어디를 갔느냐.
바다 건너 저편 멀고 먼 나라로
천사와 같은 비둘기 오는 편에
전하여 주게. 그리운 나의 마음.
외로울 때면 너의 창가에 서서
당신의 예쁜 노래를 불러 주게
아, 키니타여, 사랑스런 너 함께
가리니. 내게로 오라,
꿈꾸는 나라로..."
* 아래에 공유된 La Paloma(비둘기)는 빅미마 신연아의 버전이며 영화 내머리속의 지우개의 ost입니다.
봉수의 봉고연주가 초반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3~4곡이 더 이어서 연주되면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홀은 어느새 음악을 들으러 온 관중들로 가득 메워져 갔다. 흥겨운 음악에 맞춰서 사람들은 룸바, 와왕코 등의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클럽 뜨로삐까에서 느껴보지 못한 흥겨움을 즐기면서 명학과 봉수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하고 있었고, 그들의 흑인사회 음악클럽의 첫날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
부에나비스타에서의 연주가 모두 마친 후에 클럽을 나왔고, 밤이 너무 늦어서 명학은 마리아를 집에까지 바래다주기로 하였다. 마리아 집의 현관에 도착하자 명학은 그녀의 뺨에 입맞춤을 해주고 작별인사를 하며 돌아서서 집으로 향하려 하였다. 그때 마리아는 그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여기에 계셔 주시겠어요?"
그는 그녀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뭐라고 대답을 하는 게 맞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단 그녀를 보기 위해 돌아 섰다. 마리아의 깊고 큰 눈은 명학의 눈을 놓치지 않고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잠시 피하였다.
"그렇게 서 계시지 마시고 들어오세요."
마리아는 명학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거실에 램프를 켜고 따뜻한 차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찻잔을 들고 차를 입안으로 조금 들이켰다.
"오늘 부에노비스타에서 공연은 너무 좋았습니다. 뜨로삐까와는 다른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공연료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부에노비스타에서 공연하는 것이 훨씬 즐거울 것 같다고 생각이 드네요."
명학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오늘 있었던 일부터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해 버렸다. 마리아는 몇 마디 대답을 하다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 왔다. 그리고는 그의 입에 키스를 하였다. 둘의 키스는 오랫동안 이어졌고 명학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마리아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그들은 잠시 후에 마리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리아! 믿기 어려울 것 같지만, 저는 당신이 제 인생에 처음입니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명학을 안아 주었다. 그의 몸은 조선, 멕시코를 거치며 쿠바에 와서 드디어 어느 여인의 품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음악을 제외하면 그 수십 년의 시간들은 그에게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시간들이었다. 낯설었던 쿠바라는 땅에 와서 자기를 사랑해 주는 여인을 만나리라는 것은 도저히 상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어느 날 봉수는 명학을 바라보고 말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방이 좁지 않냐? 그래서 말이여. 누군가 한 놈은 나가야 될 것 같아."
봉수는 빙긋이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너는 이제 마리아와 같이 지내야 할 것 같다. 여자 혼자 살고 있으면 다른 남자들이 괜히 찝쩍대고 그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마리아와 같이 살아라. 내 걱정 말구!
명학은 말이 없었다. 20년 넘게 동고동락 했던 봉수와 이제 같이 살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큰 변화였던 것이었다.
"우리가 아예 헤어지냐? 그냥 네가 이제 마리아와 같이 살게 되는 거지. 아주 착하고 의외로 마음이 여린 여자이니까, 명학이 네가 잘 챙겨 줘야 된다. 나도 누군가 생기면 따로 살림 차릴 거여..크크..."
명학이 봉수와 같이 살던 집을 떠나던 전 날 밤에 봉수는 명학의 짐을 직접 챙겨 주었다. 다음 날 명학은 짐을 들고 건물을 나와서 마라아의 집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