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학은 마리아와 같이 살게 되면서 꿈같이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시작되었고, 공연이나 연습이 없는 날에는 황혼에 물든 말레꼰 해변을 마리아와 손을 잡고 걷는 시간은 명학에게는 언제나 설레는 순간이었다. 가끔씩 드는 생각은 인생의 황혼 길에 접어 드는 시점에서 그녀와 만나게 된 것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잠이 들어 다시 눈을 뜨면 자신이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의 그물침대에 누워 있고 그 지옥 같았던 노동의 현장으로 다시 나가는 악몽을 꾸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때 마다 옆에 누워 있는 마리아의 잠든 모습을 보고는 다시 안도의 한숨을 쉬곤 하였다. '이 행복이 언제까지 이어질까?'라는 걱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오를 때도 있었다. 그때는 명학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설령 내일이 나의 인생의 마지막이 될 지라도 지금 이 순간은 마리아를 사랑해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 않을까?'라고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을 해 보곤 하였다.
부에나비스타 클럽을 비롯하여 흑인사회의 다른 클럽에서도 공연을 하면서 많은 실력 있는 음악인들과 많이 만날 수가 있었다. 명학은 가수로서 여러 다른 밴드들의 공연에도 참여하였고 그들과 호흡을 맞추어 나갔다. 때로는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유흥시설에 공연을 하러 가야하는 경우도 생겼으나, 마리아는 명학이 그런 곳에서 음악을 하는 것이 내기키 않은 듯 했다. 마리아에게만 생계를 너무 의존하는 것이 명학으로서는 불편하였으므로 그녀와의 생활에서 도움을 주고자 돈벌이가 되는 다른 유흥시설에서 노래를 불러 주곤 하였다. 그런데, 그런 유흥시설은 암암리에 손님들을 상대로 윤락업도 겸하고 있는 장소였다. 명학은 가수로서 단지 무대에서 노래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가능한 그런 곳에는 가지 말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 업소의 음악은 아주 흥겹고 가사내용이 더 솔직한 것이 많았다. 음악적으로는 '과라차'라고 하는 장르에 속하는 것이었고 리듬이 아주 빠르고 쾌활한 편이었다. 같이 돈을 벌러 갔던 봉수는 솔직하고 유쾌한 가사로 기분 좋게 빠르게 흐르는 멜로디와 리듬에 맞추어 연주하는 분위기의 음악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봉수로서는 돈도 더 벌 수 있고, 자신이 마음에 드는 음악을 할 수 있는 곳이었고, 명학처럼 자신을 간섭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그런 유흥시설에서 연주하는 것을 더 즐겨 하였다. 봉수가 혼자서 그런 곳에서 음악 하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어서, 명학도 봉수를 따라서 같이 가서 노래를 불러 주었다. 명학도 과라차 음악을 접하면서 점점 그 분위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음악의 한 장르로서 그러한 노래를 불러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봉수는 그 곳에서 한 쿠바 여자를 만나서 사귀게 되자, 그 업소에서의 공연이 더 잦아지게 되었다.
* 과라차 장르의 음악을 들어 보시기를 원하는 독자분들께 아래의 링크를 공유해 드립니다. 링크된 '셀리아 끄루즈'라는 쿠바 출신의 유명한 여자 가수가 부른 'La vida es una carnival'(인생은 하나의 카니발)이라는 곡이며 과라차 리듬이 가미된 곡입니다.
"안드레아. 당신이 요즘 프랑스인 여자 마담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공연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제가 당신에게 거기서 음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명학은 그녀가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드디어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였고 설명을 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요. 마리아. 당신이 나더러 그런 곳에서 노래를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어요. 그곳은 부에나비스타 클럽들에 비교해서 상업적인 곳이 맞아요. 클럽 운영자는 돈을 벌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하는 곳이죠. 하지만, 그 곳의 음악들이 저속하다고 당신이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과라차 음악들도 쿠바 음악의 하나라고 생각이 들어요."
"안드레아. 저는 당신이 그곳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지금 부자는 아니지만,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먹고 살 수 있지 않나요?"
"그렇지요. 맞아요. 하지만, 내가 벌어 올 수 있는 돈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뜨로삐까 클럽으로 돌아 갈 수 없는 처지에서 저는 그러한 곳이 대신에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고생하는 것을 조금 덜어 주고 싶거든요."
"안드레아의 마음을 알아요. 뜨로삐까에 있을 때 보다 우리의 수입이 많이 줄어 버렸죠. 그리고 미구엘이 거기에서 연주를 많이 하니까, 당신도 그를 따라서 자주 가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둘은 저를 만나기 이전부터 가족같이 이십년 넘게 지내온 관계이니까요."
"마리아. 당신은 정식으로 어려서부터 음악교육을 체계적으로 배워온 사람이에요. 하지만, 나와 미구엘은 그렇지 못했어요. 솔직히 거리에서 행해지는 평민들의 음악소리에 반하게 되었고, 그 소리들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과라차 음악들이 저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줄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마리아! 이거 하나만 분명히 약속할 수 있어요. 이 세상에 어떤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고 저를 믿어줘도 됩니다."
명학은 말을 마치고 마리아를 껴안았다. 그 뒤로 봉수가 음악을 하는 그 클럽에 여러 번 노래를 하러 갔었고, 몇 달 뒤에는 모아 둔 돈으로 마리아의 아버지의 고향인 '산디아고 데 쿠바'에 둘은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제는 봉수가 명학이 없어도 그 클럽에서 혼자 연주하고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확신이 들었고, 명학은 마리아가 더 이상 걱정하지 않도록 더 이상 그 클럽에서는 노래를 하지 않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기차역에서 열차 좌석을 배정받은 후에 명학은 가방들을 들고 마리아와 함께 열차로 걸어갔다. 다른 쿠바사람들이 플랫폼에 서서 하바나를 떠나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배웅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사이와 같이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우는 사람도 있었다. 둘은 그들의 좌석이 있는 열차 칸에 올라탔다. 이미 승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지나서 열차는 천천히 출발하기를 시작하였고 점점 속도를 붙여 나갔다. 열차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하바나 시내의 모습을 둘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으며 잠시 후에 하바나의 풍경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시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바나를 정말 오랜만에 떠나 보네요. 그동안 너무 정신없이 살아 왔던 것 같아요."
마리아는 창가에서 눈을 떼고 명학을 바라다보며 말했다. 명학은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래요. 이번 여행 동안 당신이 충분한 휴식을 가졌으면 해요. 산티아고에는 언제 마지막으로 갔었죠?"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과 갔던 것이 마지막이었어요. 아버지 가족들과 친척들을 볼 수 있었죠. 저에게 사촌형제가 되는 또래의 아이들과 놀았던 기억도 있고요. 몇 년 전에는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러 친척들이 하바나에 왔었요."
"마리아에게는 아버지의 고향이군요. 산티아고 데 쿠바가요."
"네. 흑인사회의 뿌리가 되는 곳이 그 곳이죠. 어머니의 가족들과는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있죠. 백인들이어서 저하고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재산을 저에게 조금 물려주셨어요.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집안의 반대로 집을 나가신 이후에도 외할아버지 몰래 어머니와 연락하시고 우리 가족을 물질적으로 도와 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혼자가 된 이후에 외할머니는 많이 저를 도와 주셨어요. 그것 때문에 저의 백인 친척들은 저를 몹시 싫어하게 되었죠. 이제 다 지나간 이야기네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 쪽 친척들과 마음으로 더욱 더 가까워진 것인 줄도 몰라요."
"그렇군요. 제가 마리아에게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지만, 이제 남은 인생을 당신을 사랑하는데만 쓰겠습니다. 당신이 받은 상처와 고통을 제가 다 가져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아는 명학의 손을 잡았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도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안드레아는 그 동안 어떠한 삶을 사셨어요? 한 번도 얘기해 준 적이 없어서 궁금하기도 해요."
명학은 그녀의 질문에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난처하였다. 잠시 침묵을 가지다가 대답하였다.
"저는 꼬레아의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미장장이었어요. 음. 쉽게 생각하면 벽돌공이죠. 벽돌을 쌓는 그런 일을 하는 분이셨죠. 집에서는 제가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길 원했죠. 하지만, 저는 아버지만큼 일을 잘하지는 못 했어요. 노력하였지만 어려웠죠. 그러다가, 세상을 유랑하며 음악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고, 그 소리를 배우고 싶어서 어느 날 집을 떠났죠."
"그럼 그 이후로 한 번도 고향에 가신 적이 없나요?"
"네. 유랑 음악인들과 다니면서 꼬레아 전역을 여행하였죠. 그때 미구엘을 만나게 되었고요. 그러다가 유랑 음악단을 떠나게 되었고, 노래를 가르치는 분을 찾아가 노래를 몇 년간 배웠죠. 이후에는 예기치 않게 문제가 생겨서 모든 것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 갈 생각을 했었죠. 하지만 제가 당시에 급하게 선택한 것은 멕시코에 일하러 가는 배를 탄 것이었어요."
"그래서, 쿠바에 오기 전에 멕시코에 있었던 거였군요."
"네. 천명 넘는 꼬레아 사람들이 멕시코에 일하러 가는 배를 탔어요. 태평양이라는 난생 처음 본 큰 바다를 건너게 되었어요. 멕시코에 도착해서 다시 기차로 갈아타서 대륙을 횡단해서 멕시코 만이 바라다 보이는 마딴사스 지방까지 가게 되었죠. 그곳에서 4년 동안 에네켄 농장에서 일을 하고 다시 그곳을 떠나서 베라끄루쓰에서 10년 정도를 보내다가 쿠바로 오는 배를 타게 되었죠. 베라끄루쓰부터는 미구엘과 매일 생활하였죠."
"미구엘과는 인연이 깊은 사이네요."
"네. 저에게는 미구엘은 친구이자 형이며 아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미구엘이 앞으로는 쿠바에서 행복한 생활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미구엘도 그 동안 수십 년간을 고생하였으니 앞으로는 충분히 행복한 삶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이 드네요. 안드레아도 마찬가지구요."
"쿠바에 도착해서는 마딴사스에서 농장생활을 하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로드리게스 씨를 만나게 되어 하바나로 오게 되었죠."
"안드레아가 앞으로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제가 곁에서 잘 도와 드릴께요."
"고마워요. 마리아. 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 전에 당신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저에게는 제일 큰 축복입니다."
열차가 달리다가 다른 역에서 멈추고 다시 달리기를 되풀이 하면서 몇 시간이 흘렀다. 몸이 이제는 앉아 있기가 힘들어질만큼 오랜 시간을 열차는 이동하였다. 열차가 까마구에이에 도착하자 둘은 짐을 들고 기차에서 내렸다. 까마구에이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에 다음 날에 산티아고로 가는 열차를 타기로 하였다. 기차역 주변에는 인력거들이 기차에서 내리는 승객들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 중 하나에 둘은 올라타고 시내의 호텔로 향했다. 스페인의 식민지 시절에 지어졌던 오래던 건축물들과 도로들은 잘 보존이 되어서 하바나와는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력거 위에서 시내의 풍경들을 감상하다가 한 호텔에 내렸다. 인력거꾼은 가방을 내려다 주었고 명학에게 돈을 받고는 다시 다음 손님을 찾아서 거리로 사라졌다. 까마구에이는 하바나에 비해서는 도시의 규모는 작았지만 쿠바 중부 지방의 제일 큰 도시로서 손색은 없어 보였다. 우선 도시의 미관이 무척 아름다웠고, 사람들과 차로 북적거리는 하바나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제가 가 보았던 곳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도시인 것 같아요. 여기에 하루를 보내고 가자고 마리아가 제안했던 것이 이제는 이해가 되요."
"네. 까마구에이는 쿠바에서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에요. 저도 여기에 처음 와 보았어요. 산티아고까지 여행하면서 이곳을 이번에는 한번 와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둘은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기 전까지 인력거꾼을 반나절 고용해서 까마구에이를 이곳저곳 구경하였다. 거리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연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음악은 전문연주자들에 비하여 소박하였지만 연주자들과 그 주위에 모여든 관중들이 음악소리와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은 어느 다른 곳에 비하여 손색이 없어 보였다. 둘은 다음 날 호텔에서 역으로 이동하여 산티아고로 가는 열차를 탔다. 몇 시간을 이동하였고 드디어 산티아고 데 쿠바에 열차는 도착하였다.
산티아고는 쿠바의 수도가 하바나로 옮겨가기 전까지는 옛 수도였고, 카리브 해를 바로 앞에 바라보고 있는 항구도시였다. 건물들은 옛 수도로서의 외관을 유지하고 있었고, 쿠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답게 거리를 활발히 걷고 있는 사람들로 메워져 있었다. 둘은 인력거에 몸을 싣고 마리아의 큰 삼촌이 살고 있는 집으로 먼저 이동하였다. 집에 도착하자 큰 삼촌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 나와서 마리아를 기쁘게 반겨 주었다. 그리고는 마리아가 명학을 가족들에게 소개해 주자 그들은 다시 명학을 끌어안고 뺨에 키스를 해주면서 따뜻하게 환영하여 주었다. 그들에게 명학은 마리아의 약혼자라고 소개되어졌고, 마리아는 명학의 눈을 바라보았고, 그도 그녀에게 고개를 끄떡이며 긍정의 의미를 표시하였다. 마리아가 산티아고에 온다는 얘기를 듣고 산티아고에 사는 거의 모든 친척들이 모여 들었고, 멀리는 관타나모에서까지 친척이 왔다고 하였다. 그녀가 어머니의 가족들에게는 외면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가족인 흑인사회로부터는 어떠한 사랑을 받아 왔는지를 명학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대가족이 모인 자리는 마치 잔치와 같았고 마리아의 큰 삼촌 집에서 만든 온갖 음식들이 야외에 자리 잡은 큰 식탁에 차려졌다. 모두들 사는 것이 그리 넉넉하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한 날이라 생각하고 마리아와 그녀의 약혼녀로 소개된 명학을 위해 정성껏 식사를 준비하고 즐겼다. 명학은 그들과 같은 흑인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를 따뜻하게 환영하였고, 마리아와 결혼할 사이로 생각하고 그들의 식구로 대해 주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친척들 중에 몇 명이 기타, 봉고, 마라카스, 트럼펫으로 음악을 연주해 주었고 마리아는 그 음악에 맞추어서 노래를 해 주었다. 마리아는 노래 도중에 명학을 부르는 즉흥적인 가사를 넣었고, 명학은 그녀의 부름에 답하여 즉흥적인 가사로서 노래를 이어 나가 주었다. 그녀의 친척들 모두는 둘의 노래에 환호를 지르면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다음 곡으로 음악이 이어지자 그녀의 친척들이 노래를 대신 불러 주었고 마리아와 명학은 같이 춤을 추었고, 둘은 다른 사람들과도 같이 어울려서 춤을 추었다. 명학은 춤을 잘 추지는 못했지만 리듬에 몸을 싣고 그녀의 친척들과 같이 돌아가며 흥겹게 춤을 추었다.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의 첫날밤은 그녀의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따뜻하고 격한 환영을 받으면서 저물고 있었다.
지금의 이 길
1924년에 쿠바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마차도 모라랄레스 대통령은 약 10년 동안 독재정치를 하다가 1933년 바띠스따의 반란에 의한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막을 내렸다. 바띠스따 정권은 쿠바의 중산층과 자국 노동자들에 대한 유리한 정책을 펼쳤고, 그 중 하나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하여 일 년 중 일정기간은 노동을 강제로 금지하는 '노동정지법'이었다. 자국의 노동자들에게 취업의 우선권을 주는 이 새로운 노동법에 의하여 쿠바 국적이 아니었던 외국인들은 취업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다.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경제공황의 여파로 일자리의 부족은 일시적 현상으로 여겨졌지만 이 노동정지법은 이후 계속 시행이 되었다. 쿠바의 사업주와 외국인 노동자 간에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근로관계를 다 찾아내어 이 법을 적용할 수는 없었지만, 공식적으로는 모든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 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36년 이후는 점차 쿠바의 마딴사스 지방에도 노동정지 상황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마딴사스에 정착한 조선인들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고, 1942년에는 까르데나스 지방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노동 정지되어 자주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일 년 중 11개월을 일하고 다음 1개월을 무조건 쉬어야만 하는 규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동정지 후 재고용을 할 경우는 사업주가 노동 정지된 외국인을 모두 다시 고용하면 문제가 없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외국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조항도 있었고, 직장이나 자산이 없는 외국인들은 자기 나라로 강제 귀한 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들을 포함한 단순노동을 하는 모든 외국인들은 더 열악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불법적으로 일을 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단속에서 적발될 경우는 벌금과 함께 강제 귀국되는 위험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었다. 1946년에 그라우 산 마르띤의 국수주의 정책에 따라서 까르데나스에는 다시 심각한 노동정지의 바람이 불었다.
1940년에는 쿠바의 헌법이 개정되어서 쿠바태생이 아닌 외국인들의 쿠바 국적 취득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5년 동안 쿠바에 계속 거주하고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외국인이 쿠바 국적을 취득하겠다고 선언 한 후에 1년 이상 경과하면 시민권을 부여하는 내용이었다. 조선인의 경우는 나라가 일본에 합병이 되어서 국제법상으로 일본의 동의가 없이는 쿠바 국적 취득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쿠바국적 취득을 원하는 조선인은 개별적으로 국적취득 과정을 밟았다. 쿠바에 오기 전에 멕시코에 오랫동안 거주를 하였기 때문에 일단 멕시코 국적을 인정받고 이후에 쿠바국적으로 바꾸는 방법이었다. 1945년에는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에서 쿠바 국적으로 바꾸는 방법도 가능하였다. 하지만 노동정지가 정식으로 된 이후에도 편법으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실질적으로는 많은 수의 조선인들은 멕시코 국적을 유지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노동정지라는 억압에 있던 조선인들의 경제 사정은 1959년 쿠바혁명 이후에 오히려 좋아졌다. 카스트로는 혁명이 성공하자 제일 먼저 토지개혁을 시작하였고, 조선인들도 쿠바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일자리를 얻을 수가 있게 되었다.
"명학아. 어제 내가 마딴사스에서 오신 조선인분들을 만났거든. 하바나에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보러 오셨던데 말이여. 우리 조선인들이 농장에서 일자리 구하는 것이 많이 어려워지고 있나 보더라."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된 봉수는 명학을 보고 말을 하였다.
"노동정지가 이미 시작은 되었지만, 암암리에 일하고 있는 외국인들이 많아서 조선인들도 아직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상황이 꼭 그렇지가 않나 보네요?"
"그려. 마딴사스나 까르데나스에 조선인들이 아직 많이 살고 있잖냐? 그런데, 거기 농장에서 일하려는 쿠바 노동자들도 많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일하면 관공서에 신고를 해버려서 단속이 많이 나오게 된 모양이더라."
"남의 나라에서 외국인이 돈 벌기가 쉽지가 않죠. 돈이라도 있으면 사업을 하면 되지만, 대부분은 하루 벌어서 사는 사람이 많죠. 우리도 멕시코에 있을 때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았잖아요? 멕시코 국적 노동자들 일자리를 먼저 챙겨 주니까, 베라끄루쓰에 있을 때 항구에서 일자리 못 구한 날이 얼마나 많았어요. 그래서 쿠바로 오게 된 이유 중 하나인데, 이제는 여기도 상황이 비슷해지네요."
"쿠바에 오면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조선인들이 사정이 딱하게 되어 버렸어. 우리 같이 클럽에서 음악 해 주고 돈 버는 것까지 노동정지인가 뭔가 하는 것이 적용되면 우리도 입에 풀칠하기 어렵것다."
"클럽 주인이나 다른 쿠바 음악인들이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잖아요? 하긴, 하바나에서 음악 하는 외국인이 아직은 많지가 않으니까 그렀겠네요. 근데, 봉수형은 요즘별일 없어요?"
명학은 봉수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잉. 내야 뭐 매일 똑같이 살고 있어. 별일이야 있겄냐?"
"만나고 있는 여자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아. 그 여자 말이냐? 솔직히 그 여자 때문에 좀 머리가 아프다."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반반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얼굴 값 하는 것 같아. 좀 바람기가 많아. 주위의 다른 놈들이 추근덕 거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도 나이 들어 젊은 여자 만나서 무슨 주책인지 모르겄어."
"머리가 좀 아프겠네요. 나는 형이 좋은 여자 만나서 행복했으면 좋겠는데요."
"뭐. 내가 알아서 할텡께. 걱정 하들 말어라. 아니다 싶으면 헤어져야지. 그게 서로에게 좋은 거여. 너는 마리아와 절대 헤어지지 말고 잘 살아라. 그만한 여자는 없는 것이제."
명학은 그날 봉수와의 저녁자리가 편하지가 않았지만, 봉수도 언젠가는 마리아와 같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여자를 만나기를 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봉수는 그 여자와 헤어지고 한동안 방황을 하였다. 술을 마시는 횟수가 증가하였고 술에 못 이겨서 길거리에 누워 자버리는 경우도 생겼다. 그럴 때마다 명학은 봉수가 걱정이 되어서 자주 다니는 술집에 찾아가서 그를 찾았고, 혹시 길거리에 쓰러져 있지는 않은지 주위를 헤맸고, 집에서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결국 어느 거리의 모퉁이에 쓰러져 있는 봉수를 업고 집에 데려와서 침대에 눕혀 주었다. 어느 날, 봉수는 침대에 쓰러진 채, 명학에게 말했다.
"네가 참말로 고생이 많다. 내가 제수씨에게 미안해서 얼굴을 못 보이겠다. 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봉수형. 요즘은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으니까, 거리에서는 잠들지 말아요. 잘못하면..."
"그냥. 죽어 버리면 되는 거지..근데, 오늘따라 조선에 있는 고향생각이 많이 난다. 돌아가신 우리 엄니도 보고 싶고 말이여... 어려서 고향 떠나서 제대로 잘 모시지도 못했는디.. 그래도 임종하시는 모습은 내가 봤다.."
명학은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그동안 봉수는 그에게는 아주 든든한 존재였었다. 연약한 명학을 봉수는 형이나 아버지처럼 챙겨 주었고 멕시코, 쿠바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 봉수와 함께 지냈던 것이 그야말로 매일매일 버티는 힘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봉수가 지금은 정말 약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여자와 헤어져서 저렇게 힘들다고 생각되지만은 않았고, 다른 어떤 것이 그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아무리 강한 봉수였지만 한 번씩은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울고 싶을 때가 있지 않겠는가 느껴졌다.
"이제..내가 술 처먹고 허느적 거리는 것도 오늘 밤이 마지막일 것이여.. 암튼, 네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명학아……."
그런 말을 하다가 봉수는 잠이 들었는지 더 이상 소리가 없었다. 그가 혹시나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 되어서 명학은 그에게 다가가 숨소리를 들어 보았다. 봉수의 거친 숨결은 어느새 조용해졌고, 아기와 같이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잠을 자고 있었다. 평온해진 그의 모습을 보고 명학은 그의 집을 나와서 마리아의 집으로 향했다.
"미구엘씨는 찾으셨나요?"
집에 들어온 명학을 보고 마리아는 말을 걸었다.
"네. 다행히 늘 다니던 길로 걸어갔던 것 같아요. 원래는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 편인데요. 방황이 오래 가네요. 마리아가 좀 이해를 해 주세요. 나는 미구엘이 혹시라도 잘못하여 사고가 날까 걱정이 되어서 요즘은 거의 매일 밤에 확인을 해야 했거든요."
"걱정마세요. 저는 안드레아와 미구엘 모두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사람은 겉보기에는 강한 것 같아도 모두 약한 존재들이에요. 미구엘씨는 지금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고요. 이겨내시리라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 안드레이가 미구엘을 많이 도와주세요."
명학은 마리아의 말이 많이 고맙게 느껴졌다. 최근 몇 달 동안은 봉수 때문에 밤늦게 귀가를 한 적이 많아서 그동안 마리아에게 많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주부터는 봉수는 그 이전의 방황을 떨치고 나온 것 같아 보였다. 이전처럼 눈빛은 살아 있었고, 클럽에서의 연주에서 이전보다 더 열심히 자기 악기를 다루었다.
"형! 오늘은 좀 얼굴이 괜찮아 보여요. 몸이 좀 괜찮아졌나 봐요."
"내가 당장 고향에 돌아 갈 수는 없어도 말이여. 외국에 나와서 어느 길거리 모퉁이에서 죽어 버리는 것은 좀 거시기 하지 않겄냐? 살아 있는 동안은 말이여. 이제 잡 걱정 안하고 즐겁게 살거여. 내가 원래 그렇게 살지 않았냐?"
넉살 좋고 짓궂게 웃는 게 특징인 봉수는 그 특유의 미소를 명학에게 지어 주었고, 명학은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이제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 왔구나 생각이 들며 안심이 되었다.
"오늘 마지막 노래는 내가 주문한 것 좀 불러 줘라. 다른 연주자들에게는 미리 얘기해 놓았으니까. 오늘은 그 노래가 듣고 싶다."
명학은 부에나비스타 클럽에서 노래를 하다가 마지막 곡에는 봉수가 원하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셉텝토 나시오날의 '엘 아디오스 데 에스때 모멘또'(지금 이순간과 안녕)이었다.
명학은 노래를 부르면서 틈틈이 봉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봉수는 이전의 여인을 이제는 영원히 떠나보내는 것처럼 차분히 그의 악기인 콩가를 연주하고 있었고, 음악의 절정부분에서는 마치 신들린 듯이 빠른 손놀림으로 콩가의 가죽부분을 숨 가쁘게 두들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곡이 끝나자, 관중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고, 한곡 더 해달라고 앙코르를 모두가 외쳐대고 있었다. 그러자, 연주자들 중에서 나이든 쿠바인이 다음 곡을 제안하였다. '데 까미노 아 라 베레다'(다른 길로 가지 않을거야! 라는 뜻)라는 곡으로 쿠바연주자들이 봉수를 격려하려는 뜻에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였다. 명학은 알겠다는 표시를 한 뒤에 전주곡이 짧게 흐른 뒤에 어느 지점에서 노래를 시작하였다.
"이봐 친구! 내 말을 들어 봐!
나는 다른 길로 가려고 지금 이 길을 떠나지는 않을거야
그리고 나는 솔직해서
지금 내가 하는 노래로서 그것을 명확하게 할 수 있어..."
연주자들이 봉수를 염두에 두고 그를 위해서 연주하고 있다는 것을 관중들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들은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봉수는 관중들과 하나가 되어서 다른 연주자들과 같이 혼신을 다해 연주하며 음악의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이름이 알려지며 연주자들의 왕래도 잦아지는 장소가 되었으며 흑인사회에서도 실력 있는 음악을 듣고 그에 맞추어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1939년에는 기존에 있었던 장소가 협소해지게 되어서 하바나의 마리아나오 지역의 알메다레스라는 동네로 장소를 옮기게 되었고, 거기에서 20년 넘게 운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유명해진 많은 뮤지션들이 무명시절에 부에나비스타에서 연주를 하는 기회가 늘어나고 있었다. 루벤 이라는 젊은 피아니스트도 그 중 한 명이었고, 그는 젊은 나이였지만 피아노 실력은 이미 나이를 훨씬 앞서고 있었다. 음악적으로 아주 꼼꼼하게 평가를 하는 마리아조차도 그의 실력은 인정을 하였다. 그의 즉흥적인 연주 실력은 미국 본토에서의 어느 재즈 피아니스트 못지않게 대단하였다. 그와 공연해 본 명학과 봉수도 그의 실력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흔히 일어 날 수 있는 짧은 사랑의 흔적들이 루벤 에게도 일어났고, 그의 아이를 임신한 쎌리아라고 하는 무명의 코러스 여가수는 그에게 버림을 받았다. 절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쎌리아는 낙태를 하지 않고 나중에 아이를 낳았고 결국 미혼모로서 힘든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무도 그녀와 아이를 돌보지 않는 상태에서 봉수는 그들을 어느 순간부터 돌보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마치 가족 같은 사이가 되어 버렸다.
"봉수형! 쎌리아와 아기를 잘 챙겨주고 있는 것 알고 있는데, 괜찮겠어요?"
"시골에서 올라와서 어디 의지할 곳 없는 여자 아니여? 누가 챙겨 주겠냐? 루벤 그 놈이 잘 못 한 거는 맞는데, 여기 쿠바는 조선하고 다르게 여자 혼자서 아이 놓고 홀로 키우는 여자들이 많은 것 같아.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 챙겨 주어야겠다고 생각이 들더라. 너무 걱정하지 마라. 쎌리아가 착한 여자여."
"누가 뭐래도 형만 괜찮으면 되는 거죠. 쎌리아가 불쌍하긴 했어요."
"나는 루벤을 탓하지는 않는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일도 생길 수 있는 법이여. 루벤 저 놈은 앞길이 창창한 놈인데, 가족들 거느리면 지 앞길에 방해만 되겄지. 이제 나는 남은 시간동안에 쎌리아와 아기를 돌봐 주면서 살아야겠다. 내 아이가 아니어서 그럴 필요 있냐고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여. 내 아이는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사랑스럽더라. 내가 지 아빠인줄 알고 어느 때는 나한테 아빠라고 부르더라. 크크."
명학은 봉수의 그런 모습이 좀 걱정스럽기도 하였지만, 쎌리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봉수는 이미 떠안으려고 작정한 것이 그의 눈빛에서 느껴졌다. 앞으로 봉수의 그러한 행복이 계속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1940년부터는 명학과 봉수도 성당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카톨릭 신자가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였고, 그들의 여인이 된 마리아와 쎌리아를 위해서 그들도 카톨릭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쿠바는 카톨릭 신자가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였고, 쿠바인들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카톨릭의 문화 속에서 커왔던 것이었다. 그들이 다니는 성당의 미카엘 신부는 외국인이었던 명학과 봉수에게 특별한 애정을 쏟아 주었다. 그들이 저 멀리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를 거쳐 쿠바까지 오게 된 사연을 그들에게 듣고 나서는 그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미카엘 신부도 젊은 나이에 조국인 스페인을 떠나서 대서양을 건너 카리브 해 섬들의 성당에서 신부생활을 하였고 이제는 쿠바의 하바나의 어느 성당에 정착을 하였던 것이었다. 그의 나이는 두 명에 비하여 몇 살 더 많았지만 험난했던 동시대를 살아 왔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세례를 받던 날, 미카엘 신부는 말했다.
"안드레아 형제와 미구엘 형제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형제들이 걸어왔던 길은 고난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오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형제들은 이제부터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믿습니다. 행복한 것이 꼭 물질적으로 부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형제들은 그 동안 살아온 인생을 통하여 충분히 깨닫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두 분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