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이층으로 올라와서 복도 제일 끝에 있는 방으로 우리는 걸어갔다. 건물 복도에는 전구 빛깔의 밝은 주황색 불빛이 벽에 걸린 램프에서 은은히 흘러나오고 있었고, 복도에는 청소와 같은 잡일을 하는 미얀마인처럼 보이는 나이 든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쑥스럽고 불편하여 고개를 숙였지만, 상대방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의 객실 지원 서비스가 필요한 방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방에 들어온 이후에 나는 마사지를 받을 수 있도록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녀는 나에게 마실 것을 뭘로 주문하겠냐고 물어보았고, 방안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로 주문을 하고 나서는 재떨이를 놓아주었다. 이런 곳이 처음이어서 나는 계속 긴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담배 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녀에게도 담배를 권하니 본인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피우는 담배 연기를 한 방에서 맡으며 마사지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녀가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담배를 금방 끄고 나는 자리에 누웠고, 그녀는 손가락 부분부터 마사지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생각보다 영어를 꽤 잘하는 편이었다. 사무실에서 만나는 태국 여직원들은 다소곳한 성격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녀는 전형적인 태국여자와는 달리 계속 나를 응시하며 말을 걸어왔다. 성격이 너무 활기차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일 년 넘게 외국에서 혼자 몸과 마음이 피곤하게 지내고 있는 나에게는 오히려 그녀의 활달함이 더 편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오늘 밤은 기분 좋게 얘기할 수 있는 괜찮은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타고난 싹싹한 성격이 나는 처음부터 좋았다.
"일본인예요? 아니면 한국사람?"라고 그녀는 다리를 마사지하면서 나에게 물어보았다.
"일본 사람처럼 제가 보이나요. 실망이신가요? 한국사람입니다."
"어머. 한국 사람이군요. 태국에 일본사람들이 많이 살거든요. 방콕에도 제법 많이 살아요. 그래서 제가 일본 사람이냐고 물어본 거예요. 호호호. 저 한국 드라마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그리고 전에 한국식당에 가서 음식도 먹어 봤는데 맛있었어요."
"한국 드라마가 태국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모양이군요. 그런데 한국 드라마가 어떤 점이 좋아요?"
"내용이 재미있기도 하고요. 또 뭐라고 할까? 편수가 길어서 좋아요. 일본 드라마는 조금 재미있다 싶어지면 금방 끝나버려요. 근데, 한국 드라마는 재미가 있어지기 시작하면 계속 그 재미를 유지시켜 주며 한참 있다 끝나는 게 좋아요."
"그렇군요. 저는 한국사람이지만 드라마를 거의 안 봐요. 하긴 다른 나라 드라마도 보지 않네요."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여기는 처음 오시는 거예요? 방콕에는 관광 오셨어요?"
"네. 이 마사지 가게는 처음 왔어요. 아. 방콕에 온 것이 처음이냐고 물어본 건가요? 방콕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관광객은 아니군요. 여기서 살고 있어요."
"어머. 방콕에서 살고 있어요? 태국어는 할 줄 아세요? 그래도 저는 영어로 대화하고 싶어요. 손님 중에서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저는 은근히 좋아요. 영어 연습을 할 수 있거든요. 방콕에는 혼자 사세요? 아니면 가족들과 같이 살아요?"
"음. 혼자 살고 있어요. 근데, 영어를 정말 잘하는군요.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죠?"
"호주 남자와 만났던 적이 있어요. 이전부터 영어에 관심이 있어서 영어를 하긴 했는데, 같이 지내면서 많이 늘게 되었죠. 제가 약간 외국어 감각이 있어요. 일본어도 좀 할 줄 알아요. 근데, 혼자 산다고 했죠? 방콕에는 애인이 있어요?"
"애인요? 아직 그런 건 없네요."
그녀와 계속 이어지는 대화 속에 나는 얼버무리며 대답을 하고 난 후,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약간 희미한 조명 밑에 비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갸름하고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하게 이뻤다. 또한 눈매는 고양이처럼 앙증맞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지만, 웃음을 지을 때는 시원하고 서글서글한 면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었는데, 그녀의 웃는 얼굴은 성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마사지를 하던 중에 내가 그녀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는지 나를 쳐다보았다. 동시에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나를 향해 재미있다는 듯이 싱긋 눈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내 안에서 순간적으로 남자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는 기운이 솟구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젊은 나이였지만 그동안 바쁘게 살았던 까닭에 그러한 감정은 오랜만에 느껴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나의 기운을 감지한 듯이 보였고 능숙하게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일부러 또 말을 걸어서 잠깐 동안 조용했던 순간을 깨뜨렸다.
"이름이 뭐예요?"
"내 이름은 장서혁이예요. 외우기 어려울 거예요 그냥 '장'이라고 불러요. 나도 태국 사람들 이름 못 외우겠더라고요. 이름이 너무 길어요. 그래서 다들 애칭이 있나 봐요."
"호호호. 맞아요. 그리고 저의 애칭은 '녹'이에요. 태국어로 새라는 뜻이죠. 저를 다음에라도 만나면 녹이라고 부르세요."
녹이라는 이름이 그녀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단 둘이 있는 이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서 녹은 아름답게 지저귀는 한 마리 새처럼 나의 외로움과 피곤함을 달래주고 있었던 것이다. 녹은 방안의 욕조에 따뜻한 물을 틀었고 물이 욕조 안에 채워질 때까지 나에게 등과 어깨 마사지를 이어서 해주었다. 잠시 후에 그녀의 안내를 받아 욕조에 채워진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갔고, 그녀는 그동안 나가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대중사우나의 탕 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런 편안하고 기분 좋게 노곤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렇게 편한 느낌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태국 현지인과 이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도,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태국 아가씨와 둘만의 공간에서 있는 것도 처음이었다. 물론 손님과 종업원으로 보내는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내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는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안 벽면을 돌아보니 타일이 벗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건물로 들어올 때 봤던 기억으로 이 건물은 오래되었을 것으로 느껴졌다. 여기 마사지 가게는 적어도 여사장이 십 년 이상은 사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런 오래된 건물과 타일이 벗겨져 있을 정도로 낡게 보이는 방안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더 편안함을 주고 있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어린 시절 동네 목욕탕에 가서 물장구를 치던 그런 기억을 떠 올려 주기도 했다.
'이곳의 편안한 분위기에 나같이 외로운 남자는 중독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걱정이 문득 들었지만 지금 이 방안에 녹과 같이 있는 이 시간이 그냥 여기에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떠올랐다. 노곤한 기운이 몰려와서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 안에서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녀가 밖에서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욕조의 난간을 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나서는 모서리에 놓여 있는 큰 타월로 몸을 닦았고 다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문밖을 향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녹! 들어와요. 다 끝났어요."
녹은 문을 열고 들어 오며,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잠시 편히 쉬셨어요? 오늘 하루가 힘드셨는지 많이 피곤해 보이시더라고요. 눈은 조금 충혈이 되셨지만, 아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아요."
"네. 덕분에 오랜만에 제대로 쉰 것 같아요. 집에서 혼자 물을 받아 놓고 욕조에 앉아 있기가 힘들죠. 한국사람들은 사우나를 자주 하는 편인데, 태국 와서는 그런 곳을 찾기가 힘들었어요."
"호호. 잘 쉬셨다니 다행이네요."
정해진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녹은 머리, 어깨와 목 부분을 더 마사지해 주었다. 그녀의 무릎에 나의 머리를 베고 누웠고, 녹은 손으로 나의 목덜미를 시원하게 지압을 해 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의 압력으로 나의 몸에 퍼지는 시원함은 또 다른 쾌감으로 다가왔다. 나른한 기운이 가시고 나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나의 눈을 내려다보았지만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나는 눈빛으로 '더 이상 바라는 것은 없어요. 단지 당신의 손을 잡고 있기를 원할 뿐입니다.'라는 마음을 전하였고, 그녀는 나의 눈에서 그러한 뜻을 읽은 듯이 보였다. 방을 나오기 전까지 그녀의 무릎을 베고 손을 잡은 채 한참 동안 있었고, 그러고 있는 나를 녹은 마치 남동생 같은 어린아이를 대하듯 조용히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 뒤 나는 녹을 따라서 방을 나왔고 일층 로비로 내려가기 위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두 시간 전에 복도에서 마주쳤던 나이 든 여종업원은 우리가 나온 방을 정리하려는 듯 우리들이 계단으로 내려가기를 기다리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녀는 나를 잡고 계단으로 내려와서는 헤어지기 전에 손을 모으고 태국식 인사로 고맙다고 말하며 천천히 커튼 안으로 사라졌다. 나도 건물을 나와서 집까지 기분 좋게 노곤하고 나른함이 퍼진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걸어왔다. 거의 매일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아침에는 겨우 일어나는 매일매일이었지만 그날 밤은 금방 잠이 들 수 있었다. 더운 날씨였지만 샤워도 하지 않고 바로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져 버렸다.
녹을 만난 이후로 나는 당분간 활기차게 회사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본 회사 직원들은 나의 변한 모습을 몰래 눈여겨보는 것이 느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한두 달이 지나자 그녀가 다시 보고 싶어 지기 시작하였다. 녹에게는 나는 그녀가 매일 접하는 손님들 중에서 단지 평범한 한 명에 지나지 않았을 테지만 내 마음속 한 구석에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지만 다시 한번이라도 그녀를 만나서 그날 밤 느꼈던 편안함과 마음의 안정을 얻고 싶은 욕망을 부인할 수 없었다.
불면증은 다시 시작되고 있는 듯 보였다. 체육관에서 집으로 걸어오거나 집안 방 안에서 우두커니 침대에 홀로 누워 있는 밤이면 그 육중한 건물로 다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유혹과 매일 싸워야 했다. 그 건물의 영업이 끝나게 된다고 생각되는 시간이 되면 나는 겨우 자포자기를 하며 힘겹게 잠에 빠져 들 수 있었다. 그녀의 서글서글한 눈매와 미소, 부드러운 손끝과 따뜻한 체온, 화려한 인테리어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 그 건물과 방안의 모습 그리고 따뜻한 욕조 안에서의 시간 등을 다시 재현시켜 보려는 나의 무의식적 본성은 꿈에서도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