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태국의 날씨는 건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우기로 접어들기 전이어서 방콕 시내의 열대야는 사십 도를 육박해 가는 더운 열기가 절정을 다해 가고 있었다. 이렇게 우기로 들어가기 전에 더위가 최고조에 달해 갈 때 즈음에는 태국의 물 축제인 쏭크란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달력상으로 새해에 해당되는 때이기도 하며, 국민들 대다수가 불교를 믿는 국가들인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스리랑카, 네팔에서는 서양 달력상의 새해보다 마음속으로 더 중요시 여기는 편이었다. 쏭크란 시즌에는 도로 곳곳에서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흥겹게 웃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심지어는 길가는 행인에게 물통 채 물을 뿌려 버리기도 하였고, 나도 태국 아이들의 장난에 여러 번 당하였다. 바쁜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조그만 이벤트가 활력소를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어느 날 퇴근길에 나는 무에타이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태국은 날씨가 무척 덥기 때문에 체육관은 실외에 지붕을 덮어 놓은 개방형 구조였고, 남자들은 운동을 하다 자연스럽게 상의를 벗어 버리는 편이었다.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다른 여자들은 이렇게 남자들이 상의를 탈의하고 있는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남자의 벗은 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무에타이의 고된 훈련에 점점 단련되어 가면서 나의 몸도 어느새 여자들의 시선이 머무는 경우가 잦아져 갔다. 처음에는 이런 시선들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많이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두 시간 넘게 이어지는 강도 높은 훈련 때문에 그녀들의 시선에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게 되었다. 같이 운동하는 여자 중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체육관에 오는 태국 아가씨가 있었는데, 매번 신형 BMW를 몰고 나타나며 체육관 관장에게 직접 트레이닝을 받는 것을 보면 부잣집 출신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태국여자들은 몸매관리를 위해서 무에타이를 배우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녀는 그들 중에서 화려한 외모와 도도한 모습 등으로 여러모로 돋보였다.
나는 운동을 마치고 체육관을 나가는 도중에 BMW를 가지고 다니는 그 여자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는 아주 세련된 얼굴과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뭔가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돌아서 가 버렸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며 그녀의 쌀쌀맞은 태도에 상처를 받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던 관장이 나를 부르더니, 다음 달부터는 트레이너들 중에 한 명을 나에게 붙여서 스파링을 중심으로 훈련을 시작하도록 할 테니 그리 알고 있으라고 하며 조금씩 스파링 강도가 높아질 거라고 덧붙였다.
"무에타이를 태국에서 처음 시작한 것 치고는 꽤 성장 속도가 빨라요. 아마 한국에서 비슷한 운동을 한 것으로 생각되군요. 하지만 다른 무술과 달리 무에타이만의 특유한 기술과 규칙 등이 있어서 그것에 익숙하지 않으면 시합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어요. 스파링 중심으로 연습을 한 후에 시합을 한번 가져 봐요. 시합을 통해 많이 성장할 수 있어요. 이기는 것이 꼭 중요한 건 아니에요. 그리고, 장에게는 첫 시합이니 중요한 경험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관장님이 말씀하시는 데로 할게요. 시합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건강을 위해 시작했거든요. 하지만, 무에타이를 계속할수록 더 발전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시합을 준비하라고 하는 갑작스러운 관장의 말에 나는 좀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며 나와 버렸다. 지금까지의 훈련도 소화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데 시합을 위해 앞으로 강도가 더 세어진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무거워졌다. 덕분에 체육관을 나서는 순간 BMW를 모는 체육관 아가씨는 바로 생각에서 지워 버릴 수가 있었다.
체육관에서 시작하여 걸어서 집까지 가는 길은 사십 분이 넘게 걸리는 편이었고, 걸어가는 도로의 한 편에는 녹이 일하고 있는 마사지 가게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녹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 그 건물에 언젠가 한 번은 다시 들어가고 싶었지만, 매번 마다 속마음과는 다르게 건물을 지나치고 계속 걸어가 버리곤 했었다. 하지만 그날 밤은 왠지 녹을 다시 만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컸던 탓인지 그 건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이전에 처음 건물 안에 들어가서 본 그 남자 매니저가 나를 다시 안내해 주었지만 나는 돌아서며,
"이름이 녹이라고 하는 여자는 오늘 일하지 않나요?"라는 뜻을 쉬운 태국어로 바꾸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다소 난해한 표정을 지으며 누군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태국어가 서투른 나로서는 그녀의 나이가 대충 어떠했고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등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태국어를 좀 배워 두었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는 나는 프런트의 여자사장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 보았다. 녹을 찾고 있으며 몇 달 전에 사장님이 호출해서 그 여자가 저 커튼 안에서 여기로 나타났다고 설명하며 그때 내가 선택한 그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없는지 물어보았다. 한참 동안 영어로 이어진 나의 말은 상황을 더 난해하게 만들었다. 여자사장과 매니저는 나의 영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였고, 커튼 안에 주방도 같이 있었던지 나에게 맥주를 가져다주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아무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그 어떤 코미디 드라마 보다 더 재밌게 느껴졌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더 이상 그 사람들과 얘기를 해 보았자 헛수고라 생각되었다.
이렇게 어쩔 수가 없었으므로 다음에 오겠다고 나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매니저에게 말하며 가게를 나와 버렸다. 이제는 다시 여기 오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쉽게 지켜지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이고 그 가게에 들어와서 혹시라도 녹이 있는지 찾았지만 허탕을 쳤고, 로비의 남자 매니저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계속 쳐다 봐 주었던 것이 기억난다. 어떤 때에는 다른 여자를 선택해서 시간을 보내다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차선책으로 다른 여자를 선택한 것에 대해 내 마음은 후회로 가득 차게 되었고, 녹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보름달이 방콕의 밤을 비추고 있었던 그날도 나는 다시 그 건물에 들러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녹을 찾았으나 역시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더운 날씨에 걸어온 탓인지 몹시 갈증이 났다. 그래서 타나카의 가게에 맥주를 마시려고 들어갔다.
"서혁. 오랜만이야. 요즘 바쁜가 봐? 정말 오랜만에 우리 가게에 온 것 같아. 어떻게 지내고 있어?"라고 타나카는 물어보았다.
"응. 다른 나라로 출장 다니느라 방콕에 없었던 시간들도 많았어. 가게는 잘 되고 있어? 평일인데 남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은 걸 보니 장사가 잘 되는 것 같군."라고 나는 얼버무렸다.
"우리 가게는 일본 선술집 같은 분위기여서 부담 없이 들르기에 좋아. 그래서 방콕에 사는 일본인들이 쉽게 잘 들르는 곳이야. 가격도 비싸지 않고 말이야. 근데, 뭐 고민이 있어? 얼굴에 그렇게 적혀 있거든." 타나카는 나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야. 그저 좀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아. 생맥주 하나 더 줄래?"
타나카는 생맥주를 교체해 주며 계속 물어보았다.
"아니야. 서혁의 얼굴에 이렇게 적혀 있어. '나 고민 중인 남자'라고 말이야. 나에게 솔직히 말해봐! 방콕에 오랜 산 이 선배가 상담해 줄게. 공짜로 말이야. 크크."
타나카의 말에 갑자기 기운이 났다. 마치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었다. 누군가에게 나의 고민을 솔직히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타나카가 장사 끝날 때 즈음에 다시 내가 찾아올게. 그때 우리 다시 얘기하자."라고 나는 말하고 가게를 나왔다.
몇 시간 후에 나는 타나카의 가게로 다시 왔다. 그는 가게 바닥을 청소하고 가게 앞에 세워 둔 홍보용 게시대를 안으로 옮기는 등 거의 정리를 마쳐 가고 있는 중이었다. 가게 셔터를 내린 후 가게 안에서 우리는 술잔을 서로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점점 취해 갔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타나카에게 녹을 만난 이야기를 꺼냈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 줬고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그녀가 보고 싶어지고 있다고 했다. 자존심 때문에 이 말은 타나카에게도 하고 싶지 않았으나, 혹시나 내가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그 건물을 자주 찾아가고 있다고 어렵게 털어놓았다. 모든 것을 털어놓으니 마음이 시원해졌다.
"음. 순진한 장서혁 상이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구나. 이런 걸 로맨스라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한 남자의 얘기인가? 하긴 제정신에는 로맨스를 못하지. 크크. 미쳐야 하는 게 로맨스 일 거야. 그런데 말이야. 서혁! 너무 그 여자에게 빠지지는 말아야 돼! 쉽지 않다는 건 나도 알지만 말이야. 태국여자들은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긴 해. 많은 외국 남자들이 태국여자들로 인해 방콕에 눌러앉게 되는 경우가 많아."
타나카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자신이 방콕에 온 이후로 만났던 태국여자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자기가 알던 외국인 목사 얘기도 들려주었다.
"그 목사는 교회로 인도해 주려고 녹과 같은 일을 하던 한 태국여자에게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잘해 주었지. 자기가 외국에 잠시 갔다 와야 할 때에는 그 여자에게 그런 곳에 나가서 일하지 않도록 본인의 신용카드를 맡기고 갈 정도였다니까. 그러다가 그 여자에게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점점 더 빠져 드는 것 같더라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로맨스 혹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연민에서 출발했다가 나중에 사랑으로 변한 것 같은데. 나 같은 경우는 그 여자를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감정이 있는 건 아니잖아?"
"어떻게 시작하든지 간에 한쪽이 다른 쪽을 관심 가지고 바라보다가 다른 쪽도 같이 바라보게 되는 순간부터는 불이 붙게 되는 거야. 근데, 그 여자에게는 서혁은 단지 손님일 뿐 일 텐데. 그러니까 너무 빠지지 않는 게 좋겠어."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거기를 자꾸 찾아가게 돼버려."
타나카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나의 속이 더 시원해졌다. 우리는 같이 가게를 잠그고 나왔다. 방콕의 밤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달이 조용한 거리를 비춰주고 있었다. 그리고는 낮이 되고 또 밤이 되는 시간들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