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나다

마이뻰라이

by 김주영

첫 번째 시합에서 다친 다리 때문에 한동안 쩔뚝거리며 걸어 다녀야 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완쾌가 되었지만 충격을 받았던 부분은 시퍼런 멍이 들 만큼 통증이 심하였다. 시합 직후 링에서 내려올 때에 체육관 트레이너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내려왔던 것으로 기억난다. 사무실 직원들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집에서 그냥 넘어져서 그렇다고 대충 둘러 대었다. 무에타이를 한다고 말하여 그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왠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셀린의 시선은 일부러 피해 다녔다. 방콕사무소에서 계약의 열쇠를 지고 있는 최고 책임자였으므로 나의 개인적 활동이 업무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태국의 날씨는 이제 우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오후에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가 퇴근 시간까지 이어질 때에는 나는 지상철의 플랫폼에서 내려오지 않고 도로를 내려다보며 비를 구경하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편이었다. 만약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게 되면 지상철 계단을 걸어 내려와 가까운 식당까지 비를 맞으며 뛰어갔다. 그리고는 도로변에 가까운 자리에 앉아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며 맥주와 태국 요리를 시켜서 저녁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하늘이 구멍 난 듯이 내리는 비, 건물 지붕의 처마 밑에 비에 젖은 몸을 말리는 현지인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도로에 멈춰 서 있는 자동차들이 나의 구경거리였다.


그날도 세차게 퍼붓는 소나기를 구경하며 길거리 식당에 앉아 교통정체로 도로에 멈춰 서 있는 수많은 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당 종업원이 돼지고기를 다진 볶음밥, 파파야 샐러드, 맥주를 가져다줘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며칠째 계속 이 식당에 와서 똑같은 메뉴를 주문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떡이며 종업원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종업원이 가져다준 맥주를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킨 후 다시 도로 위에 정체된 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느 택시 안에 있는 한 명의 승객에게 나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멈추어 버렸다. 그 여자는 녹과 꼭 닮았고, 나의 시선과는 엇갈리게 내가 앉아 있는 식당 옆의 중고서점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과 태국인 치고는 약간 높은 코와 서글서글한 눈동자는 그녀가 녹임에 틀림없다고 나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순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택시가 멈춰 서 있는 도로 쪽으로 걸어 나갔다. 종업원이 무슨 일이라도 났는지 궁금해하며 내가 움직이는 것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해 버렸다. 택시까지 걸어가서 택시 뒷문 유리창에 섰다. 그러자 택시 안에 있는 그녀도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녀가 나를 알아 봐 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고, 마치 택시 안에 승객이 타고 있는지를 모르고 비 오는 거리에서 황급히 그 택시를 잡으려는 비에 젖은 한 승객으로 나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비를 맞고 자신의 바로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불쌍해 보였던지, 그녀는 그 이쁜 눈으로 나를 창안에서 측은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그녀가 나를 알아보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몇 초 후에 교통체증이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는지 택시는 다시 서서히 출발하였고 잠시 후 속도를 내어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비에 머리와 옷이 흠뻑 젖은 채 다시 식당으로 힘없이 돌아왔다. 이렇게 녹과 잠깐 마주친 것이 아주 우연이어서 신기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소나기를 맞으며 택시가 서 있던 곳까지 걸어가서 창문을 사이에 둔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나의 즉흥적인 행동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녹이 순간 몹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쳐 왔다. 계산을 마치고 식당에서 나오자 나는 녹이 일하는 곳으로 지금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그녀는 거기로 출근 중일수도 있을 거라는 추측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나가는 택시를 세워서 타고 가려고 했지만,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택시를 잡는 것이 어려웠다. 비가 그치기까지 더 기다리려고 하였으나, 나의 급박한 마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빗줄기는 조금씩 가늘어져 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나는 거리로 뛰어 나가서 달리기 시작하였다. 아이리쉬 펍의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서양인들이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보도 위에 움푹 파인 곳에 물이 제법 넓게 고여 있었고, 물에 신발이 젖지 않기 위해서는 골목 안쪽으로 둘러서 가야 했지만, 나는 구두와 양말까지 물에 잠기며 물을 헤쳐 나가 버렸다. 머리에 비닐봉지를 모자처럼 쓰고 맨발로 거리를 걸어가는 현지인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숨을 헐떡이며 이십여 분을 계속 달렸고 어느덧 그 육중한 건물이 물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비에 젖은 채 마사지 가게의 건물로 들어와서 로비로 들어오니 나의 온몸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려 로비 바닥을 젖게 하고 있었다. 맞은편에 걸려 있는 대형 거울에 비취지는 나의 모습을 보니 셔츠는 이미 상체에 달라붙어서 나의 속살이 그대로 비취지고 있었다. 머리는 물에 빠진 생쥐의 모습이었다. 로비에 대기 중이었던 남자 매니저는 나를 보고 놀라며 타월을 가져다주었다. 프런트의 여자사장도 놀라며 계속 나를 응시하였다. 나는 타월로 머리와 셔츠에 묻은 빗물을 쓸어내린 후 그에게 조금 전에 들어온 젊은 아가씨를 찾고 있다고 했다. 영어와 태국어를 섞어서 이리저리 애를 써가며 그녀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내 말이 그에게 이해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지만 정신없이 말을 하던 중에 매니저는 나의 말을 끊으며 그녀는 지금 근무 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오늘은 밤늦게까지 완전히 예약이 잡혀 있어서 만나기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나는 실망으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번호가 몇 번이냐고 물어보았다. 이 가게의 모든 마사지 종업원들은 옷에 번호가 적힌 조그만 플라스틱 명찰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삼십팔 번이라고 대답했고, 나는 번호를 외우고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 건물에서 나왔다. 그날 그들에게 나타난 내 모습을 보며 남자 매니저와 여자사장은 많이 놀랐을 것이고, 녹에게 자기를 계속 찾아오고 있는 나에 대하여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이 들기도 하였다.


집까지 다시 걸어가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였다.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한심스럽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만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들뜨기 시작하였고, 오늘의 최대 성과는 그녀의 명찰번호를 알아낸 것이라고 여겼다. 이제부터 그 매니저와 사장에게 태국말로 중언부언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고, 그녀의 번호인 삼십팔 번으로 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타나카의 가게에 들러 이 기쁜 소식을 전하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잠시 보고 나서는 타월과 함께 따뜻한 정종과 오뎅 국물을 주었다. 오후 늦게부터 맞은 비로 내려간 체온 탓인지 아니면 긴장이 풀린 탓인지 술이 금방 취해 왔다.


녹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뒤로 약 두 달이 지나서였다. 그동안 나는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을 출장 다녀야 했었고, 시간을 내어 그 건물로 찾아갔을 때는 녹이 출근을 하지 않았거나 출근을 했어도 근무 중이어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날도 퇴근길에 무에타이 체육관을 들른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건물로 들어갔다. 오늘도 만나지 못한다면 이제는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단념하고 내 마음을 완전히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남자 매니저가 다른 손님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업무가 끝나길 기다렸다.


"삼 십 팔 번 아가씨 있나요?"라고 나는 매니저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나를 보며 반가운 듯 인사했고 자금은 그녀를 볼 수 있다고 공손히 대답했다. 그녀가 커튼 안에서 내가 있는 로비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나는 몹시 초초해졌다. 그동안 너무 많이 정신없이 이곳을 찾아왔던 것이 부끄러워 바로 나가버릴까도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녹은 마침내 내가 있는 곳으로 모습을 나타냈고 손을 모으며 태국식 인사로 맞이하였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녀를 보니 나는 감격스러웠다. 이렇게 감정에 겨운 나와는 달리 그녀는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녀를 따라 위층의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잘 지냈었요? 이름이 녹으로 기억하는데 맞나요?"


그러자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몇 달 전에 비를 맞고 택시 앞에 서 계셨던 것 기억나요. 나는 사람 얼굴과 이름을 아주 잘 기억하는 편이에요. 그때 저는 미스터 장이 택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올까 봐 좀 걱정했어요. 비가 그치지도 않고 장이 계속 서 있어서 저는 너무 장이 안쓰러웠어요. 하지만 저는 예약이 있어서 여기로 바로 출근해야 했었죠. 매니저와 사장님에게 당신 얘기를 들었어요. 자주 저를 찾아왔다고요. 그때 비 오던 날 당신이 비에 흠뻑 젖어 찾아왔을 때에는 그분들도 감동하셨나 봐요."


나는 그녀가 당시 나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놀랐고, 여전히 나의 이름을 기억하는 점에 감동하였다.


"그날 저를 알아보았군요. 택시가 사라지고 난 뒤 얼마 있다가 나는 여기로 바로 따라왔어요. 혹시나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해서요. 하지만 계속 예약이 잡혀 있었고, 그 뒤에 여기를 몇 번 왔어도 당신을 보지 못했어요."


"저는 이 가게에서 주로 예약을 받고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갑자기 찾아오면 저를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낮에는 옷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고, 여기는 가끔 나와서 밤에 일을 하는 편이에요. 낮에 일해서 버는 돈만 가지고 방콕에서 생활할 수가 없어요."


녹은 이 말을 마치고 잠시 침묵했지만 다시 나를 보며 웃어 보였다. 그녀의 웃는 눈에서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는 나의 눈을 그녀는 뿌리치지 않았다. 마치 엄마가 아들을 안 듯이 그리고 큰 누이가 막내 남동생을 안아 주 듯이 그녀는 나를 안아 주었고, 다시 나를 보며 그녀의 촉촉한 입술로 나의 입술을 씻어 주었다. 나의 진심이 그녀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날 밤에 그녀가 나에게 준 서비스는 종업원이 손님에게 준 그런 것이 아니었고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한 남자에게 베풀어 주는 푸근한 여인의 향기가 가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그날처럼 녹은 나에게 쉽게 잠들 수 있는 따뜻함과 편안함을 다시 주었고, 나는 다시 찾은 마음의 평안 속에서 내 전체를 그녀에게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