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의 의료보험제도에 대한 우리 회사 컨설팅 리포트 중에서 재정분석과 요율작업은 미스터 장이 맡아 줘요. 지난번 말레이시아에 대한 연금 추계 분석 자료를 읽어 봤는데, 아주 훌륭했어요. 그쪽에서도 만족하더군요."
"아. 그러던가요? 말레이시아 쪽에서 데이터를 충분히 주지 않아서 좀 고생했거든요. 아무튼, 그쪽에서 좋아했다면 다행이네요. 인도네시아는 비공식분야 통계가 최대한 정확해야 해야 될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거예요."
"미스터 장의 프로젝트도 진행해야 될 텐데, 요즈음 너무 부담이 되지 않아요?"
"아니에요. 셀린. 일이 있는 게 좋은 거죠. 저의 전문지식을 다른 직원들이 필요로 하면 저도 기분 좋아요."
나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방콕 사무소의 정식 직원들은 자신들의 프로젝트에 나를 하나의 도구로 이용해 버리고 말려는 마인드가 팽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나는 약간 많이 배운 하인에 불과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는 것이 잡념을 가능한 없애며 살기에 좋았다. 그동안 회사 다른 직원들의 프로젝트 지원업무에도 투입되어 쿠알라룸프르와 자카르타에도 출장을 다녀왔다. 또한 내가 진행하는 스리랑카 프로젝트도 상당한 진척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콜롬보로 출장을 가서 현지 관계자들과 워크숍을 통해 새로운 제도 도입과 관련한 의견을 수렵했고 관련 정부기관과 연구소를 방문하여 정부 데이터를 수집하였다. 이렇게 스리랑카 현지로부터 필요한 데이터를 충분히 축적한 다음에는 제도 설계를 시작하였으며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어갔다. 향후 삼십 년 정도 예상되는 지출비용을 계산했고, 지출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한 요율 분석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러한 재정추계작업에 들어가면서 나는 온갖 자료를 입력하고 변수를 고려했고 미래에 예상될 수 있는 결과에 대하여 수십 번의 시뮬레이션을 행하고 있었다. 당시 나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바쁜 엔지니어였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 같다. 당시 이러한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이 방콕사무소 정식 직원들 중에는 없었다. 그들이 인정하기는 싫었겠지만 이 짧은 시간은 내가 돋보였던 시기였었다.
"미스터 장. 내가 보내 줬던 리포트 읽어 봤어요? 스리랑카와 유사한 점이 많은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니 참고할 내용이 많을 거예요."라고 슈쿠코가 말했다.
그녀는 몇 달 전부터 옆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일본 여자 직원이었는데 어느 날 내 사무실을 노크하고 들어 와서 말을 걸었다.
"슈쿠코. 고마워요. 시스템 설계를 마무리하고 있는 시점인데 정말 많이 도움이 되었어요. 오늘 저녁 시간 되세요? 제가 저녁식사를 사고 싶네요"라고 나는 그녀에게 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슈쿠코는 잠깐 생각한 후 수락했다.
그날 저녁에 우리는 중국 레스토랑으로 갔다. 나보다 두 살이 젊은 그녀는 방콕 사무소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갔고, 몇 달 전부터 셀린의 지시로 내 업무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이 문화적으로 공통점이 많고 우리가 또한 같은 세대여서 그런지 서양 직원들을 대할 때보다는 서로 말이 잘 통한다고 느껴졌다. 그녀의 전문적인 지식과 일에 대한 열정에 가끔씩 나는 매력을 느낄 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엇인가 그녀에게 찾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었지만 일에 대한 매력을 뛰어 넘어서 내가 슈쿠코에게 다가설 수 있는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당시 그녀에게 원했던 것 중에서 그녀가 부족했던 것이 뭐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쁘지 않다고 말하기에도 맞지 않았던 것이, 슈쿠코는 깔끔하게 생긴 전형적인 일본여성이었고 특히 총명하게 생긴 눈동자는 그녀의 장점이었다. 직장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요소를 거의 다 갖춘 그녀에게 내가 당시에 더 이상 관계를 가깝게 가져가지 못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아쉬운 감도 없진 않다. 그녀에게 내가 더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에는 방콕 사무소에서 정식직원이 아닌 내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열등감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당시 나는 누군가에게 안식과 평온을 당장이라도 받고 싶을 만큼 지쳐가고 있었고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상대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불편함과 스트레스를 받아서 금방이라도 떠나고 싶은 방콕 사무소가 아니기를 바랐다.
육중한 덩어리 같은 삼층 건물에 알 수 없는 태국어로 적힌 네온사인이 걸린 그 가게를 몇 번 더 찾아가 보았고, 나는 녹을 다섯 번 정도 만날 수 있었다. 어느덧 나도 그녀의 고정 고객 중 한 명이 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퇴근 후에는 무에타이 체육관에서 땀을 흘리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샌드백을 차고 트레이너와 스파링을 해서 가능한 탈진한 상태에서 집으로 걸어가려 노력하였다. 이렇게 하여 녹에게 빠져 들어가고 있는 나를 통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타나카의 가게에 들러 잠들기 전까지 맥주를 마시고 얼큰하게 취한 정도가 되면 숙소가 있는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건물 안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쯤이면 다시 나만의 고독한 몇 평 공간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서글픈 느낌도 들었다. 차라리 어떤 때는 바로 잠들 수 있도록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에 쓰러져 자 버렸다.
가끔씩은 타나카의 가게에서 술을 마시며 어느덧 친해진 일본인 프리랜서 기자와 수다를 떨다 집에 들어오곤 하였다. 그 기자를 통해 태국의 현 정치와 경제에 관한 얘기를 들었고 특히 계층 간의 정치적 갈등이 심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 쿠데타로 수상이 쫓겨 나서 해외망명 중이며 태국인 중 일부는 그가 다시 귀국해서 정치 복귀하는 것을 원했고, 이를 위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정치시위의 횟수가 더 증가했고, 이로 인한 방콕 시내의 교통체증은 최악에 달해 가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특히 주말에는 도시 중심가에는 항상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녹을 그 건물 안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은 밤늦게 그곳 건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뉘우침이 계속 마음을 맴돌았지만 이미 나는 그 육중한 건물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 우두커니 앉아서 녹이 퇴근하고 나오는 시간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늦어 지나가는 행인이 거의 없었지만 택시들이 행여 나를 태우려고 내가 앉은 곳에 가까이 오면 속도를 줄이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져 여러 번 자리에 일어나서 거리 안쪽으로 몸을 움직이는 패턴을 되풀이하였다. 아무도 내가 이런 늦은 시간에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겠지만 그 거리를 비추고 있었던 외로운 가로등은 홀로 짐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정이 넘어 거의 새벽 한 시까지 기다린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출근하지 않은 밤을 공교롭게도 골라서 내가 갔던 것인지 아니면 이젠 그 마사지 가게를 그만두었는지 녹과는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 후 프로젝트들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정신없이 일을 하고 무에타이 체육관에서는 다음 시합에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땀을 흘리며 지내고 있었다. 방콕의 낮과 밤은 서로 바뀌기를 반복하며 시간은 흘러갔다. 그날도 나는 밤 열한 시가 넘어서 그 건물 앞으로 걸어가 버스 정류장 앞 의자에 앉아 건물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정이 지나가자 나는 몹시 초조해졌고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연기를 천천히 뿜으며 마음을 안정시켜 보았다. 자정이 지나가자 사람들이 이따금 입구에서 나와 퇴근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입구의 옆에 있는 벽으로 다가가 벽면에 기대어 입구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태국인들이 밤에 벽면에 혼자 서 있는 나를 보고 놀라지 않도록 건물입구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으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약 삼십 분 정도를 기다렸고 이제는 발이 너무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에 갑자기 녹과 어느 여자 종업원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녹에게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처음에 놀라는 듯 보였지만 바로 얼굴을 고치며 같이 나온 종업원에게 먼저 가라고 하였으며 그 종업원은 눈치껏 빨리 자리를 피해 주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그냥 여기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혹시나 녹이 퇴근하면 볼 수 있을까 해서 잠깐 기다리고 있었어요."라고 나는 입을 떼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내가 언제 마치고 나올 줄 알고 그랬던 거예요? 다리가 많이 아프겠어요. 미스터 장이 오늘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요."라고 말하는 녹은 차분한 얼굴이었지만 웃어 주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용기가 생겼다. 역시 그녀를 그동안 기다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마음에 안도감이 생겼다.
"별로 다리 아프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아요. '녹이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들었었는데 이렇게 보게 만나게 되다니 오늘 밤 나는 아주 운이 좋네요."
"나 많이 배고파요. 조금만 걸어가면 야시장이 있는데, 밤늦게까지 하는 식당들이 있으니 거기에 가서 음식을 먹어요."라고 녹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제안했다.
우리는 야시장으로 가서 야외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당시 그 공간은 녹이 일하는 건물 안이 아니었고, 우리는 손님과 종업원 사이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밖에서 처음 보게 된 녹의 얼굴은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내가 그동안 그리워하며 마음에 간직해 온 아름다운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나에게 어떻게 지냈는지며 건강도 물어보았다. 형식적인 인사였을 수도 있지만 나를 배려해 주는 그 표정과 말들은 지금까지 그 수많았던 시간들 속에서 그녀를 찾아다녔던 나의 노고를 모두 말끔히 씻어 주고 있었다. 그녀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다른 남자와 같이 있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와 같이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그 순간만큼은 그것은 사사로운 일이었고, 그녀의 일도 신성한 하나의 노동으로서 존중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으며 보고 싶은 만큼 많은 시간을 기다려 왔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나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녹이 나의 진심을 읽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은 편하게 잠들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