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잘 보내셨나요? 저는 가족들과 같이 아유타야로 놀러 갔어요."
"저는 파타야의 미라지 리조트로 가서 쉬다가 왔어요. 제 여자 친구가 거기서 물놀이하며 쉬는 걸 좋아해요. 아유타야는 주말에 골프 치러 가끔 가는데, 언제 한번 같이 가죠."
"미스터 장은 주말 어떻게 보내셨어요?"
"그냥 방콕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보냈어요. 날씨가 좋더라고요. 저는 아직 아유타야와 파타야도 못 가 보았네요."
"거기는 방콕에서 차로 두세 시간 거리 밖에 되지 않아요. 파타야는 택시로도 갈 수 있으니, 이번 주말에 한번 가봐요. 장."
월요일이 되면, 방콕 사무소에는 이렇게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물어보며 직원들은 일을 시작하였다. 다국적 직원들이 모여 있는 사무실이었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중요한 요소였고, 대화의 주제는 민감하고 무거운 주제를 피하는 게 좋았으므로 이러한 주말의 여가활동에 대한 대화는 아주 선호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주말은 누구나 기다리는 시간이며 주중에 피곤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는 충분한 휴식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여행이나 여가 활동 등을 통하여 정서적으로 치유를 가능케 해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방콕에 혼자 있는 나로서는 주말이라는 기간은 더욱더 외로워지는 시간이며 어떻게든 버텨야 할 시공간이 방콕에서의 주말이었다.
주중에는 사무실에 나가서 직원들과 업무적으로 얽히게 되어 좋든 싫든 사람과의 관계의 연속이었고, 퇴근 후에는 무에타이 체육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태국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주말에도 체육관을 갈 수 있었지만 운동에 집중해야 했고 다른 수강생들이나 트레이너들과 잡담을 하는 것은 체육관 분위기를 흐려 놓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과의 대화는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한국어를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끔씩 들었던 생각은 내가 한국어를 아주 서서히 잊어 가고 있으며 몇 년이 지나면 모국어를 어눌하게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는 쉬운 한국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수록 나의 녹에 대한 생각은 더 깊어져만 갔다. 어떤 날은 그녀에 대해 얼마나 자주 생각하고 있는가를 계산해 보기 위해서 그녀에 대해 뭔가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될 때마다 메모지에 체크 표시를 하였는데, 주말이 끝나갈 때 즈음에는 종이를 체크 표시가 가득히 채우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녹은 주말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녀가 보고 싶어도 약속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서 전화를 걸어 보았다.
"녹. 잘 지냈어? 이번 주 일요일에 방콕 근교로 가서 같이 식사하는 게 어때?"라고 나는 제안해 보았다.
"음. 이번 주 일요일은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데 방콕 외곽으로 나가자고요? 시내에서 만나 식사해도 좋은데요. 그래도 장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라고 녹은 대답 했다.
"고마워. 녹. 내가 한번 가 봤던 적이 있는 태국 식당인데, 논타부리 지역에 있어. 경치가 아주 좋으니까 내 생각에 녹도 좋아할 것 같아."
그 주 일요일 낮에 아속역 부근에서 녹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생각해 보니 낮 시간에 그녀와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방콕에서 나는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방콕 교외로 나가자고 제의한 것에 좀 후회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나를 아는 사람이 그녀와 데이트하는 것을 볼까 봐 걱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만나는 시간이 가까워지자 이상하게도 나는 초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일하던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 후회가 되면서도 그녀를 볼 수 있다는 마음에 다시 들뜨기 시작하였다. 약속장소에서 연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은 이렇듯이 후회, 초조함, 들뜸과 같은 서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은 감정이 복합된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 동안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연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아속역은 방콕의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그녀가 올 때까지 초조한 마음으로 지나가는 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누가 내 눈앞을 가로막으며 멈춰 섰다. 순간 나는 누구일까 생각했지만 그 사람이 녹임을 바로 깨닫게 되었다. 하얀색 원피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 머리칼 사이로 하얗게 뻗어 나온 아름다운 목선과 어깨, 달걀형의 얼굴에 적당히 올라온 코, 도톰한 입술 그리고 사연을 품은 듯 한 이쁜 눈동자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녹의 촉촉한 눈을 나는 한동안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상철 플랫폼으로 비치고 있는 햇빛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녀의 자태는 그동안 나의 기억에 각인된 밤에만 보아 왔던 이전의 모습과는 아주 달랐고, 더 젊어 보이고 여대생 같은 청순함과 발랄함이 느껴졌다. 그동안 그녀를 만나곤 했던 시공간에 어울리는 모습과는 전혀 멀어 보였다. 그녀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전혀 잊게 만들어 주었다. 아속역을 지나가고 있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오직 그녀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당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내가 좀 늦었죠? 많이 기다렸어요?"라고 녹은 넋을 잃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표정에 만족한 듯한 미소를 얼굴에 짓고는 나의 정신을 다시 깨우며 말했다.
"아니야. 많이 기다리지 않았어. 이렇게 낮에 녹을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아. 자세히 안 봤으면 녹인 줄 몰랐을 거야. 오늘 정말 아름다워."라고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아속역은 언제나 사람이 많아요. 여기서 만나자고 장이 말했을 때 조금 의아했어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지나다녀서 서로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도 되었죠. 그래서 오늘 좀 더 신경 쓰고 나왔죠. 그런데, 장은 나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너무 아름다워서 내가 못 알아봤던 거야. 원래 녹이 이쁘지만 오늘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어. 낮에 보는 녹이 훨씬 나은 것 같아. 그동안 밤에만 봐서..."라고 나는 말했지만 뒷말은 흐려 버렸고, 녹이 혹시 기분 나쁘지 않을까 그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았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방콕에 인접한 논타부리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짜오프라야강 중류의 강가에 위치한 고급 태국전통식당까지 이동하였다. 한 시간가량 택시 안에서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알맞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으며, 부드러운 피부와 따뜻한 체온은 녹의 향기와 어우러져 손끝을 타고 나의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그녀는 너무도 고운 자태로 나의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녹. 논타부리 지역은 와 본 적 있어?"
"이전에 친구가 그 동네에 산 적이 있어서, 몇 번 놀러 갔던 적이 있어요. 짜오프라야 강변에 큰 시장들이 몇 개 있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녀요. 거기서 친구와 식사하고 놀다 오곤 했죠. 하지만 장이 말하는 레스토랑은 가 본 적이 없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라고 말하며 애교 있는 눈웃음을 짓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그녀가 말한 뒤 이렇게 눈웃음을 지어주는 모습이 너무 좋았고, 아마 이 모습 때문에 나는 그녀를 기다려 왔고 지금도 이렇게 그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어디론가 가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도착한 식당은 수안띱이라고 하는 태국전통 레스토랑이었다. 그곳은 복잡한 방콕시와는 다르게 논타부리 지역의 여유로운 대지에 태국의 전통 정원 양식을 넓은 공간에 잘 갖추고 있었다. 정원 안에 있는 연못 주위와 숲을 산책할 수 있었고 강가의 전망대까지 가벼운 도보로 가서는 짜오프라야강의 정경과 황혼을 바라볼 수 있는 정취가 좋은 장소였다. 나는 식사 주문을 시켰고 식사가 준비되기 전까지 야외 정원을 그녀와 산책하였다. 방콕 시내의 번잡함과 소음을 피해서 도망을 오고 싶은 낙원과 같은 곳이었다. 열대림 정원을 거닐고 새소리를 들으며 조용한 연못 속에 움직이고 있는 열대어들을 보면서 강변까지 거닐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의 연인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에 그녀는 나의 팔짱을 끼었다. 이 조용한 자연이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하여 우리가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나의 팔짱을 끼고 조용히 거닐고 있는 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밤에만 보아 왔던 그녀의 얼굴 그리고 몇 시간 전에 아속역 근처에서 처음 보았던 낮의 얼굴과는 또 다른 얼굴이 보였다. 그동안 자신이 힘들게 살았던 시간을 잠시나마 잊고 있는 듯한 모습이 느껴졌다. 황혼 무렵에 다시 짜오프라야 강변으로 우리는 걸어 나와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나를 올려다보았고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키스를 나누었다.
방콕으로 돌아오는 길은 레스토랑 근처 선착장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하여 거기서부터는 배를 타고 짜오프라야강 중류에서 하류에 있는 방콕시내까지 내려오는 길을 선택했다. 이른 저녁의 선착장은 방콕에서 강을 거슬러 돌아온 태국 현지인들로 붐볐다. 반대로 강을 따라 내려가는 배는 사람들이 한산하였다. 우리는 강을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고, 배는 곧이어 하류로 내려가는 여정을 시작하였다. 방콕과 인근 지역을 잇는 교통수단 중에서 강을 통한 뱃길은 적지 않은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현지인들이 출퇴근할 때에도 이 뱃길을 많이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장. 오늘 좋은 곳에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요. 논타부리에 몇 번 왔지만 그렇게 좋은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음식도 기품이 느껴질 만큼 훌륭했어요. 태국음식이지만 정말 다르네요."
"녹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니까 나도 기분이 좋아. 그리고 녹과 주말에 처음으로 시간을 보냈으니까 이번 주는 아주 기분이 좋을 것 같아."
"저도 장과 같이 오늘 시간을 보내서 너무 행복했어요."
물길이 어느덧 방콕으로 접어들자 강의 오른쪽에 위치한 새벽사원이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녹은 그곳을 보며 불교식 합장을 하였고 나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배는 어느덧 사판탁신역 앞 선착장에 도착하였고, 우리는 지상철을 타고 다시 시끄럽고 삶의 현장이자 서로의 일터가 있는 방콕 중심가로 서서히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