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마이뻰라이

by 김주영

"녹. 옷가게 일은 어때? 많이 팔아야 월급을 더 받는 거 아니야?"


"호호. 아니에요. 젊은 사람들이 입는 옷들이어서 항상 사람들이 많이 와요. 제가 요란스럽게 떠들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주 매장으로 들어와요. 장은 여전히 바빠요?"


"회사일은 뭐 항상 똑같아. 방콕에 있지만 다른 나라를 상대로 하는 일이 대부분이어서 출장 가기 위해 준비하고 실제로 출장 나가 있는 시간들도 많아."


"그렇군요. 외국 많이 나가서 장은 좋겠어요. 그리고 지난번에 출장 갔다 와서 저에게 준 선물 고마워요. 향기가 저한테 너무 잘 맞는 것 같아요. 장 만날 때만 그 향수를 사용할 생각이에요."


"하하. 면세점 여직원에게 상담을 했는데, 그 향수를 골라 주더라고. 암튼, 녹이 마음에 든다고 하니 다행인걸."


논타부리 지역으로 간 주말여행 이후 녹과 나는 전화 통화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녀도 조금씩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녀와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해 주고 싶었지만 밤에 그녀가 하는 일로 인해 잘못하면 오해를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타나카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이따금 타나카의 가게에 들러서 녹과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타나카는 방콕에서 유일하게 내가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었던 같은 또래의 친구였고, 내 얘기를 들으면 그는 마치 소설 속의 내용을 듣는 것처럼 다음 내용이 어떨지 궁금해하였다.


"장. 너한테 이야기를 들어 보면 녹이라는 여자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시골에서 이곳 방콕으로 상경해서 먹고살기 위해 혹은 시골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하는 여자들이 많아. 하지만 너무 그녀에게 빠지지는 마라! 장은 나처럼 방콕에 눌러앉지는 않을 것 같아. 한국에 돌아가야 될 것 같거든. 그리고 너는 공부도 많이 해서 앞길이 창창해 보여. 혹시 녹과 결혼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녹과 결혼해야겠다고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아마 그녀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을걸. 그냥 서로 좋은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거지. 나도 그녀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도 않아. 사람들이란 사회에서 돈을 벌기 위해 다양한 일들을 각자하고 있잖아. 녹의 일을 존중하려고 하고 있어."


"장은 너무 순진한 것 같아. 우리 나이도 이제 적은 것은 아닌데 나이에 비해 약간 순수하다는 생각이 가끔 든단 말이야. 사실 나도 장의 그런 점이 좋아. 너 얘기를 듣고 있으면 순진한 남자가 방콕에 와서 철없이 연애하고 다니는 그런 통속소설을 읽는 느낌이 난다고."


우리의 이런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는 일본 프리랜서 기자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하였다.


"서혁 상은 그런 얘기를 우리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서혁 상이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는 꽤 유명한 회사인데, 그런 곳일수록 생각보다 조직이 보수적이야. 그리고, 서양인들이야 태국이 자기 나라가 아니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겠지만, 그 회사의 태국직원들은 교육 수준이 높거나 상류층 사람들이 꺼라는 생각이 들어. 여기 태국사회는 계급의식이 의외로 강하기 때문에 서혁 상이 녹과 같은 여자와 사귀고 있는 것을 알면 업신여길 수도 있어. 물론 나와 타나카는 서혁 상 얘기를 들으면 부럽기도 해. 특히, 내가 젊었을 때 방콕에서 근무하던 시절을 생각나게 한단 말이야. 나도 그 젊었던 시절이 그리워. 자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젊은 시절에 태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곤 한다네."


그는 뭔가 회상하면서 말을 더 꺼내려하다가 멈추었다.


방콕에서 근무한 지 이년 가까이 되어 가면서 재계약 여부가 나에게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계약 연장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사무실에 근무하면서도 나는 집중이 잘 되지가 않았다. 스리랑카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고 그동안 내가 구축해 놓은 스리랑카 현지의 인적 네트워크를 감안하면 내가 떠나게 될 경우는 프로젝트의 진행에 차질이 있을 수도 있다는 자신감도 들었지만 재계약의 열쇠는 방콕사무소의 셀린 소장이 쥐고 있었고, 셀린이 그동안 나의 업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가끔씩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지만 그녀는 전혀 아무런 힌트도 주지 않았다. 역시 그녀의 프로다운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결정의 순간까지 긴장을 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미스터 장. 잠깐 내 방으로 올래요?"


어느 날 셀린은 사무실에서 내방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셀린의 사무실까지 걸어가 방을 노크했다.


"앉아요. 장. 그동안 스리랑카 프로젝트를 하면서 스리랑카 현지 관계자들과 나누었던 이메일을 나에게도 항상 공유해 주었던 것으로 생각해요. 이번 기회에 스리랑카 프로젝트와 관련된 인적 네트워크를 모두 정리해 놓아요. 이름, 소속, 직책, 전화번호, 이메일 등의 내용으로요."


"네. 알겠어요. 셀린. 안 그래도 한번 정리하려던 참이었어요."


나는 셀린의 방을 나오면서도 마음이 찜찜하였다. 내가 태국을 떠나고 난 이후에 다른 직원이 후계자가 되어 스리랑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하려는 셀린의 계산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여기는 원래 내가 속한 직장이 아니었고 언제든 떠나면 되는 존재가 나였던 것이다.


어쩌면 몇 달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귀국 후에 내가 어떻게 향후 진로를 정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이 들었다. 그리고 최근에 녹과 많이 가까워진 까닭에 그녀와 계속 만나고 싶다는 마음도 간절했지만 그녀에게 나의 걱정을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걱정을 이해해 줄 수 없을 거라는 염려도 들었지만 그녀에게 마음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남자들 중에서 그녀를 생각해 주고 있는 한 남자에 불과해도 좋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장. 요즘 무슨 고민 있어요? 목소리가 힘이 없어 보여요."


"아무 일도 없어. 녹. 시합 준비한다고 내가 요즘 많이 피곤한가 봐. 큭큭."


"무에타이는 위험한 스포츠예요. 그냥 건강관리 삼아서 운동으로만 연습하고 시합 같은 데는 나가지 말아요. 제발."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안 다쳐. 나 아주 강한 편이야. 그런데 말이야. 음. 녹은 나를 사랑해?"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갑자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장을 만난다고 생각해요?"


"아니야. 그냥 물어보고 싶어서.. 미안해.. 큭큭."


그녀와의 대화 속에서도 내가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았다.



재계약이 확실하지가 않아 미래가 불안해져 가면서 나는 밤을 꼬박 새우고 혹시 새벽에 잠들어 버리면 사무실에 출근을 못 할 수도 있다는 걱정으로 새벽 여섯 시에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서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무실이 있는 고층빌딩의 경비원들은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일찍 출근하는 모습을 보자 처음에는 의아해하는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잠이 들지 않는 밤을 보내는 것처럼 힘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지금도 당시의 고생이 어렴풋이 기억된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으니 사무실과 무에타이 체육관에서 집중도가 떨어져 가고 있었다. 특히 사무실의 내 방에서는 직원들한테 들키지 않게 몰래 잠을 자기도 했다. 성과를 중요시 여기는 외국계 회사의 특징 때문에 당시 내가 견딜 수 있었지만, 근무태도 등을 중요시하는 한국의 직장문화에서는 아마 퇴출감이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잠 못 드는 밤으로 고생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던 어느 날 녹은 나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먼저 걸어왔다. 토요일에 자기 집으로 오지 않겠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날 꽃과 와인을 들고 녹의 집으로 찾아갔다. 우돔숙역 근처에 위치한 아파트에 그녀는 살았는데 대부분 태국 현지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원룸의 형식으로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혼자 살기에는 적합한 곳이었다. 우리는 녹이 만든 음식으로 저녁을 먹은 다음 내가 사 온 와인과 치즈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덧 식탁에는 내가 사 온 꽃이 꽂힌 병이 놓여 있었다. 녹은 어느 순간 로맨틱한 발라드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손을 잡아서 자기의 머리 뒤로 들어 올리고는 등에 놓아주었다. 그녀는 내 얼굴 가까이로 더 당겨져 왔다. 나의 눈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귀에 속삭였다.


"장. 일어나 봐요. 우리 같이 춤춰요."


"나는 춤을 배운 적이 없어서 못 춰."


"걱정 말고 그냥 음악에 몸을 맡기고 움직이면 돼요. 이렇게 천천히 움직이면 되거든요.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녹은 나의 오른손을 자기 날갯죽지에 갖다 놓은 후 나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남은 손들을 서로 붙잡은 채 우리는 천천히 음악에 맞춰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춤을 추면 기분이 한결 나아져요. 고등학교 다닐 때 저희 담임선생님이 서양춤을 좋아하셨는데, 우리들한테 일부러 가르쳐 주셨어요."


녹의 리드에 따라서 나는 천천히 움직이며 턴을 하기도 하며 스텝을 밟기 시작하였고, 두, 세곡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춤을 이어 나갔다. 어느덧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옆으로 기대고 춤을 추었다. 곡이 끝났을 때 그녀는 내 품에서 나를 사랑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갔고, 사랑스러운 그녀를 정성껏 애무해 주었다. 그녀는 그 순간에도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내가 겪고 있는 고뇌를 이해하고 있는다는 듯이 그 고통을 가져가 버리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나는 치유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녹은 태국이라는 거대한 대지였고, 나는 이방인으로서 그 대지 속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지구상의 그 어떠한 존재보다도 나에게 위대하였다. 나의 안에 있는 모든 병들이 그녀 안에서 치료되었다.


그날 밤은 녹의 품에 안겨서 숙면을 취할 수가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가져 본 숙면이었다. 나는 녹에게 요즘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했고 그녀는 오늘 자기하고 있는 시간만큼은 편안히 보내고 가라고 했다. 다음 날 우리는 한국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고 최근에 상영하는 영화도 같이 보았다. 그 이후에도 나는 불면증이 지속되는 날들을 보내면서 가끔 녹의 아파트에 가서 숙면을 취하곤 했다. 그 시기에 그녀가 없었더라면 그 시간들을 과연 나 혼자 견딜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몇 달 후 셀린은 나의 재계약서에 서명을 하였고, 방콕에서 일 년을 더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