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아파트

마이뻰라이

by 김주영

방콕에 근무한 지 삼 년 차가 되어가자 나는 이제 스리랑카 프로젝트의 성과를 가시화시키려고 서서히 마무리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스리랑카 출장이 더 잦아졌고 새로 도입시키려고 하는 제도의 장단점에 대해 스리랑카 정부와 관련 이해 당사자등의 대표자들과 만나서 워크숍을 통하여 토의를 많이 하였다. 녹과 전화 통화는 자주 했지만 출장이 많아져 실제로 얼굴 보는 시간은 적어져 갔다. 하지만, 방콕에 체류하는 때에는 나는 가능한 자주 녹의 아파트로 찾아가 그녀와 시간을 보냈고 주말에는 어김없이 그녀의 아파트를 찾았다.


어느 주말 저녁에 그녀의 아파트에서 식사를 마치고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갑자기 문 밖에서 열쇠로 문을 열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 소리에 순간 긴장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긴장감과 두려움을 가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불륜의 현장을 들키기 바로 직전의 순간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녹 이외에 다른 여자의 집에 간 적이 없었고 그녀와 나는 완전히 연인 사이라고 말하기에도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되었다. 만약 녹이 나 말고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녀에게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고 혹시 상대 남자가 나에게 따진다고 해도 나는 그와 녹을 두고 싸움을 할 수 없는 처지라고 막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외국에 살면서 현지인과 폭행 사고가 있으면 골치 아파지는 경우를 자주 보아 왔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 방콕에서 근무하는 동안 겪어야 했던 외로움과 불안감을 극복하고 있었고 그녀의 아파트는 어느덧 그런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삼자의 눈으로는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녀를 외로움 해소의 대상으로 이용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 어떤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사실을 나는 단지 받아들이고 싶었다.


"녹. 누구야? 혼자 있는 줄 알고 찾아왔어. 그런데, 집에 외국 친구를 데려 온 모양이네."라고 문을 열고 들어 온 태국 여자가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녹도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듯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다가 조금 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 여자에게 대답했다.


"언니. 오랜만이야. 제발 미리 연락 좀 하고 찾아와! 장. 많이 놀랬죠? 제 친언니예요. 가끔 집에 놀러 와요. 언니. 내 남자친구야."


태국어로 이어진 언니와 동생의 대화였지만 나는 짧은 태국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분위기상 대화 내용의 대부분을 이해하고 있었다. 외국어에 대한 나의 타고난 감각에 나 스스로 감탄을 하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한가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녹의 언니는 이미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고, 녹은 언젠가 언니에게 나를 한 번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오늘 저녁은 언니가 방문하는 날인데, 나를 일부러 아파트로 부른 것이 아닐까 추측이 들었다. 녹의 언니는 나를 재빠르게 관찰하고 있었다. 여성들만이 가질 수 있는 남성에 대한 재빠른 스캔닝이었으며 다시 녹과 나를 번갈아 보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녹의 친언니예요. 이름이 완(달콤하다는 의미의 태국여자 애칭)이라고 해요. 우리 형제들은 방콕으로 모두 들어와서 살고 있어요. 저는 방콕 근교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고 있어요. 가끔 이렇게 동생 집을 찾아오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장이라고 합니다. 한국사람이죠. 언니도 녹을 닮아서 미인이시네요. 언니가 집에 오는 줄 알았으면 제가 뭐라도 사 올 걸 그랬군요. 제가 다음에 시간을 내어서 식사를 정식으로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둘이 있는 줄 알았으면 제가 안 와야 되는데. 호호. 제가 좀 말이 많아요. 이해해 주세요. 저는 한국사람과 이렇게 말해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녹이 장에 대해 가끔 나한테 얘기해 줬어요. 실제로 보니까 우리 녹이 좋아할 만하네요. 호호."


"언니. 이제 그만 말해. 언니는 너무 수다스러워."


"어머. 얘는. 장을 실제로 보니 네가 말한 것보다 훨씬 미남이네."


"자꾸 계속 말하면 언니 지금 집에서 쫓아낼 거야."


"자. 이제 그만 싸우시고 앉아서 저녁식사라도 하시죠. 언니분도 아직 식사 안 하셨을 것 같아요. 시간이 좀 이르죠."


우리 세명은 식탁에 앉아 맥주와 가벼운 고기 안주를 먹으며 계속 얘기를 나누었다. 언니는 꽤 수다스러운 편이어서 말이 계속 이어졌고 녹은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었고, 나는 가끔씩 언니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정도였다.


"녹의 어떤 면이 좋아요? 근데 녹이 너무 키가 크지 않아요? 태국여자는 대부분 키가 작은 편이어서 녹은 가끔 남자가 아니냐는 소리를 어릴 때부터 들어왔어요. 남자인데 여성처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방콕에서 많이 보셨죠? 태국에서는 여자들이 키가 크면 여장한 남자가 아닌지 가끔 오해를 받아요."라고 언니는 말했다.


언니의 말에 녹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어릴 때부터 자기가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을 언니가 지금 하고 있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녹의 얼굴을 보자 바로 언니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녹의 모든 것이 좋아요. 아름다운 얼굴이며 활기찬 성격도 좋아요. 키가 크다고 하셨는데, 제가 키가 크기 때문에 저와 잘 어울리죠. 이렇게 아름다운 여장 남자는 아마 없을 거예요. 아. 그게 아니고.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제 말은 녹은 전혀 여장 남자처럼은 안 보인단 말이죠. 아무튼 저는 녹의 전부가 좋아요."


"어머. 장 선생님도 제 동생을 좋아하고 있나 보네요. 제가 빨리 자리를 비켜 줘야 되겠어요."라고 녹의 언니는 말하며 나의 대답이 약간 낯간지럽다는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얼굴을 살짝 옆으로 돌려 버렸다.


"아니에요. 더 계셔도 돼요. 녹과 저도 저녁 식사하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중이었어요. 녹의 언니를 처음 뵙는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면 제가 서운할 것 같습니다. 제발 좀 더 계셔 주세요."


녹은 나의 대답에 만족한 듯이 나를 보며 사랑의 눈빛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언니의 그늘 밑에서 억눌리며 커 왔을 그녀에게 자신의 언니 앞에서 자신의 남자가 이렇게 사랑을 말하고 있음을 보고 듣는 그 순간에 그녀는 행복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녹의 언니는 삼십 분 정도 더 머문 후에 녹의 집을 떠났다. 언니가 떠난 뒤에도 우리는 식탁에 계속 앉아서 남은 맥주와 안주를 더 먹으며 계속 얘기를 나누었다.


"언니는 제가 어떤 일을 하며 돈을 버는지 알고 있어요. 처음에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언니는 저를 용서하지 않았죠. 하지만, 언니의 가게는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가지만, 이전에는 벌이가 시원찮았어요. 제가 벌은 돈으로 고향에 있는 부모님께 돈을 부쳐 주고, 언니도 좀 도와주었죠. 그 이후로는 저의 일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녹이 걱정이 되어서 언니가 그렇게 했을 거야."


"하지만, 언니는 제가 그 일을 그만 두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만두라고 바로 말하지는 않지만요. 저더러 나이가 들어서는 계속 그 일을 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전문대학을 나와서 다른 일을 시작했으면 한다고 가끔 말해요. 전문대학을 마칠 때까지 언니의 집에 머물면 지금처럼 밤에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저에게 말하곤 해요."


나는 녹의 이야기를 눈을 감은 채 계속 듣고 있었다. 녹이 언니에게 나를 만나고 있다고 말한 뒤에는 언니가 나에 대해서 뭔가를 말하였다고 했다. 외국남자와 사귀는 것이 나쁘진 않지만 외국남자는 태국여자와 연애를 한 뒤에 미련 없이 태국여자를 버려두고 태국을 떠난다고 하며 동생인 녹이 나에게 너무 마음을 주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하였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녹도 나에게 어떤 대답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내가 무슨 말을 뒤이어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눈치도 느껴졌다.


"녹. 저기 말이야. 나는 녹이 지금 있는 그대로가 좋아. 녹도 그러리라고 생각해. 지금 현재에 서로 충실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우리가 인연이 더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녹은 내가 방금 그녀에게 건넨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바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왜 나하고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말을 안 해요? 설령 우리가 인연이 안 되어 나중에는 만날 수 없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와 영원할 것이라는 거짓말이라도 할 수 없나요. 저는 그 말이 듣고 싶었어요."


녹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끌어안아 주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지 않았다. 나는 마치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왜 나는 뻔뻔스럽지 못할까? 차라리 뻔뻔스러운 얼굴과 대답이 녹을 더 위로해 줄 수 있을 텐데. 혹시 나는 그녀를 방콕에 있는 기간 동안 만나는 연애 상대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어느 여자와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자유연애주의자는 아니지 않는가? 나는 모든 면에서 진지한 성격이잖아.'


이런저런 생각이 나의 머리에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날 밤은 녹이 나에게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마치 나를 방콕에 영원히 남겨 두려는 듯이 나에 대한 그녀의 몸은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애무를 하였고 나는 그녀의 적극적인 공격에 힘겹게 방어를 하였지만 이내 포기하고 내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맡겼다. 여자가 적극적인 경우는 남자에게 때로는 당혹스러울 수 있지만 그날 밤은 나는 온몸으로 그녀를 받아 주었다. 그게 나로서는 말대신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내 전부를 당신에게 다 주고 싶어. 당신 나 정말 사랑해? 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


녹은 절정의 순간까지 올라가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그녀는 다가오는 절정의 찰나 직전에 이미 반 정도 이성을 잃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녹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 녹! 당신과 같이 죽고 싶을 정도로 사랑해. 당신을 절대 버리지 않을 거야."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는 함께 치솟고 있는 나의 전율을 더해 주고 있었다. 드디어 절정의 순간은 다가왔다.


녹은 그날 자신의 내면에 사정해 주기를 원했지만 나는 왠지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지막 순간은 그녀의 원대로 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