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

마이뻰라이

by 김주영

밤사이 많은 꿈을 꾸었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에 나는 늦게 눈을 떴다. 녹과의 어젯밤 정사 후에 피곤한 기운으로 금방 잠이 든 것 같았지만 밤새 틀어 놓은 에어컨 냉기로 인하여 이불을 덮었다가 더우면 다시 걷어차고 하는 동작을 반복하였었다. 또한 녹이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잠을 자는 탓으로 몇 번이고 잠에서 깨어났으므로 숙면을 취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녹은 내 옆에서 침대에 기대어 앉아서 텔레비전으로 케이블에서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영어로 대사가 나오는 미국 드라마였다.


"녹. 벌써 일어나 있었구나.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아참. 내가 늦잠을 잔 모양이네. 지금 몇 시나 되었지?"라고 나는 말을 걸었다.


"열 시 삼십 분이에요. 마치 아기처럼 새곤새곤 잘 자고 있어서 제가 장을 일부러 깨우지 않았어요. 밤에는 잠꼬대도 하더라고요. 한국말인 것 같던데, 무슨 꿈이라도 꾼 모양이죠? 혹시 피곤하면 더 자도 돼요. 저는 드라마 보고 있으면 되니까요."


"아. 그랬구나. 어젯밤에 꿈을 많이 꾼 것 같은데, 하나도 뭐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내가 잠꼬대도 했다고? 크크. 태국 와서는 한국말을 거의 사용하지 못해서 아마 한국말이 그리워서 꿈속에서라도 사용한 것 같은데. 근데, 녹은 미국 드라마 보고 있는 중이군. 무슨 말이지 이해가 돼? 하긴 녹은 영어를 잘하는 편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지? 평소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미국 드라마를 자주 봐요. 영어로 된 자막이 밑에 나오니까 무슨 뜻인지 모를 경우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고 있어요."


"아. 그랬었군.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녹이 외국어에 대한 감각이 있는 것 같아. 태국어 이외에도 다른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이 녹의 머릿속 어딘가에 더 있는 것처럼 보여. 그리고, 영어공부를 좀 했던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말아. 영어의 기초가 튼튼해 보여. 영어에만 특이한 표현들과 약간 고급 단어들만 익히면 더 유창하게 할 수 있을 거야.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배운 적 있어?"


이 말에 녹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고, 계속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나도 녹의 옆에서 침대에 기대어 미국 드라마를 이십 분 넘게 같이 보았다. 어떤 분야의 전문 드라마는 아니었고, 젊은 사람들의 가벼운 애정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었는데, 일상생활에 많이 사용될 수 있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였다. 녹의 영어공부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잠이 다 깬 것 같아. 이제 일어나야겠다. 배고프지는 않아? 녹. 시간이 어중간해서 아침 먹기도 그러네. 밖에 나가서 점심 같이 먹을까? 시간 괜찮아? 한국 음식 좋아한다고 했잖아. 내가 유명한 한국식당에서 맛있는 음식 사줄게."라고 나는 침대에서 나오며 말했다.


"어머. 지금 몇 시죠? 열두 시가 다 되어 가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되었죠. 장. 배고프죠? 좋아요. 저녁에 일하러 나가야 되기는 하는데, 오후에 약간 시간이 있으니까 같이 영화도 봐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 태국에 온 이후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자주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영화관에서 최근에는 무슨 영화를 상영하는지도 모르겠어."


"제가 보고 싶은 영화가 하나 있긴 해요. 극장에 갈 시간도 없지만, 그 영화 혼자서 보기도 어색할 것 같아서 망설였는데, 오늘 장하고 같이 가서 보면 되겠네요. 그러면 지금 나가서 같이 식사하고 영화도 시내에서 봐요."


녹의 아파트를 나오자 무더운 공기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머리 위로 바로 내리비치는 태양의 직사광선을 그대로 맞으며 우리는 아파트 근처 지상철역인 우돔숙역까지 걸어갔다. 거기서 아속역까지 지상철을 타고 이동했고 아속역 플랫폼에 도착하자 걸어 내려와 한인 타운 상가지역으로 다시 걸어갔다. 그리고는 거기서 제일 유명한 한국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인 상가 근처를 가끔 지나쳐 보기는 했지만, 여기에 식사하러 오기는 처음이에요. 근데 여기 가격이 좀 비싸지 않아요?"


"그래. 여기에 처음 와 봤다니 잘 되었네. 녹한테 맛있는 음식 사주고 싶었는데, 이왕이면 분위기도 좋고 비싼 레스토랑이 좋지. 가격은 걱정 마! 내가 기분이 더 좋을 거야."


녹은 다른 지역의 한인 식당에 이전에 가 보았지만 이렇게 좋은 곳은 처음이라고 하였다. 나는 태국인의 입맛에는 생갈비보다 양념갈비가 더 맞다고 판단하여 제일 비싼 양념갈비를 주문했고, 한국에서 하듯이 능숙한 솜씨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다 익은 고기를 녹의 접시에 옮겨 주었고 한국인들이 고기를 어떻게 먹는지를 설명해 주었으며 직접 상추 위에 고기와 야채를 얹어서 한 입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서 녹의 입에 넣어 주기도 하였다.


"녹. 한국에서는 고기를 구운 후에 이렇게 야채에 올린 다음 입에 넣기 좋게 싼 다음 먹어. 신기하지? 자. 입 벌려봐! 내가 지금 녹 주려고 이쁘게 싼 거 하나 넣어 주께."


"어머. 제 입이 이렇게 커요? 호호. 장은 가끔 장난기가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 정말 맛있어요. 이전에 먹어 본 한국음식과는 확실히 차이가 나게 맛이 좋아요."


"아. 미안. 내 입 크기에 맞춰서 만들었나 봐. 양념이 고기에 잘 스며들어 있어서 맛이 더 좋을 거야. 양념 없는 고기도 한국사람들이 많이 먹는데, 내가 태국에서 와서 태국사람들 먹는 음식을 보니까 양념이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이걸 주문했어. 다행이다. 녹이 맛있어하는 걸 보니까."


"이제는 장도 태국사람이 다 되었나 봐요. 태국 사람들 입맛까지 다 파악하니깐요. 근데, 아까부터 눈여겨보았는데, 저기 앞에 놓인 인형은 뭐예요.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이쁘게 차려입고 인사하듯이 서 있네요."


"어떤 인형을 말하는 거지? 아. 저 인형들. 저건 결혼하는 신랑과 신부의 모습이야. 옛날에 한국사람들은 저렇게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고 해. 요즘은 서양식으로 여자들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남자들은 턱시도 복장을 하고 결혼식을 올리지. 하지만, 서양식 결혼을 마치고 다른 장소로 가서 가족들과 인사할 때는 저 인형들처럼 다시 갈아입고 나와."


"아. 그렇구나. 옛날에 한국사람들 결혼식 올릴 적에 신랑과 신부의 모습이구나."


근처 식탁에 아는 한국인이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이런 우리의 모습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그런 시선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 식탁에 앉은 남자와 부인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면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우리를 한번 눈여겨보고는 더 이상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녹은 나와 같이 주말 오후를 고급 한국 식당에서 보내는 것이 행복한 듯이 계속 미소를 지으며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 봐 주었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 줄 수 있는 남자가 이제 자기 앞에 나타난 듯이 여기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런 녹의 눈빛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자 여사장님은 우리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며 다음에 또 오시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런 모습을 녹은 감동한 듯이 눈여겨보았고, 밖을 나오자 기분 좋게 나의 팔짱을 끼었다. 우리는 길 건너 쇼핑센터 건물로 걸어 들어가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십 층까지 올라갔다. 주말의 분위기를 최대한 만끽하려는 듯이 쇼핑센터에 놀러 온 가족들, 연인들, 친구들처럼 보이는 인파들은 행복한 얼굴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녹에게도 이런 기분을 최대한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주말에도 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이런 주말의 데이트는 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저녁에 다시 일터로 출근하는 그녀를 위해 최대한 배려를 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맞춰졌다.


우리가 보았던 영화는 미국영화였고, 남자 좀비가 인간 여자를 사랑하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었다. 판타지 로맨스 장르로 굳이 분류될 수 있는 영화였다. 녹은 영화를 보는 내내 줄곧 영화 내용에 몰입되어 있는 듯하였다.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영화를 보다가 가끔 나를 보았고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씽긋 미소를 지으며 나의 어깨에 기대어 영화를 보았다. 나는 영화 내용보다는 그녀가 잠깐 동안이나마 영화에 몰입되어 재미있게 감상하고 있는 모습에 오히려 행복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영화가 마치자 우리는 다시 아속역 지상철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플랫폼에 서서 다음 지상철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던 중이었다.


"녹. 조금 전에 같이 봤던 영화는 재미있었어?"


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때 그녀 쪽으로 돌아보자 나는 그녀가 어딘가를 쳐다보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서 있던 플랫폼의 철로 반대편 플랫폼에 한 태국 여자 대학생이 자신의 핸드폰을 보면서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며 서 있었다. 태국은 대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다니는데 여학생들은 흰색의 타이트한 셔츠에 무릎 위로 올라오는 검은색 스커트를 입고 다녔다. 태국 젊은 여성의 경우 대부분 날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교복 입은 여대생의 경우 아주 맵시가 나는 편이었다.


그 여대생의 모습을 녹은 하염없이 부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는 이미 눈물에 젖어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순간 지금 녹의 머리에는 건너편 여대생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조금 후에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치고 그 육중한 건물로 근무하러 가야 할 자신의 모습이 슬프게 겹쳐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저기 플랫폼에 서 있는 여대생의 삶처럼 살아갈 수 없음을 슬퍼하는 것이 그녀의 슬프게 서 있는 모습과 뺨에 뜨겁게 흐르고 있는 눈물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녹. 저기 지상철이 오고 있어. 이제 타고 가자."라고 말하며 나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녹은 손수건을 받아서 천천히 눈 주위를 닦았고, 곧이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하지만 그런 미소를 본 나의 마음은 더 아팠다. 이렇게 화창한 일요일 날에 기분 좋은 데이트를 했는데, 녹이 슬퍼하고 있는 사실이 나를 더 공허하게 하고 있었다.


다음 지상철이 건너편 플랫폼에 도착하자 그 여대생은 어느새 사라졌고, 우리는 잠시 후 우리를 태운 지상철을 타고 각자의 역에서 내렸다. 먼저 내린 나는 다시 돌아 서서 창문 밖을 멍하니 쳐다보고 계속 타고 가는 녹의 모습을 측은히 바라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