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생일

마이뻰라이

by 김주영

동남아의 날씨는 조금씩 건기로 접어들어 가고 있었다. 오늘 오후 정처 없이 세차게 내리고 있는 소나기는 이제 내가 보게 될 태국에서의 마지막 비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무실 컴퓨터에서 눈을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 불과 오십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번개가 번쩍거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방콕이라는 대도시에 들끊고 있을 인간사의 애환들을 하루에 한 번씩은 저 소나기로 씻어 내려야만 해야 되는 듯 저토록 비와 번개가 울부짖듯 메아리를 쳐 대고 있었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인간들의 희로애락들은 다시 빗물에 모여져 짜오프라야강으로 흘러 들어가 누런 빛깔의 탁류가 되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포용해 버리는 드넓은 바다로 가버렸다. 나의 방콕 생활의 삼 년도 저 넓은 바다로 휩쓸려 가버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는 거의 끝나가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녹과의 추억도 방콕에서의 수많은 사람들의 저마다의 추억과 같이 섞여서 거침없이 흘러가 저 멀리 인도양에 묻혀 버릴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아 오기 시작하였다. 다 식어 버린 홍차 한 모금을 입으로 넣었다. 레몬의 뒷맛이 느껴졌다.

퇴근 시간 전까지 몇 시간 동안은 스카이프를 통한 인터넷 화상 미팅이 연달아 이어졌다. 셀린과 회사 본사의 프로젝트 성과관리팀장의 얼굴들이 화면에 보이며 온갖 다국적 언어들이 헤드셋을 통해 귀에 들어왔다. 공식적인 대화는 영어로 진행되었지만, 다소 민감한 대화들은 프랑스어로 갑자기 바꾸어 말을 하였다. 본사가 프랑스에 있는 까닭에 회사 의사결정자들의 상당수가 프랑스인들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은 각자의 프로젝트 진행상황과 향후 예상되는 성과들에 대하여 브피핑을 했다. 본사 직원들은 비용, 효과 분석적인 방식을 이용해 브리핑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해 왔다. 역시 본사 직원다운 모습이었다. 모두들 회의에서 자신의 프로젝트의 성과를 최대한 홍보하고 부족한 듯 한 점에 대해서는 방어하기 위해 급급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해의 계약이 연장되느냐가 결정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직장 생활의 살벌한 단면을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자, 나의 브리핑이 시작되었고 본사 직원들의 경청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수시로 나의 브리핑을 멈추게 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날렸다.


"프로젝트 종료가 두 달 정도 남은 시점에서 스리랑카 이해 당사자들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프로젝트 진행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바로 핵심을 찔러 물어보았다. 새로운 제도 도입에 대한 그들의 합의 여부에 따라 프로젝트의 성과가 있느냐, 없느냐의 이분법으로 구분된다고 그들은 보고 있었다. 그들의 질문에 나는 꾸밈없이 솔직히 대답했다.


"스리랑카 현지 당사자들이 새로운 제도에 합의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프로젝트의 진행단계별 성과지표는 모두 달성되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것은 프로젝트최종 성과 목표인 스리랑카 당사자들의 제도 도입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각 단계를 다 완성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스리랑카 현지에서 내부적으로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 정치적인 딜을 진행하고 있는 듯합니다. 약 한 달 후에 제가 스리랑카로 출장 가서 마지막 회의를 개최할 때에 그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프랑스 본사 직원들은 내가 한국에서 파견된 직원인 줄 모르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왜냐하면, 계약 연장 여부의 결정을 자기들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며 회의에서 일부러 분위기를 나를 옥죄는 것 같게 만들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로젝트가 끝나 가는 시점이므로 나는 프로젝트의 최종목표가 달성되든 어떻든 그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한국행이 뻔했기 때문에 '무엇이 두렵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인터넷 화상 회의 자리에서 당당해지기 시작하였다. 나의 자신 있고 시원스러운 답변이 계속 이어졌고 의외로 그들은 나의 이런 모습에 만족한 듯 한 모습을 보였다.


"한 달 후의 성과를 기대해 보겠어요. 미스터 장. 스리랑카에 대한 우리 회사의 첫 프로젝트가 성공하길 저희도 지켜보겠습니다."


화상 회의가 끝나자, 나는 녹초가 되어서 헤드셋을 벗어서 책상 위로 던지듯 놓아 버렸다. 잠시 후에 셀린은 나의 방으로 잠깐 찾아왔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나는 놀랬다.


"미스터 장. 다시 한국에 돌아갈 생각인가요?"라고 셀린은 느닷없이 물어보았다.


"귀국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은 없을 것 같습니다. 결과야 어떻든 스리랑카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 여기에 제가 더 남아 있을 근거가 없지 않습니까?"


나는 셀린의 질문에 신중히 생각하지 않고 대답을 해 버렸다. 하지만 셀린은 나의 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좋은 저녁 시간 보내라며 다시 돌아가 버렸다.


그날 저녁시간에도 어김없이 체육관에 들렀다. 관장은 최근 새로운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 같아 보였다. 현재 있는 체육관 사업을 확대해서 방콕 시내와 방콕 근교에 새로운 체육관들을 자신의 이름 브랜드로 더 열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조그만 경기장도 지을 계획이었다. 한때는 태국에서 이름이 나 있었던 무에타이 프로선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 브랜드로 충분히 사업가능성이 있었고 방콕에 살고 있는 태국 부자들의 투자를 끌만한 가치가 있었다. 실제로 그의 그런 계획은 가시화되었고, 사업에서 상당히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사업확장 계획에 외국인들에 대한 체육관 홍보도 아주 중요해져 갔다. 무에타이를 배우러 태국에 오는 외국인들이 증가하고 있었고, 태국에 살면서 무에타이에 입문하게 되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으므로 외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홍보도 중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의 이미지도 충분히 홍보용으로 활용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운동을 시작하기 전 몸매 사진과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변화되는 몸매의 사진을 비교해 주는 홍보 포스터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다. 또한 화끈하게 경기가 진행되었던 나의 두 번째 경기 동영상이 주요 장면만으로 편집되어 체육관 벽면에 걸린 텔레비전에서 재생이 되었고, 인터넷에 체육관 홍보 동영상으로도 등록이 되었다. 나는 관장에게 전혀 수수료를 받지도 않았고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에타이를 통하여서도 힘든 방콕생활을 견디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국 무에타이 세계에서의 관장의 영향력은 내 생각 이외로 대단하였다. 어느 날 훈련에 땀이 흠뻑 젖어 있던 나를 관장이 불렀다.


"장. 한 달 뒤에 있을 세 번째 경기는 아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겁니다."


"저는 관장님께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저를 이만큼 성장시켜 주신 점에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경기는 라차담넘 스태디움에서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라차담넘 스태디움은 칠십 년 넘는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경기장으로 시설은 낡았지만, 무에타이 선수라면 언제가 한번 그 링 위에 올라가서 경기를 하고 싶은 꿈의 경기장인 것이었다.


"정말입니까? 그 경기장은 아무나 시합을 하는 곳이 아닌 줄 알고 있는데요. 저같이 이름 없는 선수가 뛸 수가 있을까요?"


"하하! 거기에서 큰 시합만 열리는 것은 아니에요. 장과 같이 유명하지는 않지만 관중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화끈한 경기도 개최됩니다. 큰 경기가 열리는 날에 개최되는 시합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에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과 추억이 될 거예요. 어제 내가 거기에서 대답을 받았으니, 라차담넘 스태디움에서 시합을 갖는다고 생각하고 남은 시간 동안 훈련에 매진하세요. 나는 장이 생각하는 것보다 방콕의 무에타이 세계에서는 영향력이 좀 있어요."라고 관장은 진지하게 말을 맺었다.


그날부터 나는 트레이너들의 새로운 지도를 받으며 실전 훈련 모드로 들어갔고, 그동안 내가 취약했던 근접 전에서의 공격과 수비에 대해서도 보강이 이루어져 갔다. 매일 녹초가 되어 가는 저녁이었고, 다음날 출근해서는 낮 시간 동안 체력적으로 버텨야 하는 시간들로 계속되어 갔다.


녹과의 관계는 이러한 무에타이 연습으로 인해 나의 관심에서 약간 순위가 밀려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어느 주말에 나는 녹이 많이 보고 싶어 져서 그녀에게 전화를 하고 그녀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녹은 차분히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가져온 와인과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녹은 말없이 받아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상하게 기분 좋은 나를 그녀는 이상히 여기며 쳐다보고 있었다.


"녹. 라차담넘 스태디움 알지? 내가 그 경기장에서 무에타이 시합을 가질 거야. 대단하지 않아? 모든 무에타이 선수에게는 꿈의 경기장이야. 나 같은 외국인은 경기를 갖기가 쉽지 않은 곳이야. 정말 대단한 시합이 될 거야. 내가 다니는 체육관 관장이 끄루담이라고 하는데, 한때 미들급 챔피언이었지. 그 사람 이름 들어 봤어? 녹."


나는 신나게 떠들어대며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녹은 주방에서 다과를 준비하며 듣는 둥 마는 둥 대답이 없었고, 나는 이런 녹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쉴 새 없이 한참을 떠들어 대었다.


"여자들은 무에타이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무에타이 경기는 아주 위험해요. 제 고향에서 같이 고등학교 다녔던 남자애 한 명은 무에타이 경기 도중에 실제로 죽었던 적도 있어요. 그래서 저에게는 별로 유쾌하지가 않은 소식이네요. 장이 무에타이를 배우고 있다고 들었을 때도 사실 기분이 좋지 않았거든요. 경기를 이전에도 몇 번 했다고 나에게 자랑삼아 얘기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저는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세요?"


녹은 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뜨며 쏘아붙이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녹의 의외의 대답에 주춤했지만 갑자기 화가 나 버렸다.


"녹이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그리고 무슨 문제가 있어? 아까 내가 문을 열고 들어 올 때에도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이 차가웠잖아. 나는 녹의 웃는 얼굴이 좋아서 자주 이렇게 오는 건데 말이야."


"제가 장에게 항상 웃어야 되는 이유가 있나요? 내 기분은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장을 항상 기분 좋게 만들어서 제 아파트를 매번 나가게 해줘야 하는 그런 여자인가요? "


나는 녹의 차갑고 높은 목소리에 주춤해져 버렸다.


"아니. 나는 그런 말이 아니고. 사실은 난 녹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온 거야. 그리고 아까 했던 말이 기분 나빴다면 정말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나는 녹의 이런 차가운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항상 나에게 쾌활하게 웃고 얘기하며 나를 기분 좋게 해 주었던 그녀였다. 잠깐 동안 우리의 침묵은 이어졌다.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의기소침해지면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어색하게 와인잔을 이리저리 돌리거나 녹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하고 얼굴을 천천히 돌려 버리곤 하였다. 완전한 남보다도 더 어색한 사이가 갑자기 되어버린 것이었다. 녹은 식탁에 마주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신의 폰을 보면서 문자를 확인하거나 대화창을 열어 뭔가를 적어 나가고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 보였지만 태국 문자를 전혀 읽지를 못했으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가능한 존재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저렇게 태연히 자기는 누군가 다른 상대와 저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라는 생각이 나자, 나는 녹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고, 그동안 자주 드나들던 그녀의 아파트를 오늘은 빨리 떠나고 싶어졌다.


"녹. 오늘 바쁜 거 같아? 내가 오늘은 날을 잘 못 잡은 것 같아. 조금 있다가 나가볼게."라고 나는 힘없이 입을 떼었다.


"오늘은 제 생일이에요. 하긴 장에게는 한 번도 제 생일이 언제인지 말해 준 적이 없군요. 장도 저에게 물어본 적이 없군요. 생일 선물은 받은 걸로 할게요. 이렇게 와인과 꽃다발을 장이 사 왔으니까요. 우연의 일치이겠죠? 저도 사실은 조금 있다가 나가 봐야 돼요. 약속이 있어요."


'그동안 녹의 생일을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그런 사이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녹과 나의 관계가 다시 한번 정리되는 듯 느껴졌다. 무섭도록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와 얼굴은 나를 슬프게 하였다. 하지만, 나는 무슨 말을 해야만 할 듯 망설이다가 입을 떼었다.


"미안해! 녹의 생일이 오늘인 줄 몰랐어. 한 번도 생일이 언제인지 물어보질 못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저도 장의 생일이 언제인 줄 모르는걸요. 저 조금 있다 나가야 해요."라고 녹은 식탁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일어서고 나서 조금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녹은 나를 배웅해 주려고 따라오다가 내가 멈춰서 돌아보자, 그녀도 놀라서 멈추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급히 지갑에서 삼천 바트를 꺼내서 녹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돈을 받지 않았고, 나를 노려보고 다시 외쳤다.


"이게 무슨 의미죠? 왜 제게 돈을 주는 거죠?"


마치 내가 이전에 마사지 가게에서 녹에게 서비스를 받고 그녀에게 돈을 내밀던 모습과 같다고 그녀가 생각했던 것 같았다.


"아니. 이건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녹의 생일을 못 챙겨 줘서 내가 미안해서 그런 거잖아. 녹이 갖고 싶은 생일 선물을 살 수 있도록 돈을 주는 거잖아."


"돈은 필요 없어요. 저도 돈은 있어요. 제가 필요한 건.... 아니에요. 그만 돌아 가 주세요."


녹은 흥분된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말을 끝맺었지만,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가 무서워졌다. 나는 돈을 다시 지갑에 집어넣으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녹의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지상철 역까지 가는 길에 늘어 선 가로등이 우울하게 나를 비추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