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새 직장

마이뻰라이

by 김주영

하루하루를 삶의 전쟁터 같은 곳에서 보내다가 맞이하는 밤은 편안히 잠들고 싶은 시간이다. 눈을 감아도 다시 떠야만 하니까 다음 날의 또 다른 시간을 버텨야 할 중요한 충전의 시간인 것이다. 부자나 거지나 모두 잠을 자야 한다. 인생은 또 아이러니하다. 불면증에 시달린 거의 삼 년 동안의 마지막 몇 달은 의외로 밤에 잠이 잘 왔었다. 내가 마음의 평안을 찾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직 방콕에서 내가 버텨야 할 시간들은 남아 있었고, 그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을 정리해야만 할 것이었다. 뭔가를 남겨 두고 홀연히 떠날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당시 꼭 정리를 해야만 하였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기는 하지만 그즈음의 나는 분명히 서서히 정리를 해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가 떠난 후에 나를 기억이라도 해 줄 것인가? 기억을 해 준다면 그들에게 나와의 추억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그런 것일까?


녹과의 전화 통화가 점점 더 줄어들어만 갔다. 나 자신도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실제 통화가 이루어졌을 동안에도 녹의 말수는 이전보다 확실히 적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두 달 지나면 태국을 떠나가야 할 그런 남자에게 그녀가 집착해야만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녹과 함께 타고 갔던 택시 속에서 태국어로 대화를 하던 중에 그녀는 갑자기 영어로 나에게 물어보았다. 아마 택시기사를 의식했었기 때문이었다.


"장은 정말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방콕에 더 남아 있을 수는 없나요? 한국에 꼭 돌아가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 제가 너무 장에게 부담을 주는 말을 한 것 같네요."


"태국이 좋긴 한데, 어머니가 혼자 한국에 계시거든. 형제들이 있어서 가끔 찾아뵙기는 하지만, 요즈음 들어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어. 형제들도 다들 결혼을 하여서 이전처럼 어머니를 돌바 줄 여유가 없어졌어. 그래서 내가 한국에 가야 될 필요도 있어."


사실 나는 효자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내가 일찍 결혼을 해 주기를 어머니는 바랬지만, 나는 계속 공부를 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면서 어머니가 마련한 맞선 자리도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나의 적성에도 맞지 않는 전공 공부를 더 깊이 있게 하겠다고 하며 학교를 더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형제들 중에서 어머니와 제일 시간을 가지지 못한 까닭으로 평소에도 마음속으로 늘 죄송스럽게 생각을 해오고 있었다. 그런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택시 안에서 나는 녹에게 그렇게 태연히 말해 버렸다.


"그렇군요. 장은 정말 착한 아들이네요. 어머니가 한국에서 장을 많이 보고 싶어 하시겠어요."


나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택시 안에서 녹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고, 잠시 얼굴을 돌려서 달리고 있는 차의 창문 밖에 펼쳐져 가고 있는 거리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택시기사는 우리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무뚝뚝하게 우리의 목적지를 향해 차를 몰아갔다.


녹은 점차 무엇인가 마음을 먹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새로운 삶에 내가 같이 걸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신하는 것처럼 서서히 그리고 때로는 내가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빠르게 썰물이 되어 해변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는 나는 그녀가 나에게서 썰물처럼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고 녹과 함께 영원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최면을 걸면서도 살아가고 있었다. 이기적인 것이 또한 나였던 것 같다.


그녀는 최근에 그동안 근무하였던 옷가게 매장 일도 그만두고 새 직장을 구했다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어떤 곳에 새 직장을 구했어? 녹."


"자동차 면허를 발급하거나 갱신해 주는 공공기관에서 반년 동안 일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잘 되었구나.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 거지?"


"사무실에서 내근하면서 면허 발급신청서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단순한 작업이에요. 단순입력 작업이지만 사무실에서는 처음으로 제대로 일을 해 보는 것이어서 하는 일이 재미있고 보람이 있어요. 그리고 외국인들도 자동차 면허를 위해 많이 방문해요. 여기 직원들은 영어를 거의 못해요. 그래서 그런 외국인들이 오면 자리를 슬슬 피하기도 해요. 그럴 때면 제가 다가가서 영어로 상담해 줘서, 직원들 업무를 도와주고 있어요."


"와. 녹이 영어를 잘하지. 충분히 외국인들과 의사소통이 될 거야. 대단해!"


"공공기관 공무원들이 영어를 못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저도 놀랬어요.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데도 말이죠. 영어에 쩔쩔매는 것을 보면 제가 먼저 나서거나, 아니면 저를 찾아서 도와 달라고도 부탁해요."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녀의 쾌활한 얼굴과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서 나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언제인가부터는 녹에게 행복을 줄 수 없고 오히려 슬픔을 주는 존재가 되었을 터인데 지금의 새 직장은 그녀에게 삶의 활력과 자신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타고난 언어감각으로 인한 영어실력은 새 직장에서 그녀를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공무원 신분이 아닌 단기 계약직 신분으로 근무하고 있었지만 녹은 그 조직 내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고 지금은 또한 합법적인 공간에서 일하며 행복도 맛보고 있었다. 그녀가 전문대학을 나와 더 안정된 직장에서 일하게 된다면 녹의 삶은 분명히 달라질 수 있으리라 나는 확신이 들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그녀는 영특함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이 들었다.


쾌활해져 가는 녹으로부터 나는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내 마음이 더 편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쉽지 않은 것이 또한 우리의 인생인 모양이었다. 활기차 보였던 녹의 새 직장 생활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녹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최근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새 직장의 관리자 중에서 녹이 이전에 마사지 가게에서 근무할 때 그녀와 마주친 사람이 있는 듯했다. 다행히 녹이 속한 부서의 관리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녹을 보자 그 기억을 떠 올렸던 것이었다. 그녀가 근무를 시작하면서 그녀에 대한 소문이 조직 내부에서 퍼지기 시작하였고, 젊고 이쁘며 날씬하고 영어까지 잘하는 싹싹한 아가씨가 누군인지 궁금해서 옆 부서 직원들도 일부러 구경을 왔었다. 그 관리자도 소문의 여자가 누구일까 궁금하여 녹의 부서로 그녀를 구경하러 왔다가 처음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남자는 녹을 처음부터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서서히 기억을 해내게 되었다. 녹도 또한 그가 그녀의 고객은 아니었으므로 처음 그와 마주쳤어도 그녀는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집요함은 마침내 그녀가 그 마사지 가게에서 일하던 여자였을 거라고 거의 확신하게 되었고 녹이 일하던 부서장에게 그 얘기를 해주게 된 것이었다. 녹의 부서장은 어느 날 그녀를 불러서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날도 녹은 방금 전에 외국인에게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한껏 기분이 좋아진 뒤였다.


"여기 사무실에서 일을 잘하고 있어서 참 보기가 좋아. 근데, 여기 오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었지? 이력서에는 간단히 적혀 있긴 한데 말이야. 내가 좀 궁금해서 그래. 영어도 잘 하구 말이야."


녹은 부서장의 말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조금 전까지도 몹시 기분 좋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녹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여기저기 회사에서 근무했어요. 영어는 제가 관심이 있어서 평소에도 계속 공부하고 있고요. 근데, 왜 물으시죠?"


"응. 아니야. 누가 녹을 다른 사람과 착각한 모양이야. 그럴 리가 없지."


부서장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며 넘어가 버렸다.


그날은 그렇게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녹의 미모와 돋보이는 성격은 새 직장의 남성들을 충분히 설레게 할 수 있었다. 녹이 이런 말은 나에게 하지 않았지만, 그 직장의 남성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나는 짐작이 되었다. 녹의 새 직장의 어느 부서 중간관리자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점심을 같이 먹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등 다른 사람의 주목을 받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퇴근 후에는 자기 차로 태워 주겠다고 하며 녹의 뒤를 계속 그는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녹에게 그를 좋아하냐고 나는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그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으며 그가 일방적으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따돌림은 새 직장의 여직원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녹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 부서장의 입을 통해서 아마 녹의 과거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그 이야기는 사내 여직원들을 통해 순식간에 조직 내에 퍼져버린 것이었다. 직장이라는 세계에서 소문은 금방 퍼지고 또한 금방 무슨 일이냐는 듯이 쉽게 가라앉곤 하는 것이다. 그 소문으로 인해 녹의 부서장의 입장이 곤란해지게 되었다. 그 소문이 진실인지 여부와 상관없이 녹이 계약기간인 육 개월 동안 완전히 근무하는 것은 공공기관의 사내 기강을 어지럽히게 된다는 까닭으로 녹은 어느 날 부서장에게 불려 가서 자진사퇴를 권유받게 되었다. 녹은 말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며 그 뒤로 한 달 후에 녹은 그 새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녹을 따라다닌 그 남자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얘기를 들어도 나는 그에 대한 질투심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녹은 분명히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큼 매력이 있는 여자라는 것을 나는 알았고,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녹을 마사지 가게에서 봤다고 했던 부서장이 그의 직속상사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아마 끝까지 녹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고 녹은 새로운 삶을 위해 그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녹이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하던 때에는 그 남자는 서서히 그녀를 단념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방콕을 떠나던 그 순간까지 알 수 있었던 사실만으로는 그렇게 판단이 되었다.


그만큼 인연은 쉽게 얽히기가 쉽지 않고 한 사람의 과거는 모든 사람들에게 잊히고 완전히 묻혀 버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녹은 자신의 과거가 짜오프라야강의 탁류와 함께 멀리 바다로 흘러가 버리길 원했을 것이다. 이 모든 얘기를 녹은 나에게 담담하게 말하였고 나는 모두 들어주었다.


다음 날에 나는 녹을 만나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짜오프라야 강변의 비싼 호텔의 레스토랑을 예약한 뒤에 나는 약속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나는 그날 식사에는 정장을 하고 나갔었다. 비싼 레스토랑에 맞추려고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은 배려 때문이었다. 그녀도 또한 신경을 쓰고 옷을 입고 나왔다. 액세서리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젊은 그녀를 그 누구보다도 우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녹과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던 태국 정통 레스토랑이 생각이 났다. 짜오프라야강 중류에 위치한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낙원과 같은 태국 정통 식당이었다. 그때 그녀는 처음으로 나에게 강너머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나의 어깨에 그녀의 얼굴을 기대었다. 나의 어깨에 놓여 있던 녹의 얼굴 체온이 아직도 느껴졌다. 오늘의 레스토랑은 이탈리아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고 해산물과 채식을 좋아하는 녹에게는 알맞은 곳이었다. 음식으로 녹을 위로해 줄 수는 없겠지만, 그동안 나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었고 앞으로는 영원히 나의 마음에 남게 될 그녀를 위해서는 레스토랑의 비싼 가격은 전혀 아깝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고 나에게 말했고, 우리의 대화는 주로 우리가 만났던 순간부터 그 이후에 이어졌던 즐거운 추억들로 이어져 갔다. 와인에 취한 녹의 얼굴을 보니 그녀가 최근 겪었던 일들을 잠깐 동안이나마 조금씩 잊어 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는 술이 필요한 모양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취기가 오른 녹의 얼굴을 처음 보았지만,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고상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만약 뼈대가 있는 귀족 가문에 태어났더라도 완벽하게 어울렸으리라 추측이 들었다. 다음 생애에 태어나면 적어도 평범한 삶을 그녀가 살게 되기를 나는 바랬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호텔 정원을 가로질러서 강변에 도착했다. 강변에서 우리는 거침없이 흘러가는 시커먼 짜오프라야강의 밤풍경을 바라보았다. 강가에 세워진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의 호텔들의 불빛이 강빛을 현란하게 수놓고 있었다. 그녀는 그 빛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기구한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녹은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같이 있어 주었다. 방콕의 화려한 스카이라인과 네온사인 속에서 강물은 유유히 흘러갔고, 그 속에서 나의 여인은 슬프게 흐느끼고 있었다.


어느덧 그녀의 울음은 멈추었고, 취기에 못 이겨서 그녀는 나의 어깨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나는 한숨이 나왔다. 녹을 위해 결정적인 무엇인가를 시원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니 안타까워졌다. 언젠가 나도 이 여자를 울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쓸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