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것인가

마이뻰라이

by 김주영

호텔 정원에서 하염없이 울다가 잠들어 버린 녹을 부축 해서 호텔 안으로 돌아왔다. 이미 그녀는 곤히 잠들어 버린 상태였다. 비싼 호텔이긴 했지만 그날 밤은 거기서 자기로 결정하였다. 객실로 들어와서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깨어나지 않도록 침실 조명등을 꺼 주었다. 창가에 가서 커튼을 젖히니 짜오프라야강의 밤풍경이 높은 전망에서 관찰되었다. 강 맞은편에 있는 호텔로 건너가는 숙박객들을 태운 호텔의 배들이 강을 가로질러 물살을 수놓으며 건너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나는 양복 상의를 벗고 넥타이를 풀어서 테이블 맞은편 의자에 걸어 두었다. 의자에 앉아서 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서 몸을 길게 뻗었다. 힘든 하루가 오늘도 지나가고 있었다.

녹은 침대 위에 누워 술기운에 괴로운 듯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고 그녀의 가슴은 내쉬고 들이마시는 호흡 동작으로 부풀어 올랐다고 다시 가라앉기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치마가 위로 올라 허벅지가 노출되었으며 길게 뻗어 나온 그녀의 다리는 어두운 곳에서도 뚜렷이 관찰되었다. 매력적이었다. 나를 방콕에 영원히 눌러 앉힐 만큼 치명적으로 아름답고 관능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녀를 편하게 잠을 잘 수 있도록 놔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혹시나 더 괴로워하는지 몰라서 관찰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녹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돌아누워서 다시 평온한 호흡을 유지하며 계속 잠을 자고 있었다. 돌아누운 그녀의 뒷모습은 완벽한 허리와 엉덩이의 라인을 내 눈에 다시 비추어 주었다. 나는 호흡을 멈추었고, 유혹을 이기고자 눈을 감아 버렸고, 잠시 후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녀는 뭔가 태국말로 잠꼬대를 하였으나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와인을 나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지며, 오늘 밤은 어쩌면 그동안 잊어버렸던 불면증으로 시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로 가서 미니 알코올 몇 병을 꺼내 가지고 와서 다시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짜오프라야강을 바라다보았다.


'나는 꼭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녹을 위해 태국에 남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그녀는 나를 원하고 있으며 같이 계속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왜 그녀와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나의 마음속에 계속 질문이 이어져 갔다. 잠들어 있는 녹의 육체를 바라보지 않도록 나는 눈을 감고 생각을 계속하였다. 얼음을 타고 마시지 않아서 술은 독했으며, 그 독한 술의 기운이 목을 타고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얼음을 타서 양주를 먹고 싶지 않았었다. 이 독한 기운을 그대로 느끼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나도 조금씩 취해가고 있었다.


'그녀가 마사지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그녀가 애를 낳은 사실을 몰랐더라면 어땠을까? 그녀가 방콕에서 어느 정도 교육 수준이 있는 여자였고, 나와 대체로 수준이 비슷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이 술이 취하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마음속에서 흘러나왔다. 방콕에서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솔직히 나는 당시 그녀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내며 나의 공허한 영혼과 외로움을 달래며 지냈던 것이 오히려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녀는 나의 결혼 상대가 될 수는 없다. 어머니에게는 녹에 대해 뭐라고 말씀을 드린다는 말인가? 내가 태국여인과 만나서 태국에 눌러사는 것을 분명히 반대하실 것이고, 녹을 한국에 데려와 같이 산다면 그녀는 한국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솔직히 그 어떤 여자와도 결혼할 생각은 지금 없다는 것이 맞지 않는가? 녹이 과거에 어떤 일을 한 것을 어머니가 아신다면 기절하실 텐데...'


녹을 그동안 나의 외로움을 달래 왔던 상대로만 생각하기에는 그녀의 존재는 나에게 너무 각별하였다. 언젠가는 서로 이별해야 할 인연으로 막연히 생각해 오고는 있었지만 이별의 시간이 조금씩 다가오자, 나도 또한 괴로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녹도 나를 처음에는 한 명의 고객으로 생각하였겠지만 나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 주었고, 어느덧 나에게 정을 주어 버렸다고 판단이 들었다.


태국사람들에는 '끌렌짜이'라는 정서가 있다고 한다. 나는 태국에 살면서 이런 문화를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상대방에 대하여 자신의 마음을 노골적으로 표시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배려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끌렌짜이와 비슷한 문화가 있기 때문에 태국사람의 이러한 정서를 이해할 수 있지만, 서양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개념이므로 끌렌짜이를 주관이 없거나, 연약한 사람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태국의 문화적 특징에서 녹은 나를 방콕에 잡아 두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나에게 강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가 되었다.


'내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방콕에 와서 무슨 일이라도 해 보려고 한국에서 건너온 그저 별 볼 일 없는 한국남자로서 녹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내가 그동안 공부한 시간들과 내가 이룩해 놓은 어중간한 것들이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내가 녹으로부터 지키코자 하는 나의 것들은 정말 어중간한 정도가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 왔으며 내 몸도 술의 독한 기운으로 괴로워졌고, 어느덧 테이블 위의 미니 알코올은 여섯 병이 비워져 버렸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의자에 기댄 채 잠들어 버렸다.


꿈속에서 녹과 나는 어느 아름다운 산골 마을에 사는 부부였다. 우리가 사는 산골은 알프스의 어느 그림 같은 호수와 숲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백인들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었으므로 매일 달콤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우리에게는 귀여운 아이들도 태어났고 내가 숲에서 그리고 호수에서 짐승들과 물고기들을 잡아 오면 녹은 그녀가 따온 채소와 과일을 곁들여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가족들과 식사를 했다. 아이들과 놀아 주며 뛰놀던 산비탈에서 우리는 사랑의 키스를 나누었고, 둥근달이 뜬 밤이 오면 호숫가에 가서 수영을 하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은밀한 사랑을 나누었다. 사랑을 나눈 후에 풀잎에 누워 하늘을 보니 별들이 구름에 비껴가며 흘러가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해 버린 순간에 나는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옆에 누워 있던 녹이 돌아보며 왜 우냐고 물어보았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있으니까, 이 꿈에서 깨어날까 봐 두려워서 우는 거야."라고 나는 대답했다.


새벽의 여명이 터오자, 나는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어제 일이 천천히 기억이 되었다. 녹은 어느새 깨어서 몸을 단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깨어난 것을 알아차리자 나에게 살며시 말을 걸어왔다.


"장. 괜찮아요? 어젯밤에 제가 너무 술 취해 버려서 죄송해요. 여기 호텔에 들어오게 된 지도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알았네요. 장이 의자에 기댄 채 밤새 잠을 불편하게 잤을 텐데. 어떻게 해요? 너무 미안해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장에게 얘기하는 게 아니었는데, 장 이외에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이야기를 터놓고 할 상대가 없었어요. 들어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덕분에 제 마음은 한결 편해졌어요. 장이 너무 고생하셨어요."


"아니야. 나에게 녹이 전화해 줘서 고마워. 요즈음 녹하고 전화통화도 뜸해져서 나는 사실 걱정하고 있었거든. 녹이 기분이 덕분에 좀 나아졌다면 다행이야. 그동안 녹에게 내가 신세만 졌는데, 이번 기회에 약간 보답을 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은걸."라고 나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장은 저에게 의미 있는 분이세요. 저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다 자기의 삶이 있는 거예요. 저는 저의 삶을 살고 있는 거고요. 어제 술을 마시며 사실 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바로 그 사람을 앞에서 쳐다보고 말이죠. 저의 새 직장에서 생긴 일 때문에 괴로워서 술이 취하게 되었지만, 술에 취하자 이상하게도 장에 대해서만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어떤 때는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더 좋은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먼 훗날 내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를 장이 알게 될 날이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때는 장이 어쩌면 한국에 있을 때이겠죠..."


녹은 쓸쓸한 미소를 얼굴에 지어 보였다.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룸서비스로 죽을 시켰다. 어제의 숙취로 녹은 거의 먹지를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녹에게 오늘도 하루를 잘 버티려면 빈속에서는 힘들 거라고 위로하며 조금이라도 먹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숙취가 있는 날 아침에 오히려 식욕이 왕성한 편이어서 한 그릇을 다 비워버리자, 녹은 자기 음식을 나에게 덜어 주었다.


우리는 같이 호텔을 나와서 근처의 지상철역인 사판탁신역으로 걸어갔다. 출근하려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현지인들의 모습과 아침 국수를 팔려고 거리에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길거리 음식점 주인들과 종업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오늘 아침도 방콕은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들 속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지상철 계단 위를 올라가는 사람들 중에 교복을 입고 학교로 가는 듯 한 여대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나는 녹이 그 여학생들의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하고 속으로 바라고 있었지만 녹은 그녀들의 모습을 또렷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어느 날에 지상철 플랫폼에 서서 눈물을 글썽이며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런 눈망울의 슬픈 모습은 이제 녹에게는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새 강인해져 있었고, 무언가 결심이 선 듯 보였다.


이른 아침에 회사에 출근을 하여 카페에 가서 커피를 시키고 회사의 정원에 앉아서 열대 나무들의 틈 속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아침 햇살을 바라보았다. 카페 종업원은 내가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고 오늘 무슨 행사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어제 행사가 있었다고 대답했더니, 종업원은 웃음을 지으며 말 대신 엄지를 치켜올려 주었다.


사무실 안에 들어와서는 넥타이와 정장 상의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왜 정장을 입고 회사에 나왔느냐는 질문을 다른 직원들로부터 받기가 귀찮아서였다. 그리고는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스리랑카 출장을 위해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방콕에서 근무하는 기간 동안 이제는 마지막이 될 출장이었고, 중요한 건이었다.


스리랑카 현지 주요 정책 결정자들을 대상으로 한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이었고 삼 년 동안의 프로젝트의 총 결산이 될 것이었다. 아마 스리랑카 현지에서는 어떤 결론을 내렸으리라 예상이 되었지만, 섬나라 국가에 사는 국민들의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끝가지 알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서양인들의 식민지를 겪었던 피해의식인지 외부인에 대해서는 개방적이고 친절하게 굴면서도 한편으로는 꽤 경계를 한다는 인상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안 받을 수 있었다. 이번 스리랑카 출장은 셀린과 동행하게 되어 있었고, 주요 의사 발언권은 그녀에게 일임해 주었다. 나는 이 조직의 정식 직원이 아니었고 그녀는 방콕사무소의 최고 책임자였기 때문이었다.


셀린은 아침에 나에게 미팅을 신청하였고, 나는 그녀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태국비서가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였다. 셀린은 자신의 컴퓨터 앞에 앉아서 분주히 이메일을 작성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방문에 노크를 하였다.


"들어와요. 장."


"좋은 아침이에요. 셀린."


"이번 스리랑카 출장은 사실 제 스케줄 때문에 다른 직원이 대신 가도록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다행히 제 스케줄을 변경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이번 출장을 같이 갈 수 있게 되어 기쁘네요."


셀린의 연푸른 셔츠에 단추가 하나 풀어져 있었으며 그 사이로 삐져나온 그녀의 가슴골이 눈에 띄었다. 백인 특유의 옅은 핑크색 살결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재빨리 눈을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그녀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


"그런데, 장이 무에타이 경기를 하는 것을 우리 태국 직원이 지나가면서 보았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네. 몇 달 전에 MBK 백화점 앞에 있는 야외 링에서 경기를 가졌어요. 제가 졌지만 상당히 잘 싸운 경기라고 하더군요."


"아. 그래요? 시합을 했다는 게 정말이었군요. 장이 경기하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군요. 언제 또 시합을 해요?"


"이주일 뒤에 경기가 있어요. 스리랑카 출장 가기 전이지만 문제는 없습니다. 출장준비는 거의 다 끝났어요. 현지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스리랑카 현지 정책결정자들의 마지막 결론을 듣는 자리니깐요."


"어머. 그래요? 그러면 경기하는 날이 언제인지 그리고 어디서 하는지 알려 줘요. 직원들과 같이 장을 응원하러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