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 시합이 마친 다음 날부터는 바로 사흘 후에 출발할 스리랑카 출장을 최종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체력이 바닥이 났을 정도로 힘든 경기였지만 기분은 너무 좋았다. 얻어맞은 몸의 구석구석이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얼굴은 그렇게 표시가 나지 않았다. 상대 선수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녹에게 문자를 보내어 어제 경기를 이겼다고 알려 주었지만 그녀는 축하한다는 대답보다는 이제 제발 무에타이 시합은 그만두라고 충고를 하였다. 하지만 태국에서 무에타이를 시작한 이후 이년 넘게 꾸준하게 훈련해 온 나의 무에타이 생활을 총 정리한 경기여서 이제 나에게도 여한이 없었지만 무슨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두 번 다시는 시합을 하지 않겠다고 나도 또한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마지막 경기는 평생 잊지 못할 시합이었지만 솔직히 너무 힘들어서 이제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경기였던 것이었다.
스리랑카 콜롬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옆에 앉은 셀린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장. 정말 굉장한 경기였어요. 나는 장이 이길 것이라고는 사실 생각을 못했어요. 마지막 일분 정도 남겨 놓고 장이 승부수를 띄운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것이 적중했고요. 근데 장의 몸은 괜찮아요? 아직 멍든 곳이 많아서 계속 아플 것 같네요. 이번 출장은 예감이 좋은 것 같으니까 너무 큰 걱정하지 말아요."
"칭찬해 주셔서 감사해요. 셀린. 저도 제가 이길 줄은 모르고 링 위에 올라갔어요. 시합이 계속되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승부 근성이 생기게 되었어요. 아무튼 경기장에 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번 출장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면 저도 좋겠어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셀린과 회사를 위해서도 스리랑카 현지 정책결정자들이 합의를 해서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면 저도 바라고 있습니다."
셀린은 나의 말에 그녀의 대답을 약간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비행기는 콜롬보 국제공항에 착륙을 하였다. 우리는 예약해 놓은 호텔 픽업 서비스를 이용하여 콜롬보 시내로 들어왔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밤 시간의 콜롬보 거리는 조용하였고 가로등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이틀 후에 카레이싱 경기가 콜롬보 시내의 도로에서 개최되는 까닭으로 레이싱 도로로 지정된 곳에는 보호차단막을 설치하려고 자재들을 쌓아 놓은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레이싱 대회당일 날은 교통 혼잡이 예상되었으므로 내일 숙박할 호텔을 일부러 콜롬보 시내가 아니라 공항에서 가까운 네곰보 해변가로 정하였고 콜롬보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네곰보는 공항에서 가까운 해변 휴양 도시였고, 바쁜 셀린이 방콕으로 돌아오기 전에 하루만이라도 휴양을 하고 오기를 원했으므로 네곰보는 최적의 장소였다. 셀린은 남편과 이혼한 이후 자식 둘을 키우며 바쁘게 지내는 여자였고, 방콕에서 근무한 삼 년 동안 사무소장으로서 나를 정직원들과 차별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준 합리적인 직장 상사였다. 나이는 나와 동갑이었지만 방콕사무소의 모든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그런 지위에 있는 여자여서 내가 솔직히 감히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방콕사무소의 정직원들과 계약직 직원들은 그녀의 눈치를 항상 살피느라 언제나 신경을 곤두 쓰고 있었다. 그들의 인사문제와 계약 갱신 여부 등의 생존의 문제를 그들 인생에서 좌우하는 그런 엄청난 지위에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탄 차량은 어느덧 호텔의 정문에 도착하였다. 벨보이가 나와서 차문을 열어 주었고 트렁크 안에 있는 우리 짐들을 호텔 안으로 옮겨 주었다. 호텔 프런트로 가서 체크인을 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셀린과 사무실 밖에서 처음으로 둘만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프런트에서 호텔 직원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이며 객실까지 인도되어 같이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격조 높은 유럽 여성의 품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 출신이며 파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셀린은 합리적이긴 하지만 콧대가 높은 면은 본인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정직원이 아닌 신분에서 사무소장을 모시고 출장 나왔다는 사실이 의외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셀린은 한국에서의 직장 문화처럼 나에게 어떤 의전 행위를 바라지는 않았다. 본인 스스로 짐 가방을 끌며, 내일 회의에서 필요한 자료를 혼자서 준비해 온 점 등을 생각하면 조직 내부의 위계질서에 익숙해져 있는 그런 종류의 상사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의 객실로 안내되어 들어가게 되었고 다음날 아침 만나기로 하고 문을 닫았다. 나는 방안에 들어와 샤워를 마친 후에 내일 발표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다시 한번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테이블 위의 호텔 전화기가 울렸다. 무슨 전화일까 생각하면서 수화기를 들었다. 셀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 내일 회의와 관련해서 상의할 것이 있으니까 잠깐 제 방으로 와 줄래요?"
순간 나는 당황이 되었다. 크게 상의할 내용이 있을까 의아해졌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셀린의 객실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셀린은 문을 열어 주었고, 나를 보고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그녀의 객실 안은 그녀가 뿌린 듯 한 프랑스 향수의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나는 가져온 회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침실용 가운을 입고 있었다. 나는 야릇한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일부러 태연한 척 행동을 하려고 하였으며 가능한 자연스러운 말로 대화를 시작하려고 했다.
"셀린. 많이 피곤할 텐데, 내일 아침 식사 후에 회의 자료를 보셔도 될 거예요. 왜냐하면 내일 아침 회의가 오전 열한 시에 시작되니깐요."
"회의 자료는 거기 탁자 위에 그대로 두어요. 그냥 우리 얘기나 나누어요. 사무실에서는 나를 보면 장이 편하지가 않았을 텐데, 스리랑카에서는 편하게 지내요. 우리는 사실 나이가 같잖아요."
"항상 저 같은 직원에게 잘 대해 주셔서 평소에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집에 애들도 있어서 이번 출장을 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저와 같이 출장 와 주셔서 고마워요."
"저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이제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같이 와인 마셔요. 장."
우리는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였고 셀린은 나의 한국생활에 대해 물어보았다. 나는 군대에서 있었던 일이며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이야기들, 또한 방콕에 오기 전까지 근무를 했던 한국의 직장 이야기며 그리고 방콕에 어떻게 오게 된 지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주었다. 셀린은 웃으며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파리 생활, 전남편과는 어떻게 만났고, 애들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이혼하게 된 지 등에 대해서도 솔직히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민감한 사생활임에도 의외로 담담하게 말을 하고 있었고, 그녀의 말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겁 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평소 많이 힘들었고 아마 대화상대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되었다. 대화가 계속되면서 우리는 진지해지기도 하고, 또 서로의 얘기에 공감해 주기도 하며, 어떤 때는 농담을 하여 서로 배꼽을 잡고 웃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새 서로의 대화가 잠깐 끊기게 되었다. 어떤 말로 다시 얘기를 시작할까 망설이면서 우리는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푸른 눈은 나의 눈을 진지하게 응시를 하였다. 그러더니 그녀는 일어서서 내게 다가왔다. 나의 옆에 앉더니 나를 끌어안아 버렸다. 순간 나는 몹시 당황했지만 또한 그녀를 불편하게 해 주고 싶지 않은 감정이 동시에 생겼다. 왜냐하면 그녀의 외로움이 오랜 시간의 대화를 통해 느껴졌고 방콕에 온 이후로 내가 겪어 왔던 외로움으로 인해 그녀가 이해되었고 동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셀린은 나의 얼굴을 손으로 잡더니 자신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오게 하였다. 그녀의 지중해 같이 파란 눈빛 속이 들여다보였고, 그 바다는 분명히 오랜 기간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대화 상대 이상으로 나를 지금 원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녀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대였고,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순간 녹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녹에게 죄책감이 들었지만 셀린을 이대로 저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직장상사였지만 그녀는 몇 시간 동안의 대화 속에서 진솔한 모습과 함께 누군가로부터 치유받아야 할 외로움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나 같은 환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거친 숨결이 나의 온몸에 전달되었다. 그녀는 나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왔고, 한참 동안 나의 탄탄한 근육을 손의 느낌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눈을 다시 바라다보며 무엇을 바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의 가운 사이로 손을 넣었고 셀린의 육체는 크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나의 입술을 더욱 강하게 애무하였다.
잠시 후 나도 그녀의 온몸을 나의 촉촉한 입술로 애무해 주었다. 셀린은 정신을 잃어버릴 듯 큰 신음소리를 연달아 내었고, 잠시 후 몸을 일으켜서 나를 침대에 눕힌 다음 나의 육체를 강하게 애무해 나갔다. 녹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녹의 얼굴이 다시 떠 올랐지만 나는 방콕에서 나를 업무적으로 그동안 챙겨준 셀린의 외로움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 나와 셀린은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어로 뭐라고 몹시 외쳐대었다. 그녀의 몸 전체는 음악을 타듯 아름답게 움직였고 한참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마지막 환희의 전율이 왔을 때 그녀는 머리카락을 잡고 천장을 향해 얼굴을 들고서는 잠시 동안 머무르다 서서히 나의 몸 위로 그녀의 몸을 눕혀 왔다.
잠시 후 우리는 서로 몸이 떨어지며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웠다. 나는 일어나 침대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셀린이 자신에게도 담배 한 대를 달라고 했다. 둘의 담배연기가 방안을 메우고 있었지만 서로 말이 없었다. 나는 셀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나는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말없이 담배를 피우는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있다가 우리는 같이 잠들었고 다음날 새벽에 나는 눈을 떴다. 커튼을 열어 보니 눈앞에 콜롬보 해변과 저 멀리 인도양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한숨이 순간 나왔고, 나는 발코니로 나와서 담배 한 대를 더 피웠다. 어젯밤의 일이 기억나며 후회가 생겼다. 셀린은 어젯밤 나를 통해 그녀의 모든 억제되어 왔던 욕구를 해소하였던 것이었다.
아침 식사 후에 우리는 차량을 타고 회의 장소로 이동하였다. 어젯밤의 모습에서 셀린은 다시 카리스마 넘치는 직장 상사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회의실에 도착한 셀린은 참석한 스리랑카 고위 정책 결정자들과 악수를 나누며 본인의 소개를 하였다. 스리랑카인들 사이에서 셀린은 돋보이는 한 송이 꽃처럼 회의를 지배해 나갔다. 나의 프레젠테이션은 나의 무에타이 마지막 경기만큼은 훌륭하지 못했다. 왠지 나는 그날 자신감이 떨어져 있었다. 그동안 삼 년의 시간을 이 프로젝트에 투자한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순간이었지만 이미 시간은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나를 셀린은 그녀의 능숙한 회의 진행 기술로 보완을 해 주었고, 스리랑카 프로젝트 전체를 파악하고 있음을 알게 해 줄 정도로 요점을 잘 짚어 주고 있었다. 스리랑카 최종 결정자들이 회의가 끝나가는 즈음에서 새로운 제도 도입에 합의할 때에도 합의서에 이후 분쟁의 소지가 생기지 않도록 단서 조항을 삽입하는 등 그녀의 역할은 빛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녀가 삼십 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도 방콕사무소의 최고 책임자가 될 수 있음을 나는 그날 회의에서 나의 눈을 통해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우리는 콜롬보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예약을 해 둔 네곰보의 휴양 리조트로 차량을 타고 이동하였다. 오늘 회의 이후부터 나는 셀린의 카리스마에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다. 이것은 오직 그녀의 업무적 탁월성을 눈으로 본 이후에야 가능했을 터인데, 나는 또한 그녀가 아니었으면 어중간한 상태에서 프로젝트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네곰보 해변에 도착한 이후 우리는 다시 서로를 끌어안고 온종일 방 안에서 시간을 보내었다. 그녀는 실내암벽등반을 취미로 했으므로 체력이 무척 좋았다. 이러한 점은 그녀와의 육체적 관계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한 그녀가 외로움을 참고 견디다 바로 그 당시에 나를 통해 폭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방콕으로 돌아오자, 나는 죄책감이 몹시 들기 시작했다. 녹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셀린 또한 외로운 여자였으니 내가 그녀를 위해 마지막 감사의 표시를 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해 보려고 했다. 이런저런 많은 생각이 들며 나는 방콕을 떠날 여러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려서 이제는 방콕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며칠 후에 셀린은 자기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장.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어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해 줄 직원이 필요해요. 장에게 이 프로젝트를 맡겨 볼까 생각하고 있는데, 장의 생각은 어때요? 이 프로젝트는 앞으로 오 년 기간 동안 진행될 거예요."
나는 이 프로젝트의 수행 직원 자리가 이미 비워 있고, 이에 대한 공모가 나간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자리를 내가 선택하게 되면 나는 지금 한국의 직장을 그만두고 향후 적어도 오 년 이상을 방콕에 남게 될 것이며, 여기 회사의 정직원으로 채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셀린과 녹이라는 두 명의 여자 중에서 언젠가는 한 명을 결정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야망을 위해 녹을 버릴 수도 없다고 생각되었고, 셀린과 언제까지 이렇게 성관계를 해 줄 수도 없는 처지였으므로 나는 방콕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었다.
"셀린. 저한테 그런 좋은 자리를 제의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자, 셀린은 냉정하게 대답을 하였다.
"장이 이 방문을 그냥 나서는 순간부터 장의 인생에서 큰 실수를 한 거라고 생각해요. 두 번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장이 스스로 걷어찼으니깐요."
나는 이 말을 듣고 셀린에게 한국식으로 목례 인사를 한 다음 뒤를 돌아서서 셀린의 사무실 문을 나왔다. 그녀를 뒤돌아보니 셀린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나 나는 한 숨을 내 쉬고는 다시 걸어 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