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흘러내리는 것이 더 이상 나의 눈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자 나는 샤워실 바닥에서 일어났다. 어지럼증이 느껴졌지만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샤워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멈추게 하였다. 지난 삼 년을 정리하고 방콕을 떠나가는 길이 이다지도 힘들 줄은 진정 나는 알지 못했었다. 술이 깨어 잠이 들지 않는 오늘 밤은 조금씩 새벽으로 다가가고 있었고, 나는 바람을 쐬고 싶어서 베란다 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왔다. 새벽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밤새 식어버린 열대 지방의 대기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자칫 잠들어 버려서 회사에 늦게 가버릴까 두려워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였다. 최대한 말쑥한 차림으로 치장하여 밖을 나왔다. 여명의 기운이 동쪽으로부터 서서히 퍼지고 있는 중이었고, 이른 아침부터 하루의 밥벌이를 위해 나서고 있는 현지인들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부터 나는 서서히 방콕을 떠나갈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으며,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먼 길이었지만 천천히 걸어서 회사까지 가기 시작하였다. 익숙한 거리들이었지만 멀지 않아 떠나가야 한다고 생각이 드니 마치 처음 걸어 보는 거리처럼 낯설어져 갔다.
사무실에 들어와서 홍차를 마사며 잠의 기운과 약간의 어지러움을 이겨내려고 노력하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사무실 안 정리를 오전 내내 진행하였다. 그동안 사용한 네 평 남짓한 나만의 공간이었지만 삼 년의 시간 동안 나는 꽤 많은 것들을 이곳에 자리 잡게 해 왔었던지 정리에 다소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필요한 자료들과 개인 물건을 박스에 담고 남은 것들 중에서 괜찮은 것은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앞으로 태국을 떠나기 전에 남은 기간은 잔여 휴가를 신청하여 귀국 준비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비서 직원에게 휴가신청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일을 시작하였다. 셀린에게 보낼 이메일을 적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셀린에게
오늘 사무실에 나와서 당신의 방을 찾아갔지만,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메일을 적게 되었습니다.
당신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으나 당신이 나의 전화를 어쩌면 받기를 망설일 수 있을까 봐 마음에 걸렸으며, 설사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더라도 우리의 대화 도중에 나의 마음이 혹시 잘 못 전달이라도 될 수 있을까 염려되어서 이렇게 메일을 적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언젠가 당신도 마음이 정리가 될 때는 저의 이메일을 열어 볼 테니깐요.
셀린. 그대를 만났고 당신과 같이 근무한 지난 삼 년간은 나에게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당신이 없었더라면 어려웠고 외로웠던 삼 년간을 나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한 스리랑카 출장의 추억을 저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며 평생 소중히 간직할 것입니다. 직장의 상사에서 어느덧 저의 친한 친구로 당신은 다가와 주었으며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저에게 열어 준 것에 대하여 저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낍니다.
다만, '셀린, 당신과 더 일찍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그 이후부터 저의 마음을 계속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는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당신은 이곳 조직에서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대상이며, 또한 두 자녀의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반면에,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은 남자이지만 그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당신을 떠나고자 하는 또 그런 남자입니다.
최근에 저에게 새로운 프로젝트 자리를 제안했을 때, 저는 셀린의 사려 깊은 배려에 감동을 하였습니다. 제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그대는 친절하게도 저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개인적인 출세를 위하여 셀린의 앞길에 흠이 생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회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금방 소문이 날 정도로 모든 곳에 귀와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우리는 각자 자기가 걸어가야 할 삶이 있다고요. 셀린에게는 당신의 삶이 있고 저는 또한 제가 걸어가야 할 삶이 있습니다. 같이 걸어왔던 지난 삼 년의 시간 속에서 저는 당신으로 인하여 찬란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이제는 다시 저의 삶이 이어지게 되는 한국으로 떠나가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과 함께 하였던 지난 삼 년의 시간들, 그리고 당신이 저에게 보여 주었던 스리랑카에서의 솔직함과 사랑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셀린 당신을 사랑합니다. 언젠가 그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장으로부터."
셀린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나는 사무실을 걸어 나왔다. 저녁이 넘어선 시간이었으므로 모두들 퇴근하고 아무도 없는 적막한 사무실이었다. 파견 직원인 나는 언제나 이곳에서 이방인이었으므로 처음처럼 마지막에도 나를 환송해 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도 어느 사이에 이런 적막한 공간과 아무도 나에게 신경을 써 주지 않는 외로움에 익숙해져 버렸던 것이었다.
그날 밤은 타나카의 가게에 들렀고, 오랜만에 그의 가게를 찾아 준 나를 타나카는 반겨 주었다. 그에게 그동안 지내온 시간들을 모두 이야기하여 주었다. 마치 자기 얘기처럼 관심을 가지고 들어 주는 타나카가 무척 고마웠다. 그의 가게는 여전히 일본인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것 같아서 나는 마음이 편했다. 내가 방콕을 떠나더라도 그의 가게는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이전에 자리를 같이 하곤 했었던 일본인 프리랜서 사진기자를 위해 애도의 술잔을 기울였다. 몇 잔을 더 기울이다 나는 타나카의 가게를 나와서 집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에 나는 용기를 내어 녹에게 전화를 걸었고, 토요일 밤에 그녀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그녀는 평소처럼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는 내가 사 온 음식으로 저녁을 같이 먹었다.
"저는 다음 달에는 이 아파트에서 이사를 나가요."
"그렇구나. 그러면 언니 집으로 갈 거야?"
"네. 당분간은 언니에게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아요."
"언니와 같이 지내면 녹에게 좋은 점이 있을 거야. 녹은 전문대학에 입학할 계획이라고 했지?"
"네. 몇 년 동안 공부에만 전념하려고요. 그동안 언니가 저의 숙식을 챙겨 줄 거예요. 졸업하고는 다시 돈을 벌어서 언니에게 신세 진 거를 갚아 줘야죠."
"장은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네요."
"음. 비행기표는 이미 예약이 되어 있어. 회사일도 다 정리되었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네. 녹이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아."
녹은 말이 없었다. 일어서서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나한테 자기 쪽이 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쳐 버렸다. 나는 한숨이 길게 나왔다. '앞으로 더 이상 무슨 말을 그녀에게 해야 할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커튼 뒤에서는 녹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녀는 설거지를 하지 않고 한참 동안 밖을 보며 서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커튼을 열고 내 앞에 나타났다. 전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는 돌아와 있었다.
그날 밤은 얘기를 한참 나누다 늦게 잠이 들었다.
잠의 기운이 옅어져 감에 따라 눈이 조금씩 떠져 갔다. 일요일 아침의 늦잠이어서 그런지 의식이 들어와도 마음의 여유가 느껴져 왔다. 아파트 밖에서 현지인들의 목소리들이 뜨거운 공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현지어가 서투른 나에게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휴일의 적막을 깨워 오고 있었다.
어느덧 또렷이 정신이 들어오자 녹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화장대에 앉아서 거울을 보며 화장하고, 머리를 만지고 여러 가지 공을 들이고 있었다. 나는 달리 할 일이 없는 것처럼 그녀의 작업을 이십 분 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인의 화장술은 실로 하나의 예술행위라고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윤곽이 변해 가고 있었고, 그녀의 마지막 작업은 어느덧 발톱에 집중되고 있었다. 매니큐어로 발톱을 핑크빛으로 색칠하고, 그 위에 핀셋으로 꽃모양의 작은 흰 조각을 발톱들마다 한두 개씩 올려놓는다. 마지막으로는 무색의 액체를 발톱에 칠하여 코팅 겸 고정을 시켜 놓았다. 나는 그녀의 페디큐어 전 과정을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감탄의 여흥은 한동안 마음을 맴돌았지만, 그 감정이 서서히 옅어져 가자, 순간 머릿속에서부터 뭔가 깨달음이 날카롭게 지나갔다. ‘아! 이것은 나를 위한 화장이 아니구나!’라는 말이 나의 가슴까지 내려갔다.
“나가서 같이 점심 먹을까? 한국음식 좋아하잖아?”라고 나는 말을 하였다.
“아니오. 저 오늘 점심 열두 시에 약속 있어요. 같이 점심 먹을 시간 없어요. 당신은 여기 더 있다가 나가도 돼요. 문만 안에서 잠그고 닫아 줘요.”라고 녹은 대답 했다.
“아니야. 일단 같이 나가지. 뭐.”
그녀는 대답이 없다. 나도 서둘러 간단히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녹의 아파트를 나와서 우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말이 없었다. 몇 초간의 어색한 침묵을 깨려고 나는 입을 떼려고 했으나, 문이 열리며 현지인 가족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나오려던 말을 나는 다시 입안으로 삼켰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열대지방의 공기는 중천에 떠 있는 태양에 의해 후덥지근하게 달구어져 있었다. 녹과 나는 나란히 걸었으나, 서로의 간격은 어색하게 떨어져 있었고, 나는 그녀에게 건넬 말을 찾고 있었다. 도로변에 도착하자, 그녀는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 듯했다.
“택시 타고 갈 때까지 같이 있어 주께.”라고 말하며, 나는 지갑에서 택시비에 충분할 돈을 꺼내려고 생각 중이었다.
“아니오. 저 혼자 타고 갈게요.”라고 녹은 대답 했고, 그녀의 눈은 적당한 물기를 머금고 나를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다 봐 주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태국어로 말했다.
"마이뻰라이 마이? (괜찮겠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나였지만 한마디 한마디를 차마 입에서 떼어 놓기가 무척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
"마이뻰라이 카. (저는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길 원하는 것처럼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택시는 바로 앞에 어느새 정지를 했고, 그녀는 차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떠나고 있는 그녀를 보다가 나는 돌아서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라고 나는 생각을 하며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해 버린 이별의 세리머니 속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