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는 밤하늘을 몇 번 선회하며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방향을 선회하기 위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비행기의 창밖으로 방콕의 먼 야경이 보였다. 처음 태국에 도착했을 때 바라봤던 비행기 밖의 풍경은 낮이었지만 떠날 때는 밤이었다. 저 야경 속 어딘가에서 녹은 지금쯤 아마 나를 생각하고 있을 줄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방콕이라는 새로운 공간과 삼 년이라는 시간들 속에서 얽혔던 인연들과 나는 이제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시 방콕에 올 수 있을까?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때는 언제일까? 그때는 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녹을 왜 나는 남겨 두고 떠나고 있는 걸까?‘
두서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고 있었다. 저 삼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참 많은 인연들과 얽히게 되었고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들이 생겨났었다. 사연을 품은 보따리를 메고 나는 다시 모국인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운 사람들!' 애잔한 마음이 나의 몸 전체를 감싸더니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옆에 앉은 승객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몰래 눈물을 한참 동안이나 딱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리고는 잠시 후, 나는 한국에 도착하게 된 이후로 또다시 맞닥뜨려야 할 시간들이 두려워지며 갑자기 걱정이 들기 시작했으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다시 눈을 떠보니 비행기는 타이베이 부근의 상공을 날고 있는지 거대한 도시의 눈부신 야경을 왼편을 보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몇 시간 정도 후면 인천공항에 도착할 것이라고 짐작이 되었고 잠이 다시 들어 버렸다. 어느덧 방송이 나오면서 객실 등이 모두 환하게 켜지며 아침식사 서빙으로 객실 승무원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영종도 근처의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하늘과 바다는 이른 아침의 여명으로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삼 년 만에 보게 된 한국땅이었다. 그동안 한 번도 한국에 오지 않았었고, 내가 있던 태국에도 누구 하나 찾아와 주지 않았었다. 나의 존재가 저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잊혀 버리지는 않았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다. 하지만 태국에 와서 지난 삼 년을 낯선 인연들과 얽히며 지냈듯이 새로운 땅과 같은 한국에서도 나는 다시 새로운 인연으로 얽히며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귀국한 후 반년이 흘러갔다. 언제 내가 태국에 있었느냐는 것처럼 한국이라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사회는 태국에서의 기억들을 거의 잊어버리게 만들어 주었다. 태국을 떠나기 전에 속해 있었던 회사에 다시 복귀하여 근무를 시작하면서 정신없이 한국의 업무 스타일을 따라가야 했다. 마치 태국사람인 내가 한국에 와서 한국사회와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것인 냥 생각이 들었던 적이 많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동안 태국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태국의 거리와 마음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던 시간 속을 떠나 왔으나, 나의 몸과 마음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 경쟁으로 살벌한 직장과 모든 것이 바쁘게 움직이는 서울의 한복판에서 나는 또 다른 외국인으로서 힘겹게 적응해 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방콕에서는 외국인으로서 낯선 환경과 외로움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버텨 왔지만, 이제 다시 한국에 온 나는 낙오되지 않으려면 정신없이 따라가야 하는 한국생활에서 한 명의 이방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대단히 아이러니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날 아침도 나는 출근시간부터 고생을 하며 사무실로 나왔다. 지하철 속에서 그리고 버스에서 시달리며 매일 사무실로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었다. 오늘은 버스 안의 비좁은 공간 속에서 차에서 내리기 위해 문 쪽으로 가까이 움직이려 했는데, 밀지 말라고 온갖 짜증 썩인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와서 그런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아침의 집중 근무시간대에 나는 검토를 요하는 보고서들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나의 스마트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오랜만이군. 장서혁 씨. 이 사람아! 귀국했으면 나한테 한번 전화라도 할 것이지. 자네 회사 사장과 어제 점심을 먹다가 자네 얘기를 물어봐서 귀국한 줄 알았네. 자네 성격이 먼저 연락할 것 같지 않아서 내가 전화했어. 암튼,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방콕에서 혼자 어떻게 잘 지냈는지 궁금하군. 오랜만에 만나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해야지. 오늘 저녁 시간 있어?"
어느새 상무로 승진한 김명석 전 부장님이 갑자기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었다. 이제는 내가 감히 연락하기도 힘들어져 버릴 정도로 지위가 높아져 버린 그의 전화를 받자 깜짝 놀랐다. 그날 저녁에 김상무 님을 만나서 오랜만에 얼굴을 보며 얘기를 나누었다.
"상무님. 잘 지내셨습니까? 한국에 왔어도 그동안 연락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방콕에 계실 때 제가 상무님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덕분에 방콕에서 삼 년이나 근무하고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사가 늦었지만 상무님의 승진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어허. 이 사람. 다 자네가 유능해서 그런 거지. 내가 뭐 해준 게 있었나? 본사에 물어보니까 자네에 대한 평가가 좋더군. 셀린 소장도 회사에 이메일을 보내어 자네가 그동안 어떤 일을 했으며 또한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잘 마쳤다고 알려 줬다고 하더군. "
"스리랑카 프로젝트도 상무님께서 제안을 해 주신 사업이었고, 저는 그 이후에 진행만 했을 따름입니다. 성과가 좋아서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쉽지는 않았던 사업이었습니다. 지나고 보면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들만 남게 되었는데, 그 당시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게 매일매일의 일이었습니다."
"그래. 자네 고생했던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네. 그쪽 일이 쉬운 게 하나도 없어. 내가 알지. 아무튼, 한국에 오니, 다시 적응하는 게 힘들지? 나도 가끔씩은 태국에 있었을 때 생각이 난다네."
"비행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다시 밟았을 때 감회가 깊었지만 한편으로는 긴장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약간 나아졌는데, 처음에는 적응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도 상무님처럼 방콕시절 생각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근데, 그동안 방콕에서 뭐 재미있는 일은 없었어? 태국 아가씨라도 한 명 만들고 오지 않았어? 자네는 총각이니까 부담이 없잖아. 하하."
"그쪽 일이 쉬운 게 아니어서 일만 하다가 돌아온 것 같습니다."
"남자 혼자서 방콕이라는 대도시에 삼 년이나 있다 왔는데, 일 밖에 안 하고 왔다는 얘기를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김상무 님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이 다 짐작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는 내가 지난 삼 년 동안 방콕에서 있었던 일들 중에서 공식적인 것들 이외에는 전혀 알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지난 방콕생활을 통해서 혼자였던 나의 시간들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던 모양이었다.
나는 뭔가 많은 일들을 입 밖으로 내고 싶었지만, 그냥 웃음을 지으며 마음속에 묻어 버렸다. 남자의 자랑거리인 양 그동안 지내온 시간들을 사람들에게 말하며 다니고는 싶지 않았다. 내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그녀를 대했는지에 대해서 긴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나의 이야기는 그저 속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태국을 보는 그들의 시선도 우리나라보다 낙후되었으며 특히 방콕은 유흥문화가 발달되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방콕이라는 공간 속에서 온갖 사람들이 뒤얽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지는 그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나의 마음속에 혼자서 추억으로만 간직하는 것이 오히려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귀국한 지 오 년이 흘러 버렸고, 나는 업무차 방콕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출장 기간 동안 나는 시간을 내어서 무에타이 체육관을 찾아가 보았다. 반가워하는 관장과 트레이너들을 볼 수 있었다. 관장의 사업도 더욱 번창하여 방콕을 포함하여 근교에 체육관을 새로 여러 곳 더 열게 되었다.
"장. 정말 오랜만이네요. 여기를 잊지 않고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관장님. 모습이 하나도 안 변했군요. 사업이 이렇게 번창해져서 정말 축하드립니다."
"투자자들이 많이 도와주었어요. 그리고, 장도 우리 체육관 홍보를 많이 해주었어요. 마지막 경기 기억나요?"
"네. 라차담넘 스태디움에서 했던 경기였지요. 제 평생 잊지 못할 시합이었습니다."
"장을 모델로 해서 체육관 이미지 홍보를 외국인들에게 많이 했어요. 덕분에 그 이후로 외국인 훈련생들이 많이 늘었어요. 지금도 보면, 외국인들이 많이 보일 거예요."
"한국에 돌아가서 무에타이를 계속해 보려고 했지만, 한국의 체육관들이 영 신통치가 않았어요. 관장님 체육관에서 연습했던 것에 비하면 한국은 트레이너 숫자도 적거나 아예 없이 관장 혼자서 하는 곳이 대부분이에요. 아마 인건비가 비싸서 그렇겠죠. 그래서, 다시 무에타이를 연습하러 방콕에 오고 싶어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장의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겠군요."
"하하. 이제는 저도 나이가 들어서 경기는 무리일 거예요. 옛날처럼 화끈한 경기를 할 자신도 없고요."
지난 삼 년 동안의 방콕생활에서 수없이 땀을 흘렸던 이 체육관을 한 바퀴 돌아보고 감회에 젖은 심호흡을 하고는 관장과 트레이너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곳을 나왔다.
밤에는 타나카의 가게에도 들려 보았다. 그의 가게는 여전히 그 자리에 오 년 전의 모습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타나카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태국여자와 결혼하여 이제는 완전히 방콕에 정착하게 되었다. 우리는 추억의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누었다. 그의 아내는 조용히 가게 일을 거들고 있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장. 정말 오랜만이야. 다시 가게에 와줘서 고마워. 간간히 너 생각 많이 했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한국에 돌아가니 좋아? 방콕에서 살던 시절이 많이 생각나지 않아?"
"응. 방콕이 많이 생각나지. 한국으로 돌아가서 벌써 오 년의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어. 한국처럼 빨리 변해가는 사회도 없을 거야.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잡생각을 할 여유가 없는 것 같아. 이곳에 삼 년이라는 시간 속에 있으면서 쌓였던 추억들도 모두 잊어버리게 만들어 버렸어. 그 지난 삼 년이 마치 어제일처럼 느껴지는데도 말이야."
"나도 일본에 살았을 때는 정말 정신없이 살았었지. 도쿄에서 살면서 여유가 없이 살아가는 생활에 지쳐갔지. 그래서 내가 여기 방콕에 계속 있게 되는 것 같아. 이제는 저 여자를 만났으니까, 여기서 계속 살아갈 것 같아."
타나카는 그의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다보았다. 그의 아내도 그의 시선을 의식하자 부드러운 눈길로 답을 해 주었다.
"정말 잘 어울린다. 타나카. 둘 사이에 애는 있어?"
"아직은 없어. 내년에 애를 가지려고 계획 중이야."
"어떻게 만나게 되었어? 궁금한데."
"몇 년 전에 내가 좀 몸이 아팠던 때가 있었어. 그때 가게 일을 도와줄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했었는데, 그 사람이 지금 내 아내야. 정이 들어 버리게 되었지. 근데, 장. 너 방콕에 있을 때 만났던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어? “
“내가 방콕을 떠나기 직전에 헤어지게 되었어. 헤어지자고 누가 먼저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별을 모두 준비해 왔던 거였지.”
“보고 싶지는 않니?”
“보고 싶었지. 한국에 가서도 사실 많이 생각이 났었어. 몇 번이나 방콕에 다시 와서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었지.”
타나카와 술잔을 이리저리 돌리며 녹의 얘기를 나누다가 그의 가게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