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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명상을 하는가?-I-

'경거망동(輕擧妄動)'을 멈추기 위한 명상

by 최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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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명상을 하는가 – 척추 하나를 바로 세우기까지의 긴 여정


원불교 박대성 교무님의 글 「슬기로운 명상생활 32. 경거망동하는 일이 차차 없어지는 것」을 읽고 저는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좌선의 공덕 중 첫째로 **‘경거망동(輕擧妄動)이 사라지는 일’**을 꼽았다는 사실은, 마치 존재의 근원을 마주하며 독자에게 인식론적 충격을 선사했던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를 처음 읽었을 때와 닮아 있습니다. 그 충격은 내면의 깊은 울림을 통해 기존 삶의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합니다.


오래전 그 소설을 처음 읽던 순간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던 익숙한 관점이 단번에 무너지고, 사물의 표면이 낯설게, 때로는 두려울 만큼 생생하게 다가오던 그 어지러움. 박 교무님의 글이 제게 던진 충격도 그와 비슷했습니다. 명상이라는 행위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교와 명분으로 덧칠되어 있었는지, 그 껍질이 순식간에 벗겨지는 듯했습니다.


사르트르의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철학적 명제가 소설 속 감각과 이미지로 독자에게 직접 파고들 듯, 박 교무님의 글은 명상 수행의 본질을 기교 없이, 적나라하게 제시했습니다.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깊은 통찰이나 특별한 체험보다 훨씬 앞서, 우리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근본적 문제—바로 ‘경거망동’—을 걸어 내놓은 것입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저는 자연스럽게—아니, 강제로—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왜 명상을 하는가?”


그동안 저는 명상을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일, 혹은 더 바른 삶을 살기 위한 노력, 또는 언젠가 부처와 같은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수행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이 문장들은 진실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허황된 구호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저는 이 말들이 좌선의 고통과 실제 수행의 간절함에서 태어난 언어라기보다, 다소 ‘그럴듯한 명분’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도를 너무 미화하는 존재입니다. 때로는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때로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수행을 과장되고 숭고한 언어로 포장합니다.


박 교무님의 ‘경거망동을 멈추기 위한 명상’이라는 표현은, 수행자의 삶이 화려한 이상보다 훨씬 더 냉정한 정직 위에 세워져야 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명상이란 무엇보다 ‘행동 이전의 나’를 다스리는 일이라는 사실—생각이 튀어나가기 이전, 감정이 흘러넘치기 이전,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여 버리기 이전에 존재하는 그 미세한 순간을 길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저는 이제야 조금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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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가 만든 ‘최고’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저는 70대에 접어든 세대로서, 어린 시절 푸시킨의 시 한 구절이나 밀레의 <만종> 한 장면이 인생의 지침이 되던 감수성을 기억합니다. 가난과 전쟁의 상처 속에서 희망을 찾아야 했던 시대에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문장 하나가 곧 가장 위대한 시로 여겨졌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 거창한 철학서보다, 들고 다니기 쉬운 작은 시집 한 권이 마음을 붙잡아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문장은 진리나 다름없었고, 세상이라는 무게를 감당해낼 버팀목이자 이정표가 되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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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개인적인 역사를 가지게 됨니다. 나는 감히 그것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모든 인간의 인격이 소중하다는 논리의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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