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한탄하고 현재를 불평하며 미래를 절망하는 사람의 인생은 짧다.
우리가 살아가며 가장 자주 말하는 탄식 중 하나는 “정말 인생은 너무 짧다”라는 문장일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짧은 것이 단지 ‘시간의 양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우리가 ‘주어진 시간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 이 문제를 사유하는 순간 우리는 자연과 역사,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게 된다.
이 글은 노자 『도덕경』의 뼛속까지 냉혹한 명제인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중심에 놓고, 이를 현대 사회철학자인 윤평중 교수의 개념 확장인 *“역사불인(歷史不仁)”*과 연결시키며, 결국 인생이 왜 짧다고 느껴지는지 그 철학적·심리적 구조를 해부해 보고자 한다.
철학이란 먼 우주의 이치를 논하며 현실을 떠나는 학문이 아니라, 결국 다시 우리의 생활로 돌아와 지금 몸으로 살아내는 하루를 변화시키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 제5장은 이렇게 말한다. “天地不仁, 以萬物為芻狗.(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으며, 만물을 추구(짚으로 만든 제사용 개)처럼 여긴다.
추구란 제사에 사용한 뒤 불태워 버리거나 버려지는 소모품이다. 노자는 바로 그 이미지로 자연(천지)을 설명한다. 즉 자연은 인간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으며, 감정적으로 연민하거나, 인간의 사정을 고려하여 비나 햇빛을 조절하지 않는다. 착한 사람의 논밭에만 비가 내리지도 않고, 악인의 비극을 보고 번개가 멈추지도 않는다. 자연은 **도(道)**라고 하는 필연적이고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원리 속에서 움직인다. 이 원리는 선악을 판단하지도, 정의 구현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자연은 흐르고 멈추고 순환할 뿐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단지 지나가는 존재 중 하나일 뿐이다.
천지불인의 핵심은 “자연은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문명과 기술을 이룩하며 마치 자연을 통제할 수 있는 듯 착각하지만, 태풍 한 번이면 도시가 마비되고, 판 하나가 움직이면 대륙은 흔들린다. 이 압도적 무심함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노자가 말한 ‘겸허’의 출발점이며, 인간적 오만에서 벗어나는 첫 계단이다.
역사불인은 『도덕경』에서 직접 등장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천지불인의 사유를 인간 세계로 확대 적용한 현대 철학적 개념이다. 윤평중 교수는 말한다. “역사는 인간의 도덕을 고려하지 않는다.” 거대한 문명은 무너지고,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폭군은 호화로운 무덤에 묻힌다. 반면, 선하게 살았던 사람은 기록조차 남지 않고 잊혀 간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삶이 얼마나 쉽게 지워지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중국의 시안(西安)을 여행하며 수천 년의 제국의 흔적을 보게 된 사람이라면 그 무심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왕들이 꿈꿨던 영광과 전쟁, 피와 눈물, 사랑과 배신… 그 모든 것이 결국 오늘날 남은 것은 돌무더기 몇 개와 안내판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종종 ‘세상은 정의롭다’, ‘사필귀정된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역사는 때로 정의를 외면한다. 역사는 선한 자를 보호하지 않으며, 인간의 간절한 바람을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사를 직시한다는 것은 허무주의에 빠지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적 환상을 걷어내고 사실 앞에 서는 용기의 문제다.
윤평중 교수는 말한다. “과거를 한탄하고 현재를 불평하며 미래를 절망하는 사람의 인생은 짧다.” 인생은 태어나 100년도 살지 못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100년이 아니라 실제로는 기껏해야 삶의 20~30%만 살아낸다. 나머지는 무엇인가?
*지나건 일에 대한 후회
* 지금 환경에 대한 불평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타인과 비교하여 보내는 소비적 시간
*의미 없이 허공에 새어나가는 걱정과 분노
이 감정들은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태워 없애는 행위’이다. 이것이 노자가 말한 추구(짚개)처럼 인생을 스스로 소모해 버리는 방식이다. 천지불인과 역사불인의 냉혹한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기대를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마침내 나를 위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때 인생은 짧지 않다. 남은 하루가 천 년처럼 깊어진다. 밀도란 시간이 아니라 의식의 온도에서 나온다.
철학은 추상으로 출발하지만, 추상으로 끝나면 실패한다. 철학은 반드시 삶이라는 흙으로 돌아와야만 완성된다. 윤평중 교수는 이를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표현한다. 보편성은 삶과 연결되지 않으면 공허하며, 단지 말잔치일뿐이다. 가장 고귀한 사유는 일상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 국 한 그릇을 먹으며 느끼는 따뜻함
* 고령의 형님. 누님과 함께 천천히 걷는 여행
* 친구들과 농담을 나누며 웃는 순간
* 혼자 방 안에서 삶을 돌아보는 조용한 밤
이 순간의 조각들 속에야말로 우주와 역사, 노자와 헤겔이 모두 들어 있다. 철학은 거대한 사유가 아니라,
삶을 의식하고 살아내는 태도이다. 헬라스의 격언이 말한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내일이 아니라 지금. 다음 생이 아니라 오늘. 구체적 보편성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삶은 지금이라는 좁은 입술 사이로만 흘러갈 수 있다."
올해를 상징하는 사진을 떠올릴 때, 많은 사람은 거대한 성취보다 오히려 작고 사소한 장면을 떠올린다.
왜냐하면 그 장면만이 진짜 살아낸 순간이기 때문이다. 80대 큰누님이 병마를 이겨내고 여행길에서 가장 먼저 걸음을 옮겼던 모습, 친구들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연회비를 가져가자!”라며 박장대소했던 기억. 이것은 소소한 사건이 아니라, 인생의 본질이다.
모든 역사적·우주적 진실이 말해 주는 것은 단 하나다. 세상은 무심하고, 역사는 무정하다. 그러나 바로 그 무심함 덕분에 우리는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나의 삶을 스스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철학은 결론을 말하지 않는다. 철학은 삶으로 결론을 쓰게 한다. 따라서 질문은 이 글을 읽는 지금 우리 각자에게 되돌아와야 한다.
“나는 오늘을 살았는가?” 단 한순간이라도 온전히 살아냈는가? 지금 여기를 살아낸다면 인생은 결코 짧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