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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발등 찍고 싶은 날

by 글마중 김범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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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밤 줍는 계절이 돌아왔다.

후드득!

소리 난 곳을 가보면 반들반들 윤이 나는 알밤이 오롯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가슴이 뛰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밤 줍는 재미를 알기에 알맞은 농장과 날짜를 정한 다음 누구와 갈 것인가 고민했다.

“아줌마 밤 주우러 가요!”

나보나 열한 살 많은 아주머니를 졸랐다. 밤 줍기 명분으로 만날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몇 년 전 관절염 수술해서 산을 못 타서 싫어.”

“산 중턱 밭둑에 밤나무가 있어요. 그냥 바람 쐬러 간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랬다. 맛있는 점심도 대접하고 밤을 주우면 다 아주머니께 드릴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어머니 팔촌 동생이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한 달에 쌀 서 말씩 내고 시내에 있는 아주머니 집에서 지냈다. 야무지지 못한 나는 천리타향에 귀양살이라도 온 듯 밤이 되면 이불속에서 옆에 자는 할머니한테 들킬까 봐 숨죽여 울다 잠이 들었다. 토요일마다 시골집에 가는 데도 1학기 내내 그랬다. 허허롭기 그지없는 나한테 한 줄기 빛이 있었다. 바로 아주머니였다. 미용사인 아주머니는 미용실 쉬는 날에만 집에 왔다.

“잘 있었어? 이리 와서 얼른 먹어, 우리 범순이가 좋아해서 많이 사 왔지!”

아주머니는 말끝마다 우리 범순이 우리 범순이 했다. 신세 지고 있다는 부담감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나한테 우리 범순이라는 말은 존재를 인정해주는 울림 있는 고귀한 사랑의 다섯 음절이었다.

아주머니 어머니인 할머니는 아저씨와 친정 조카를 데리고 숙제를 하는 내 등 뒤에서 쟤는 이런 것 안 먹는다며 먹어보라는 말 한마디 없이 오도독, 오도독 맛있게 해삼을 먹은 일이 있었다. 꿀떡! 꿀떡!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외로운 나한테 아주머니는 아름다운 천사였다. 한번 천사는 영원한 천사다. 나는 아름다운 나의 천사에게 소설가가 되어 첫 데이트를 신청했고 받아들여졌다.


밤나무 밑에는 큼직한 알밤과 밤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아주머니는 수술 후 균형 잡기가 어려워 집게로 밤송이 벗기는 일이 힘들다고 했다.

“힘들면 천막 아래서 쉬고 계세요.”

“알았어. 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주워.”

그러면서도 아주머니는 밤나무 밑을 떠나지 않더니 보이지 않았다. 그리 오래지 않아 나 역시 허리가 아파 그만 줍기로 했다.


“아줌마!”
아주머니는 천막 아래에서 저수지를 아련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던 나는 깜짝 놀랐다. 아주머니 윗입술에 피가 배어 있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어. 괜찮아”

“어떡해, 싫다는데 모시고 와서 그런가 봐요.”

아주머니가 안 괜찮은 척해 보이느라고 활짝 웃었다.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아, 아줌마. 앞니도 부러졌어요.”


식사 끝나고 대청호 주변 드라이브나 할걸!

발등을 찍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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