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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마중 김범순 Oct 13. 2024

사는 게 즐겁다

12. 영화 보는 날

사진출처 : 고은별 촬영 - 서울 교보아트센터 


한 사장 부인이 한 달에 한 번 외출하는 날이 돌아왔다. 부부 동반으로 영화를 보러 간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 국가에서 시각 장애인 세상 보기 프로젝트를 시행해 개봉작을 무료로 관람시켰다. 김 여사는 한 사장 부부의 활동 도우미자격으로 동행할 수 있었다. 


김 여사에게 한 사장 부인은 까다롭고 거만해서 이만저만 얄미운 존재가 아니었다. 앞도 못 보는 주제에 좋은 집에서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사모님 소리 들으며 사는 연적으로 느낀 질투 때문에 더 미웠을 것이다. 


그런 한 사장 부인이었지만 외출하려고 나설 때는 또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과 구두, 장신구는 명품인데 오 여사가 썩둑 썩둑 잘라 준 부스스한 심한 곱슬 단발머리와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였다. 


한 사장 부인은 희미한 파마약 냄새를 못 견뎌 미용실을 가지 못하고 화장품도 발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김여사가 영양크림을 발라줬더니 화공약품 냄새가 난다고 구역질하며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씻어냈다. 


피부가 악건성이라 금방 트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피가 나는데도 바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바셀린뿐이었다. 냄새가 안 나서 그것밖에 쓸 수 없단다. 아무리 보습 효과가 뛰어나고 안전하다 해도 화장품은 아니지 않은가.


중세풍의 크고 화려한 화장대에는 쓰지 않은 향수 한 병과 조악하고 촌스럽기 짝이 없는 삼천 원짜리 바셀린 한 통만 놓여있었다. 품질 좋은 천연 기능성 화장품이 얼마나 많은데! 


김 여사는 다시금 쓸데없는 오지랖 떨지 말고 냉정해지자 입을 앙다물었다.  


영화관 대기실은 가족이나 도우미 손을 꼭 잡은 앞 못 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서로 표정을 보지 못하고 의사소통을 하니까 목소리만 커져 도떼기시장 같았다.  


처녀 때 딱 한 번 영화관을 가본 김 여사였다. 며칠 전부터 영화 본다는 설렘에 잠도 설치며 이날을 기다렸다. 이렇게 시끄러우면 영화감상이고 뭐고 다 끝장난 거 아닌가?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게 아니다. 


영화관 측에서는 상영관 하나를 비워 놓고 일반 관람객과 만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통로 관리를 했다.

 

상영시간이 거의 다 돼갈 무렵 헐레벌떡 나타난 시각장애 협회 여직원이 본인과 동반자 명단을 서둘러 확인했다.


  “성함이 뭐라고요? 바쁘니까 대답 좀 빨리빨리 하세요!”


앞이 안 보이면 공전과 자전이 멈춘 지구 한가운데 선 것 같아 자동으로 행동과 말의 속도가 느려진다. 


여직원은 답답해 미치겠다며 확인 끝났으니 저리 비키라고 한 사장 부인 어깨를 확 떠밀었다. 휘청거리던 한 사장 부인은 왼쪽의 한 사장과 오른쪽 김 여사를 놓치고 풀 죽은 손을 높이 들고 애타게 더듬거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 여사가 소리쳤다. 


  “이보세요, 하마터면 우리 사모님 넘어질 뻔했잖아요!”


여직원도 만만찮게 큰소리로 핀잔했다

  "안 넘어졌잖아요?" 


  “늦게 온 주제에 되레 큰소리나 치고.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함부로 까불어!”


김 여사가 씩씩거리자 한 사장 부인이 그만하라며 김 여사를 세게 잡아당겼다. 한 사장도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넉넉한 얼굴로 말했다. 


  “온종일 고된 업무에 시달리고 집에 가면 할 일도 많을 텐데 영화 끝날 때까지 퇴근도 못 하고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이 많은 우리가 이해합시다.” 


한 사장 부인이 김 여사 팔과 어깨를 지나 귓가를 더듬어 잡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협회 직원 눈 밖에 나면 영화관람 희망자 명단에서 빼버려요. 우리는 이런 날 아니면 영화관에 오고 싶어도 못 와요. 일반인과 같이 영화 보면 입장부터 퇴장까지 오래 걸려 민폐고 무엇보다 우리랑 같이 영화 보는 게 기분 나까 봐 무섭거든요. 여기 있는 사람 다 더러워도 꾹 참고 있는 거예요.”  


김 여사는 한 사장 부인이 또 가여웠다. 


상대가 맞수라야 싸울 맛이 나지! 이렇게 자꾸 약해지면 안 되는 데 이런다. 


정에 끌려 분별력을 잃으면 일도 그르치고 망신만 당한다던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의 당부가 또 떠올랐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고 했다. 구백 냥을 잃은 적이다 보니 자꾸 전의가 상실되었다. 


야맹증이 심한 김 여사였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까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한 걸음도 못 떼고 허둥거리자 오히려 한 사장 부부가 앞장서서 김 여사를 이끌며 오늘 자리는 앞쪽이라고 했다. 겨우 암순응한 김 여사가 좌석 번호를 확인하고 한 사장 부부를 앉혔다. 


보는 것과 못 보는 것의 차이도 종이 한 장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동안 앞 못 본다는 이유로 한 사장 부인을 얕잡아봤던 것이 부끄럽다. 


왜, 또? 뭐가 부끄러운데? 

김순자, 정신 바짝 차려라!

 

소란스러워 귀가 먹먹한데 영화가 상영되었다. 장내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한참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하도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떴던 감았던 모든 이들이 감격과 기대에 찬 얼굴로 영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 여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귀로만 들어도 영화감상이 되느냐고 물었다. 한 사장이 대답했다.

  “화면만 못 볼 뿐 우리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눈 밝은 사람보다 훨씬 자세히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믿기지 않았으나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한 사장 부인은 영화를 보고 나니 산다는 것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 같다고 했다. 김 여사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둘은 판타지 영화 제작이 많이 발전했고 특히 음향효과 기술이 탁월하다고 칭찬했다. 

 

한 사장 부인은 점자도서관을 이용했다. 책을 신청하면 그리 오래지 않아 점자책과 책 내용이 녹음된 테이프가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심심해서 라디오 오락프로그램만 듣는 줄 알았더니 여러 장르의 소설과 인문 교양서적을 테이프를 통해 귀로 읽었던 것이다.


김 여사는 박식한 한 사장 부부한테 저절로 기가 죽었다. 


그러고 보니 한 사장 부인은 그 누구보다 안내견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안내견이 있으면 점자도서관에 가서 마음껏 책을 고르고 친구와 사귀어 이야기 나누며 많은 정보도 접하고 오가는 동안 저절로 걷기 운동이 된다. 게다가 안내견을 직접 보살피면 심각한 결벽증도 완화되어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이 자연스럽게 둔화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13. 부부


사진 : 김범순 - 네덜란드 국적기 홍보 책자에서


도시락 배달은 김 여사 삶에 활력소가 되었다. 


한 사장 역시 묘한 설렘으로 김 여사를 기다렸다. 한 시간 넘는 식사가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한 사장 부인은 김 여사가 도시락을 들고 집을 나설 때마다 신경질을 부렸다. 

  “아유 화공약품 냄새, 화장 좀 작작 해요!”

  “사모님이 싫어해서 화장 하나도 안 하고 썬크림만 발랐어요.”

  “썬크림은 화장품 아니고 약이래요. 보배 아빠한테 작업 걸려고 멋 내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김 여사는 뜨끔했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모질게 말했다.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이래 봬도 앞 못 보는 사람은 싫거든요!”

  “흥. 귀신을 속이시지!”


그렇다고 민낯으로 호텔을 드나들 수 없는 김 여사였다.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화장하고 돌아오면서 말끔히 지우고 물티슈로 깨끗하게 닦았다. 


한 사장이 말했다.

  “김 여사님한테서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나요.”

  “사모님은 화장품 냄새를 정말 싫어하시대요.”

  “김 여사님이 너그럽게 이해하세요. 집사람은 태어나서 이날까지 거울을 본 적이 없잖아요. 그게 불쌍해서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보여주려고 안구은행에 신청했는데 10년 넘도록 차례가 안 오네요.”


김 여사가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사회 활동하는 사장님이 먼저 받으셔야지 무슨 말씀이세요?”

  “가엾은 집사람부터 받아야지요.”

  “우리나라에 사장님처럼 앞 못 보는 분이 얼마나 된대요?”

  “이십칠만? 삼십만은 안 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어제 TV 보니까 병이나 사고로 일 년에 삼십만 명이 죽는대요. 그 사람들이 다 안구 기증하면 앞 못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요?”


한 사장은 어이가 없어 허허 웃었다.


  “그럴 수도 없지만 기증받는다 해도 각막이식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답니다.” 

  “원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니까 안타까워서 이러는 거잖아요!”


김 여사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핏대까지 올렸다.


  “아니, 나라에서는 뭐 하고 있대요. 안구 기증 캠페인도 안 벌이고? 저희들이 잘 보니까 안 보이는 고통을 전혀 모르니까 가만히 있는 거라고요. 대통령,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들 안대 쓰고 앞 못 보는 하루 살기 체험을 꼭 시켜야 한다니까요. 안 그래요? 내 말이 틀려요?”


한 사장은 어린아이처럼 단세포적으로 흥분하는 김 여사가 귀여웠다. 


  “김 여사 말에도 일리가 있긴 있어요. 김수환 추기경이 안구를 기증하니까 많은 사람이 따라 하더라고요. 한 사람이 기증하면 두 사람이 세상을 볼 수 있거든요.”

  “그거 봐요. 아까운 눈을 땅에 묻어 썩힐 까닭이 없잖아요. 나라에서 대대적으로 나서지 않으니까 10년 넘게 기다리는 거라고요!”

  “네, 네. 김 여사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한 사장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안구은행 직원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안구 기증 율이 낮아 매우 안타깝다며 부모가 물려준 몸에서 버릴 것은 손톱밖에 없다는 유교적 영향이 커서라고 했다. 머리를 자르는 것도 불효라고 여겼던 민족이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우쭐해진 김 여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실례되는 건 아닌지~?”

  “괜찮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사장님은 왜 앞을 못 보게 되셨어요? 

  “물어볼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 사장 얼굴에 잔잔한 일렁임이 지나갔다. 


  "열 살 때 감나무에서 떨어져서 이렇게 됐어요. 나는 해와 달이 떠 있는 하늘과 산과 들에 계절 따라 피어나는 꽃들과 무지개까지 다 봤거든요. 내가 봤던 그 아름다운 세상을 집사람한테 꼭 보여주고 싶어요. 그렇다고 집사람한테 지은 많은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요.”


한 사장은 절대 가정을 깨트리지 않을 사람이구나! 


저런 남편을 둔 한 사장 부인은 얼마나 좋을까? 한 사장 부인이 가슴 저리도록 부럽고 질투가 났다. 


김 여사는 우리나라 남편들을 책임지는 형과 책임회피 형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보았다. 한 사장처럼 책임지는 형은 가부장적인 기질이 강한 반면 싫어도 끝까지 조강지처와 살다 죽음을 맞이한다. 책임회피 형은 자유분방하고 낭만적이며 사랑이 우선이라 미련 없이 처자식을 버린다. 


여기까지 생각한 김 여사는 아들이 핏덩이였을 때 도박에 빠져 집 나간 남편은 어떤 유형이라고 명명해야 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도시락을 배달한 지 세 달 되었다. 김 여사는 호시탐탐 안방 차지하려던 계획을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부부는 사랑한다고 표현하지 않아도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을 해결해주고 싶어 하는 필수불가결의 관계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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