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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마중 김범순 Oct 13. 2024

사는 게 즐겁다

10. 솜씨가 달아준 날개

사진 출처 : 고은별 인스타그램 


  “김 여사!"

생각에 잠긴 김 여사는 대답이 없다. 한 사장 부인이 신경질을 부렸다. 

  "김 여사 내 말 안 들려요?”

  "네?"

그제야 화들짝 놀라는 김 여사.


  "사모님. 저 부르셨어요?"


현실로 돌아온 김 여사는 한 사장 부인한테 물을 떠다 주며 무슨 일이 있어도 궁전 같은 한 사장 집을 떠날 수 없다고 거듭 다짐했다. 한 사장 가족을 알뜰살뜰 챙기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집으로 만들어 죽을 때까지 살고 말 것이었다.


김 여사가 한 사장 식구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중대 발표를 했다. 


내일부터 음식을 만들겠다고 한 것이다. 


한 사장 부인이 환호성을 올렸다. 오 여사는 무거운 짐을 덜어 줘서 고맙다고 뛸 듯이 기뻐했다. 


다음 날 김 여사가 솜씨를 발휘한 저녁상이 식탁 가득 차려졌다. 한 사장 부부는 황홀한 표정으로 수저를 들었다. 


한 사장 부인은 몇 술 뜨다 말고 잔뜩 실망하며 수저를 내려놓았다.  한 사장은 마지못해 수저질을 했고 보배만 맛있다고 했다. 김 여사는 하늘을 찌르던 자신감을 구석에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맛이 없으세요?”

  “네!”

한 사장 부인이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간이 안 맞아요?”

  “간도 세고 양념이 지나쳐서 재료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없어요.” 


자기가 만든 음식이 맛없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나 더 맛있기를 바라나 아니꼽고 자존심도 상했다. 그렇다면 오 여사도 결코 음식 솜씨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 여사는 며칠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한 사장 부부는 미각이 남달라 어렸을 때부터 습관적으로 한식을 먹어왔을 뿐 좋아하지 않는다고.


김 여사는 한 사장 부인한테 다양한 요리책과 식재료를 구해 달라고 했다. 


  “맛있는 음식 먹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어요?” 


한 사장 부인은 한 사장이 퇴근하자마자 김 여사 의견을 전했다. 이튿날 한 사장 지시를 받은 박 기사가 요리책을 사 오고 여기저기서 음식 재료를 주문해 일사천리로 준비를 마쳤다. 


한식이든 양식이든 최고의 요리 비결은 신선한 재료, 요리에 알맞은 신선한 기름, 적당한 간, 요리와 어울리는 양념과 소스, 적절한 화력, 오롯한 정성이라고 주장하는 김 여사였다. 


김 여사는 요리책을 보며 듣도 보도 못한 히말라야 핑크 소금과 송로버섯 오일, 발사믹 식초, 오가닉 호호바를 이용한 서양요리와 퓨전 음식을 만들었다. 두반장, 굴 소스, 최고품질의 제비집, 말린 해삼, 전복, 상어지느러미, 양파기름, 고추기름, 마라탕 소스, 돼지 내장 그물로 짠 기름 등을 이용한 중화요리도 빼놓지 않았다.

 

김 여사 판단이 옳았다. 


한 사장 부부는 식사 때마다 맛있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한 사장이 봉급을 더 줄 테니 일터로 점심을 내오라고 했다. 


박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도시락을 든 김 여사는 한 사장이 일하는 호텔로 갔다. 귀부인이 된 것 같아 누구한테든 자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미숙과 재혼해서 깨를 볶는 선희와 모임 회원들한테 빠짐없이 전화하고 마지막으로 한 사장 집을 소개해준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한테도 고맙다고 했다. 그 언니는 소개비를 외상으로 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빨리 보내라고 야멸치게 독촉했다. 한껏 들떴던 기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괜히 전화했다고 후회하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몇 번 말씀드렸잖아요 봉급 받아야 보낼 수 있다고!"


한 사장 안마시술소가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스르르! 자동문이 열렸다. 


눈 둘 곳 없이 으리으리한 실내와 반질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현기증이 일었다. 


입주 첫날 퇴근하고 돌아온 한 사장한테 인사를 하니까 대뜸 이렇게 말했다. 

  “김 여사님도 살아오시는 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어머나, 어떻게 아신대요?”

  “앞 못 보는 사람은 예민해진 다른 감각으로 훤히 알 수 있답니다!” 


붓끝을 가로로 살짝 대다 만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부인과 달리 한 사장은 커다란 눈이 자주 깜빡거리지 않아 어색했지만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 큰 키와 탄탄한 몸집! 장애만 없었으면 영화배우를 했을 텐데 참으로 인물이 아까운 사람이었다. 


한 사장은 시각장애 협회 직원 중매로 부인과 결혼했다. 


보배가 누워있는 갓난아기였을 때는 불편한 대로 그럭저럭 키울만했는데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정이 백팔십 도 달라졌다. 성공하기 전까지 한 사장은 저녁에 출근해서 아침에 퇴근했다. 도우미가 오후 6시에 퇴근하면 한 사장 부인 혼자 보배를 돌보느라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한 사장 부인은 하는 수 없어 천 기저귀를 두 개 묶어 자신의 허리와 아기 허리에 묶고 지냈다. 더러운 거나 위험한 것을 집어삼킬까 걱정되고 침 묻은 손으로 벽에 붙은 콘센트를 건드려 감전될까 봐서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나 아침에 출근한 도우미는 기절초풍을 했다. 


매일 새로운 것으로 호들갑을 떨어 별로 놀라지 않았는데 그날은 달랐다. 


보배가 기저귀를 빼고 방바닥에 눈 똥을 집어 먹더라는 것이었다. 아이 키우는 집에서는 한두 번 있는 예사로운 일이었지만 한 사장 부인은 큰 충격을 받고 앞 못 보는 거야말로 갚을 수 없는 철천지원수라고 울부짖었다. 한 사장은 그 이야기를 하며 자기 부인의 결벽증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고 했다.


  “집사람이 까다로워서 힘들겠지만 이해하고 많이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분 만나서 기쁩니다!”


김 여사는 일이 순조롭게 성사될 것 같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가 말했다. 아내가 동석한 자리에서 다른 여자에게 아름답다고 하는 남자는 공략하기 쉽다고. 김 여사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앞 못 보신다면서 인물 좋은 것은 알아보시네요? 빼어나진 않아도 못생겼다는 말은 안 듣고 살았네요.”


한 사장이 호쾌하게 웃었다. 웃는 모습도 시원했다. 


  “또, 또 시작이다!”


한 사장 부인이 허수아비처럼 일어나 더듬더듬 안방으로 들어가 꽝! 문을 닫았다. 김 여사가 얼른 일어나 토마토 주스를 만들어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 집에 붙어 있으려면 한 사장 부인 미움을 사면 절대 안 된다. 


한 사장의 수기 요법은 효과가 탁월해서 신의 손을 가진 안마사로 불렸다. 


맹학교에서 배운 것 말고 따로 공부한 게 없는데도 혈 자리를 눌러 나타나는 반응으로 고객의 신체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 알아냈다. 고객 중에는 유명한 사업가, 정치가, 연예인, 변호사가 수두룩했다. 


통유리 너머로 직원들이 성심성의껏 시술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납 창구에는 깍쟁이같이 생긴 경리가 새침하게 앉아 있었다. 김 여사는 까닭 없이 경리가 얄미웠다.


박 기사 안내를 받으며 원장실로 들어갔다.

 

같이 지낸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한 사장 안내견 탄탄이가 꼬리를 치며 마주 나와 펄쩍 뛰어 달려들었다. 김 여사가 안아주자 바닥을 뒹굴며 격하게 반가워했다. 여태까지 살면서 이런 반김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김 여사였다. 식구라고 알아보는 것이 고맙고 기특해서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김 여사는 탄탄이가 악수하자고 내미는 앞발을 흔들며 불여우 같은 경리 대신 안주인이 된 자신이 돈을 헤아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상상뿐인데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짜릿했다. 그런 날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었다. 


김 여사가 뭘 몰라도 한참 몰라서 돈 세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VIP 고객인 한 사장은 은행장이 직접 관리했다. 경리는 은행장이 채용해 파견한 외주 직원이었다. 


한 사장이 다가오며 투덜거렸다.

  “왜 내 눈을 쓰다듬고 있습니까?”

김 여사가 깜짝 놀랐다.

  “제, 제가 언제요?”

  “탄탄이는 내 눈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아유 난 또. 오호호!”

  “도시락 가져오느라고 수고했어요.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사모님은 여기 한 번도 안 와 보셨나요?”

  “실수해서 내 체면 깎을까 봐 오기 싫다네요.” 


김 여사가 도시락을 펼쳤다. 


한 사장은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릇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만져 위치를 정확하게 인식한 뒤 수저를 들었다. 


입주 첫 저녁 식사 직전 김 여사는 눈 뜨고 못 볼 지경으로 음식을 많이 흘리겠거니 예상했다. 그러나 한 사장 부부는 거의 흘리지 않았다. 다만 식사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게 흠이었다. 


한 사장은 도시락을 천천히 아주 맛있게 먹었다. 


김 여사는 한 사장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음식 이름과 재료, 만드는 법을 설명하며 골고루 수저 위에 올려놓았다. 한 사장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라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김 여사는 고개를 돌리고 의미 있는 웃음을 흘렸다.



11. 탄탄이


사진 : 김범순 - 창고형 대형 마켓 '슬리그로' 네덜란드


  “보배 아빠는 보배랑 탄탄이 밖에 몰라요.”

한 사장 부인이 한숨을 쉬며 하소연했다. 그만하면 됐지 뭘 더 바라는가 싶은 김 여사는 귓등으로 흘리기 딴 소리를 했다.

  “사모님 탄탄이도 똥개지요?”

한 사장 부인이 깔깔 웃었다.

  “캐나다가 원산지예요. 안내견은 영리하고 충직하고 털색이 눈에 잘 띄는 대형 견 래브라도 리트리버종을 훈련시키거든요.”

  “내부랄도 뭐라고요?” 

한 사장 부인이 숨넘어갈 듯 웃으며 김 여사는 말을 참 재미있게 한다고 했다. 

  “훈련까지 시켰으면 엄청 비싸겠네요?”

  “안내견은 무상이에요. 돈으로 살 수 있었으면 나도 벌써 샀지요.”


안내견이 될 강아지는 태어난 지 7주 차가 되면 훈련 가정에 1년간 위탁한다. 사람을 배려하고 인내하고 친해지는 사회화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다. 이 기간이 끝나면 8개월간 본격적으로 훈련하고 시험을 본다. 시험에 통과해야 안내견이 되는데 합격률은 30% 정도밖에 안 된다. 


안내견은 자신의 안내를 받는 동반자에게 위험을 알리는 신호를 제외하고는 절대 짖지 않도록 철저하게 훈련을 받는다. 


탄탄이는 성격이 활달해서 좌충우돌 장난이 심하고 애교도 많이 부렸다. 하지만 안내견 조끼를 입히고 특수 기능이 부착된 끌채를 채운 뒤 목줄을 잡으면 자세가 안내 모드로 급변했다. 김 여사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발을 밟고 문질러 봤다. 탄탄이는 그냥 참을 뿐 소리 내지 않았다.


  “우리 집에 오는 안내견 이름은 모두 탄탄이예요. 저 탄탄이가 두 번째인데 다음 달 은퇴라 눈앞이 캄캄해요.”


김 여사는 항상 캄캄한 채로 살면서 앞이 캄캄하다는 말에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한 사장 부인이 빽 소리쳤다.


  “김 여사.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김 여사는 뜨끔해서 얼른 정색하며 안 웃었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탄탄이 가고 나면 보배 아빠 애달파할 텐데 어떻게 지켜봐야 할지 벌써 걱정돼요.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거든요. 에효, 나나 그렇게 위할 것이지!”


안내 견 수명은 15년 정도 되지만 입양받은 지 7~8년 지나면 돌려보내야 했다. 


  “보배 아빠하고 나하고 안내견 신청하면 나만 떨어져요. 나도 안내견 있으면 같이 산책하고 말벗도 하고 참 좋을 텐데.”

  “그러니까요.”

김 여사는 마음에 없는 대답을 했다.


  “우리나라는 안내견 분양하는 곳이 S 기업 안내견 학교랑 한국 장애인 도우미견 협회 두 군데밖에 없거든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인데 돈으로도 안 되는 게 안내견 분양이에요. 심사 기준이 뭐 그리 까다로운지 생각할수록 기분 나쁘다니까요!”  


신청자는 많은데 일 년에 서른 마리 정도 분양하니까 안내견이 턱없이 부족했다. 한 사장 부인은 우선 부유한 데다 무엇을 배우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직업도 없고 신경질적이고 결벽증까지 있으니 자격 미달 판정을 받을 수밖에. 거기까지 생각하자 또 웃음이 났다. 김 여사는 얼른 이맛살을 찌푸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젊은 시절 한 사장은 밖에 나가면 말 한마디 안 하는 샌님으로 점잖았으나 집에 돌아오면 사납게 욕설을 퍼부으며 아내를 불렀다. 아내가 손에 닿으면 도망가지 못하게 머리채부터 휘어잡고 발로 차고 때렸다. 어찌어찌 도망친다 해도 좁은 방안을 뱅뱅 돌 뿐이었고 이리저리 피하다 한 사장한테 마주 걸어가 붙잡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 사장은 그렇게 잡힌 아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해야 매질을 멈췄다. 


한 사장 부인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멀리멀리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집을 못 찾고 헤매는 게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공포의 세월을 살면서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절망이 죽음보다 가까이 있어서다. 


한 사장 무의식 속에는 아내가 절대 도망가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어서 더 함부로 했을지도 몰랐다. 


한 사장 부인한테 지난 이야기를 들으며 김 여사는 만약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어버렸을 것 같았다. 혀를 물고! 혀를 깨물고? 김 여사는 도리질을 쳤다. 남의 일이니까 발끈해서 쉽게 한 생각이고 자신도 한 사장 부인처럼 그냥 눌러앉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 여사는 갑자기 한 사장 부인이 가여웠다. 그토록 모진 고통 끝에 얻은 여유니까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고 인정도 했다. 순간 김 여사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이래서는 안 돼! 가엾긴 뭐가 가엾고 자격은 무슨 자격? 하고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한 사장은 보배가 태어난 뒤 달라지기 시작했고 안내견 입양 교육을 받으면서 변화되고 안내견과 함께 살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항간에서는 안내견이 극도로 인내하며 주인에게 복종만 해서 스트레스가 쌓여 수명이 짧다고 예측하지만 주인과 안내견은 서로 돌보는 관계라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 사장은 탄탄이한테 밥 먹이고 누구의 도움 없이 욕조에 들어가 장난치며 목욕을 했다. 목욕이 끝나면 수건과 드라이로 뽀송뽀송할 때까지 털을 말렸다. 


한 사장은 탄탄이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고 행복한 탄탄이는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목숨 걸고 한 사장의 안전을 책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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