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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마중 김범순 Oct 13. 2024

사는 게 즐겁다

14. 팔자 바꾸기

사진 : 김범순 - 스페인 카탈루냐 달리 박물관 


이런저런 생각에 김 여사 얼굴이 어두웠다. 한 사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 여사 언짢은 일 있어요. 기분이 안 좋은 것 같네요?” 


 화들짝 놀란 김 여사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아니라고 했다. 


  “나는 김 여사가 참 좋아요. 김 여사는 나 어때요?”

  “네? 저, 저도 사장님 좋지요. 그럼요. 사장님은 참 좋은 분이지요.”

  “죽기 전에 김 여사랑 한집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반포에 작은 아파트가 있는데 거기서 지낼 생각 없어요?”

  “네-에?”

방금 전 한 사장네 가정 깨는 걸 포기하려던 김 여사는 화들짝 놀랐다. 


   - 일하지 않고 남자 덕에 살아본다! - 


안방 차지는 물 건너갔지만 아쉬운 대로 그 방법도 나쁘지 않았다. 일이 되려면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한 사장이 바짝 졸랐다.


  “김 여사도 싫지 않은 것 같은데 왜 대답을 안 해요? 나는 성격이 급해서 빨리 듣고 싶단 말이에요.”

  “그, 그러죠. 좋, 좋아요.”

  “정말이지요? 지금 웃고 있는 거 맞지요?”

김 여사가 호호 소리 내어 웃었다. 

  “김 여사도 알다시피 탄탄이 가고 난 뒤 사는 낙이 없어요. 이제 더는 못 견디겠네요.”

  “또 분양받으면 되잖아요?”

  "새로운 탄탄이를 분양받고 싶죠. 마음은 굴뚝같지만 양심에 찔려 도무지 신청할 수가 없답니다. 안내견 없으면 사회활동을 아예 못하는 젊은 친구들이 아주 많거든요. 그들에게 보내져야지요. 그러니까 김 여사가 나 좀 도와줘요.”

  “사모님도 사장님 허전해하실 거라고 걱정 많으세요.” 

  “여기서 보배 엄마 얘기가 왜 나와요? 몰래 살자고 하는 이 마당에! 얼른 대답해요. 나랑 같이 살 거지요?”


한 사장은 김 여사 확답을 듣더니 경리한테 부탁했던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경리가 예쁜 선물 상자를 가지고 왔다. 기대에 찬 김 여사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포장지를 벗기고 상자를 열자 핑크빛과 하얀색 실크 슬리퍼가 얌전하게 들어있었다. 


애걔걔! 김 여사는 크게 실망했다. 


한 사장은 꼭 해 보고 싶었며 슬리퍼를 한 짝씩 섞어 더듬더듬 김 여사 발에 신겨주었다.

  “요즘 커플들은 신발 한 짝씩 바꿔 신는 게 유행이래요. 보배네 반에도 아주 많다니까 우리도 한번 젊어져 봅시다!”

실망을 감추기 위해 김 여사가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첫 이벤트에 성공했다는 자신감에 한 사장도 호쾌하게 웃었다.


한 사장은 김 여사의 가벼운 말과 행동 때문에 많이 망설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밝고 고운 목소리와 튼튼한 팔뚝에 대책 없이 빠져들었다. 그저께 반포에 들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마지막 관문이라 생각하고 김 여사한테 물었다. 


  “서른다섯 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뭐 하고 지내요?”


한 사장은 박 기사를 시켜 김 여사의 모든 것을 알아보았다. 착실하게 밥벌이하며 잘 산다고 하면 마음을 접고 계속 요양보호사로만 채용하려 했다. 김 여사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낯 뜨겁지만 깡패 똘마니에 날건달이에요.”


한 사장은 인간관계에서 신뢰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앞 못 보는 사람은 3% 부족해 보이거나 이루 말할 수 없이 착해 보인다. 그것은 눈빛을 볼 수 없어서 생긴 오해이다. 


시각 장애인들은 가족 말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외로움을 심하게 탔다. 그 점을 알아채고 여러 사람이 따뜻한 배려와 사랑으로 위장하고 한 사장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한 사장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뒤 하루아침에 배신하고 재산을 가로채 떠났다.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을 신뢰했던 바보 같은 자신이 싫어서 시력을 잃었을 때처럼 오랫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한 사장은 김 여사의 솔직함을 높이 사기로 했다. 다만 선은 분명히 그었다.


  “살다가 싫어지면 언제든지 헤어지는 겁니다. 우리 관계를 부부로 착각하고 보배 엄마를 질투하면 그날로 끝이에요. 일주일에 세 번 평일 10시에 들러 점심 먹고 출근할게요. 불만스럽더라도 내 말 따라줘요.”

  “점심은 지금처럼 매일 호텔로 내다 드릴게요.”


한 사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내 여자한테 도시락 배달 안 시킵니다!”


호텔 출입 못 하는 것이 못내 섭섭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 뒤 김 여사는 반포 작은 사모님이 되었다. 


반포로 가는 차 안에서 한 사장이 마음껏 쓰라며 카드를 건넸다. 


카드라고는 만 원씩 충전하던 교통카드 밖에 없는 김 여사였다. 매월 생활비를 돈으로 주면 좀 좋아. 오만 원이나 십만 원 들었을 이까짓 카드 주면서 맘껏 쓰라고? 지금 장난하나? 아파트에 처박아 놓고 옴짝달싹하지 말라는 거야 뭐야? 차라리 요양보호사로 도시락 배달하면서 따박따박 월급 받는 게 훨씬 났잖아! 


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내가 너무 쉽게 허락했구나.

이일을 어쩐다?

김 여사는 발등을 찍고 싶을 만큼 후회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서른한 평짜리 아파트에는 새로 장만한 고급 가구와 가전제품이 적재적소에 놓여있었다. 한 사장이 김 여사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평소에 갖고 싶었던 차 있으면 말해요. 외제도 괜찮아요.”


그러면 그렇지! 


잠깐이지만 괜히 후회했다. 김 여사는 한 사장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도시락 배달도 안 하는 데 무슨 차가 필요하냐며 한 푼이라고 아껴야 한다고 사양하는 척했다. 


한 사장은 그런 김 여사가 더 미덥고 사랑스러웠다. 


사실 김 여사는 운전면허가 없다.



15. 환희


사진 출처 : 고은별 인스타그램 - 서울


내일은 한 사장이 온다. 


첫 식사는 아주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다. 김 여사는 아파트에서 멀리 떨어진 대형 마트로 갔다. 한 사장이 즐겨 마시던 적포도주가 눈에 띄었다. 가격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얼른 제자리에 놓았다. 십오만 원이었다. 


일하러 가기 전이니까 술은 안 마실 거야! 


포도주는 포기하고 스테이크용 고기를 사러 육류 코너로 갔다. 투 플러스 꽃 등심은 한 근에 육만삼천 원이나 하고 낮은 등급 등심은 오만오천 원이었다. 먹성 좋은 한 사장은 두 근도 모자랐으나 카드에 십만 원 정도 있을 테니 등심 두 근만 사기로 했다. 


만원은 피 같은 주머니밑천 현금이 있다. 아스파라거스는 한 봉지에 만원이라 박 기사가 냉장고에 쟁여준 당근과 감자를 곁들이면 된다. 


포도주와 아스파라거스 못 산 걸 못내 아쉬워하며 계산대로 갔다. 카드를 건네자 직원이 사인하라고 했다. 한 번도 카드로 물건 사본 적 없던 김 여사는 깜짝 놀랐다.

  "사인이라니요? 사인이 뭐예요?"

직원은 수상쩍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계산기처럼 생긴 판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거기다 서명하시라고요!”


서명!


명자가 들어갔으니 이름을 쓰란 말인데 누구 이름을 쓰지? 한참 망설이던 김 여사는 정성 들여 또박또박 김순자라고 쓰고 만원을 건넸다. 직원이 별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표정으로 이 돈은 또 뭐예요? 했다.  

  “그럼 만 원은 깎아 주는 건가요?”

  “무슨 말씀이세요. 카드로 십일만 원 계산하셨잖아요!”

  “네? 아, 네!”


김 여사는 그제야 얼만지 모르지만 카드에 십만 원 이상 잔액이 있다는 걸 알았다. 


김 여사는 신바람나게 다시 매장으로 들어가 포도주와 아스파라거스, 버터, 한 사장이 포도주에 곁들여 먹던 치즈를 샀다. 만약 잔액이 부족하다면 아스파라거스와 버터만 살 것이었다. 계산대 앞에 서니 가슴이 사뭇 두근거렸다. 직원이 사인하라고 했다. 아까보다 한결 자연스럽게 이름을 썼다.


김 여사는 점심 먹고 떠나는 한 사장을 배웅하는 길로 부리나케 아파트 옆에 있는 백화점으로 갔다. 카드에 얼마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서다. 


백화점 전 층을 샅샅이 돌며 특가 할인 판매대에서 마음에 드는 옷과 신발을 사고 전부터 갖고 싶었던 가방도 샀다. 백화점 쇼핑은 처음이라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한 사장한테 전화를 걸어 사고 싶은 거 다 사게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한 사장이 얼마를 썼는데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물었다. 김 여사가 미안해하며 구만팔천 원이나 썼다고 했다. 한 사장은 아까 산 건 집에서 입고 명품관에 가서 전부 다시 사라고 했다.

 

도대체 카드에 얼마가 있단 말인가? 


세상을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다. 


김 여사 눈앞에 고생스럽던 지난 세월이 영화필름처럼 지나갔다. 뜨거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한 달도 안 돼 김 여사 콧대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코를 따라 턱도 올라갔으며 오그렸던 어깨가 활짝 펴지고 동동거리던 발걸음은 느긋하고 여유로워졌다.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백화점에 가서 있는 대로 거드름 피우며 까다롭게 물건을 골랐다. 김 여사가 매장에 들어서면 직원들은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골치깨나 아프겠다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 김 여사는 하루하루 사는 게 즐거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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