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1년 4월 4일
어쭙잖은 내가 칠순을 맞았다.
해외 사는 딸이 들어와 칠순 기념으로 제주도 여행을 가자고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고생만 잔뜩 시켜 키웠으므로 염치가 없다.
잔인한 달 4월
날씨는 계속 흐리고 며칠 비가 내렸다.
청주 공항에서 이륙할 때 비행기가 두꺼운 구름을 뚫지 못하고 굉음을 내면서 빙글빙글 크게 돌았다. 틀림없이 회항 각이다.
딸이 큰 맘먹고 제주도 여행시켜 준다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
돌고 돌던 비행기가 안간힘을 쓰더니 두꺼운 구름을 뚫고 솟구쳐 올라갔다. 대지는 하얀 구름 이불을 덮고 있었고 구름 위는 온통 찬란한 햇살이다.
감탄의 시간은 3분도 채우지 못했다. 무료해서 잡지를 펼쳤다. 잡지에 실린 이국의 풍경을 사진기에 담았다. 아름다워서 가보지 않아도 가본 것처럼 흐뭇했다.
깔끔한 제주 공항
야자수와 돌하르방이 곳곳에 있는 도로가 제주에 왔음을 실감 나게 했다. 렌터카 회사 담장에도 낯선 나무가 즐비했다.
쪼잔한 나와 달리 통 큰 딸은 커다랗고 편한 새 차를 빌렸다.
나, 딸, 큰아들, 큰손녀, 작은손녀.
우리는 뛰어난 승차감에 아주 흡족했다.
이색적인 정취가 풍기는 좁고 정겨운 제주 도로를 달렸다. 안개가 점점 짙어지더니 급기야 앞차도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이 앞섰다. 비상등을 켜지 않는 앞차 운전자를 욕하며 조심 또 조심했다.
터널을 지났던가?
아니면 능선을 하나 넘었던가?
하늘은 흐렸으나 그토록 짙던 안개가 흔적도 없다.
신기했다.
언뜻언뜻 바다가 보였다.
까만 돌담 너머 밀밭이 펼쳐진 카페 『을리』
사진 촬영 : 고은별
딸은 꿈결 같은 이 풍경을 어느 결에 포착했는지 사진을 보내왔다.
을리 카페 입구에 앉아 있던 큼직한 개는 무심한 눈길로 우리를 보았다. 수없이 드나드는 손님을 모두 반겼다면 과로사했을 것이다. 장식 없는 성당 같은 느낌이 나는 높은 천장과 창문이 있는 카페 안에는 손님이 아주 많았다.
아이스크림 얹은 와플을 먹었다. 와플이 그렇게 부드럽고 달콤하고 맛있는지 처음 알았다.
호텔을 향해 달리는데
구름 사이로 해가 비치며 무지개가 다시 떴다.
들판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커다랬다.
무지개 한가운데를 향해 달리는 기분이라니!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할 거라는 행운의 상징일 것이다.
딸이 말했다. 칠순 기념이라 특별히 제주 씨에스 호텔을 예약했다고. 호텔 주차장에는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동백나무가 우리를 반가이 맞았다.
제주 전통 가옥 씨에스 호텔
사진 촬영 : 고은별
초가집의 작고 정갈한 마루가 인상적이었다.
아파트의 낮은 천장에 눌려 살다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높은 천장을 보고 홀딱 반했다.
고전미를 품은 실내와 천으로 만든 조각보 느낌의 발과 나무 욕조도 귀한 대접을 받는 느낌이 들게 했다.
사진 촬영 : 고은별
발코니에서 바다가 보였다. 높지 않고 구석지지 않으면서도 사적 공간을 오롯이 보호받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설계를 참 잘했다.
호텔 앞 나무 장식과 매혹적인 노란 꽃
바다를 배경으로 예술 작품처럼 서있는 나무들
호텔 지을 때 심었는지 아니면 그전부터 있던 것을 이용했는지 장관이었다. 무슨 나무일까? 호텔 지배인한테 물어보았다. 팽나무라고 했다. 팽나무가 호텔의 품격을 한층 높였다.
멋지고 매끈한 가지에 손녀가 올라갔다.
손녀도 찍고 나무도 찍고 바다도 찍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 속에 있는 것처럼 행복했다.
야자나무!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 아니면 볼 수 없는 귀한 풍경
사진 촬영 : 고은별
아래에서 올려다 본 호텔 옆 일부분
작은손녀가 주는 먹이를 기다리는 염소
어린 유채를 뜯어다 건넸다.
아주 잘 받아먹었다.
딸이 큰소리로 불렀다.
“빨리 와요. 올레 시장 가게.”
동백나무 울타리 옆에 세워 두었던 차에 올랐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올레 시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정신이 산만해서 무엇을 사고 싶다는 의욕이 싹 사라졌다.
딸이 제주 특산품 가게에서 감귤초콜릿을 종류별로 잔뜩 샀다. 가게 주인은 신이 나서 덤으로 감귤 크런치를 계속 퍼 담아주었다.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큰아들이 크런치를 좋아해서 그럴 것이다.
제주에서의 첫 저녁은 흑돼지구이였다.
사진 촬영 : 고은별 맛있는 돼지고기와 멜젓
딸이 고기를 구워주는 직원한테 말했다.
“우리 엄마 칠순 여행 왔어요!”
직원이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했다.
멋쩍으면서도 기뻤다.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한 주제에 이런 대접을 받다니 미안하고 고마웠다.
절인 깻잎에 잘 구워진 고기와 파채, 고사리를 얹어 싸 먹었다.
육즙 가득한 뜨거운 고기와 상큼한 깻잎, 알싸한 파채와 씹히는 맛이 일품인 고사리의 조화! 먹어보지 않고는 상상조자 할 수 없는 초대형 오케스트라 화음 같았다.
“고사리나물 너- 무 맛있어요!”
고기 굽던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스무 관 볶았어요. 마음껏 드세요!”
여행 첫날밤이 깊었다.
“오늘은 엄마가 주인공이니까 침대에서 편하게 자요.”
“나는 촌스러운 사람이라 침대 싫다.”
“야호!”
큰손녀가 환호성을 지르며 킹사이즈 침대로 뛰어 올라갔다.
바닥에 이부자리를 펴고 여러 개의 베개를 놓아 내 스타일대로 잠자리를 꾸몄다.
호텔에 가면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목욕 후 샤워 가운 입고 큰 수건으로 머리 감싸기!
잠들기 전에 올레 시장에서 산 오메기떡이 쉴까 봐 문밖에 내놓았다.
뜰에 피어있는 밤이라 더 예쁜 꽃.
예쁜 꽃 아침에 만나자!